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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수 1960년대에 플라스틱은 값도 싸고 쉽게 구할 수 있었다. 플라스틱 생산 비용이 크게 낮아져 비닐봉지, 폴리스티렌 컵, 수축 포장되고 사전 포장된 식품 등으로 이루어진 일회용 문화가 뿌리를 내렸다. 풍부하고 값싼 플라스틱이 쓰레기와 쓰레기 매립지 형태로 새로운 문제를 만들어 낸다는 사실을 우리가 깨닫기까지 20년이 걸렸다. 예컨대 미국의 생수 소비는 1976년에 1인 당 5.7리터에서 2011년에 132리터로 증가했다. 물만 마시기 위해 매년 미국에서 약 500억 개의 플라스틱 병이 생산된다. 재활용 운동은 플라스틱이 우리가 한때 생각했던 것만큼 그렇게 싸구려가 아니라는 인식에 대한 반응이다. 그것은 직접적 관련 당사자, 즉 생수를 만드는 생산자와 그것을 마시는 소비자들에게는 값싼 자원이지만 오염, 천연..
약자의 호소와 권력의 몰락 살려고 일하러 간 일터에서 사람이 죽는다. 광주 현대산업개발 아파트 외벽 붕괴, 양주 삼표산업 골재 채취장 토사 붕괴, 여수 여천NCC 폭발 등 사고가 끊이지 않는다. 안전의식 타령은 그만하자. 위험 감수를 압박하는 현장에서 하루 벌어 하루 사는 말단 노동자의 작업 거부는 어렵다. 아무도 직접 책임지지 않는 현장에 파견된 노동자라면 하소연 자체가 사치다. 그 처지를 모른 체하면 위선자, 못 느끼면 사이코패스다. 그런데도 법은 현장 앞에서 자꾸 멈추고, 정의는 법정에서 자주 반려된다. 태안화력발전소에서 일하다 죽은 비정규직 청년 노동자 김용균 씨 관련 며칠 전 판결도 역시나였다. 원청 대표는 위험을 몰랐다면서 무죄였고, 관련 임직원은 집행유예나 벌금형에 그쳤다. 억울한 죽음에 유가족 한은 쌓여간다. 하소연..
롤프 디터 브링크만 어느 순간에는 단지 시간을 느리게, 천천히, 흘러가도록 늘이는 것만으로 시(詩)가 된다. 한 처녀 검정 스타킹을 신은 그녀가 양말 올 하나 풀리지 않고 다가오고 있는 것은 아름답다. 그녀의 그림자 거리 위에 그녀의 그림자 담가에. 그녀가 치마 밑에까지 올 하나 풀리지 않은 검정 스타킹을 신고 가는 것은 아름답다. _ 롤프 디터 브링크만, 「단순한 그림」(이유선 옮김) 전문 한 처녀의 아름다움에 홀린 눈처럼, 만약 일상에서 시간이 천천히 흐르는 것을 느꼈다면, 그 순간 바로 시의 꽃이 거기에서 피어나고 있는 것이다. 그는 올 것이다, 손에 칼을 들지도 않고, 끔찍한 소리를 내지도 않고. 그는 올 것이다 우연히 지나다 시간을 묻는 누군가처럼, 그는 다가와 모자 벗고 인사를 할 것이다. 천구백육십삼년 이월 십..
먹힌 심장 - 궁극의 사랑이란 무엇인가 “당신이 먹은 건 사실 굴리엘모 과르다스타뇨의 심장이었소, 부정한 아내로서 당신이 그렇게도 사랑했던 그자 말이오. 돌아오기 직전에 이 손으로 직접 그 가슴에서 잘라 온 것이니 그자의 심장이 틀림없소.” 부인은 그리도 사랑했던 사람의 심장이라는 얘기를 듣고 너무나 비통해져서 할 말을 잊었습니다. 그리고 얼마 후 입을 열었지요. “당신은 기사답지 않게 비열하고 극악한 일을 하셨군요. 그분이 내게 강요한 것이 아니라 내가 그분을 사랑한 것이니 이 일로 당신의 명예가 더럽혀졌다면, 그분이 아니라 내가 벌을 받았어야 해요. 하지만 하늘이여 도우소서. 굴리엘모 과르다스타뇨 씨처럼 그렇게도 훌륭하고 그렇게도 고매하신 기사의 심장 요리를 먹었으니, 내 입으로 다시는 다른 음식이 지나가지 않게 하소서.” _ 조반니 보카..
한 인문 편집자의 질문 『연구자의 탄생』(돌베개, 2022)을 읽는 중. 이 책에는 익숙한 이름들이 많다. 책이든 글이든, 대개 한 번쯤 읽어본 이름들이다. 이들에게 던져진 질문들은 소중하다. 편집자의 표현을 따라 압축하면, ‘나는 왜 이런 연구를 하고 글을 쓰는가?’ 학문 붕괴의 위기에 맞서서 편집자가 할 수 있는 일은 장(場)을 열어서 물음을 던지고, 답을 들어 독자에게 보고하는 일이다. 이 일을 멋지게 수행한 편집자에게 깊은 경의를 표한다. 아울러 어려운 기획에 참여해 학문적 지향을 보여준 연구자들에게도.... 책의 내용은 무척 흥미진진하다. 국문학, 영문학, 사회학, 여성학, 인류학, 정보학 등 여러 분야 청년 학자들이 현재의 세상과 학문에 대한 나름의 치열한 고민을 토로한다. 어떤 전선이 짜여가는 모습과 함께 흥미진진..
인쇄대란 “코로나 때 인쇄시장 숙련공 30% 정도는 빠져나갔어요. 특히 젊은 사람들이 택배로 많이 옮겼죠. 주문이 들어와도 사람이 없어서 책을 못 찍어요.” 한 인쇄업 관계자의 토로다. 만성적인 저임금 구조에서 초과노동수당으로 버티던 숙련공들이 주 52시간제와 코로나19가 시작된 뒤론 업계를 쉬이 떠난다고 한다. 불안정하지만 진입 장벽 낮고 수입도 나쁘지 않은 택배 배달이 더 낫다는 것이다. 코로나19로 일자리를 잃은 사람들에게도 택배는 가장 만만한 선택지다. ==== 오늘자 한겨레 기사 일부다. 최근 우리 업계 현안이 한 문단 들어갔다. 플랫폼 택배 노동보다 정규직 인쇄 노동의 수입이 낮은 게 이슈다. 조만간 다가올 인구 충격은 이런 일자리를 송두리째 사라지게 만들 것이다. 저임금 저부가가치로 버티는 출판은 서..
일의 보람은 어디에서 생기는가 우리는 보통 반복되는 일을 권태롭게 느낄 것이다. 하지만 세련된 손기술을 익히는 사람들은 전혀 그렇게 느끼지 않는다. 어떤 일을 계속 되풀이하더라도 그 작업이 예측을 동반하는 방식으로 흘러갈 때는 일하는 사람을 고무한다. 똑같이 반복적인 작업이라도 반복의 내용은 새로워지고, 변형이 일어나며, 향상될 수 있다. 하지만 작업자가 느끼는 정서적 보람은 반복적인 일을 다시 하는 바로 그 경험이다. 이러한 경험은 전혀 이상한 게 아니고 우리 모두가 알고 있는 것, 바로 리듬인 것이다. 생리적으로 리듬을 타며 수축하는 인간의 심장처럼, 숙달된 장인은 그의 손과 눈을 쓸 때 리듬을 탄다. _ 리처드 세넷, 『장인』, 김홍식 옮김(21세기북스, 2021) 중에서 ===== 이렇답니다. 나날이 새로운 일을 하는 사람은 ..
문학 번역 발자크, 스탕달, 플로베르, 졸라로 이어지는 사실주의 계열의 소설을 번역할 때 가장 먼저 겪는 어려움은 물리적인 어려움이다. 다시 말해 분량이 방대하기에 상당한 시간적 투자와 함께 특별한 집중력을 요한다. 그런데 방대한 분량의 번역에서 주의력보다 더 중요한 것은 우리말 실력임이 틀림없다. 번역자에게 풍요로운 어휘 지식, 다채로운 문장 구성력이 없다면, 요컨대 300쪽 이상 길게 쓸 문장력이 없다면 좋은 번역서가 탄생하기 힘들 것이다. 프랑스 번역학자 앙투안 베르만의 표현을 빌리자면, ‘낯선 언어의 시련’ 이상으로 ‘낯익은 언어의 시련’을 이겨내지 않으면 안 된다. _ 유기환, 「문학번역이란 무엇인가?」, 《악스트》 40호(2022년 01/02호) 중에서 ====== 낯익은 언어의 시련..... 깊은 함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