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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론과 서평/시와 에세이 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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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 (임경섭) 종 우는 종을 생각하고 있었다 울지 않는 종은 종이 아닐 거라 생각하고 있었다 종종 우는 종은 종종 종이 되는 것이라 생각하고 있었다 종종 울리는 종은 종종 학교 종이 되었다가 교회 종이 되기도 하였다가 어떤 낮 텅 빈 아파트 단지 안에서 드문드문 울리는 고물상 주인의 목청과 섞이었다가도 어느 밤 낮게 깔리어 퍼지는 찹쌀떡 수레의 녹슨 바큇살에 감겨 엉기었다가도 종국에는 종종거리며 제집으로 돌아와 몸에 남아 있는 여린 울음 그칠 때까지 고요히 숨 참고 있는 그런 종을 생각하고 있었다 그렇게 울고 있는 종을 생각하고 있었다 자신의 몸을 때린 타인의 힘으로 종은 살아가고 있는 거라 생각하고 있었다 아무도 나를 건드리지 않은 날들이 종종 지나가고 있었다 =====아름다운 마음이 담긴 시다. 우리가 의존적 존재..
팔레스타인 가자 지구의 비극을 애도하다 30일의 금요일에 우리는 복수형을 숙고한다                                                      레나 칼라프 투파하                                                      조희정 옮김  국경에, 한 무리의 기자들, 희생되는 타이어들이 우리 뒤에서 불타고, 피크닉 텐트 아래에선, 가족들의 장례식, 우리가 모여서, 우리가 그 아슬아슬한 위기를 향해 우리의 목소리를 나를 수 있다면, 우리는 가자 지구에서 다른 무엇이 될 수 있을까? 우리는 질주하는 기도와 맞닥뜨린다, 수의 같은 습한 공기에 구멍을 내며 외쳐대는 낭송 소리들. 우리는 망상 같은 안부의 말들과 맞닥뜨린다, 포옹들 사이사이 초현실적인 '평화가 우리 위에 임하길', 발사..
조지에게(윤지양) 조지에게                                           윤지양 나 사실 신을 사랑해 그가 만든 여자와 남자와 개와 눈물을 사랑해 아니더라도 사랑해눈곱조차 사랑해실핏줄을 사랑해 눈 없는 것도보이지 않는 것도너는 내가 원하는 걸 줄 수 없다고 했고 당연히 그럴 수밖에 없는데일찍 깨닫지 못했어너를 뺀 모든 걸 사랑한다는 걸 알아절뚝거리며 가는 이도 사랑해 어느 날 손톱마냥 부러진 이도 오르는 계단도 높은 빌딩도 치솟다 무너질 문명도 증오하고 사랑해 거울에 얼핏 비친 빛나는 구석을 증오했어 커튼과 함께 말린 따듯함과 창문의 투명함이 식을 때까지 바라봤어 곧 아침이 올 거야 두드림 뒤에 따라올 가여운 존재를 실은 너무 사랑하고 있어 =====「조지에게」는 김수영문학상 수상 시집인『기대..
롤프 디터 브링크만 어느 순간에는 단지 시간을 느리게, 천천히, 흘러가도록 늘이는 것만으로 시(詩)가 된다. 한 처녀 검정 스타킹을 신은 그녀가 양말 올 하나 풀리지 않고 다가오고 있는 것은 아름답다. 그녀의 그림자 거리 위에 그녀의 그림자 담가에. 그녀가 치마 밑에까지 올 하나 풀리지 않은 검정 스타킹을 신고 가는 것은 아름답다. _ 롤프 디터 브링크만, 「단순한 그림」(이유선 옮김) 전문 한 처녀의 아름다움에 홀린 눈처럼, 만약 일상에서 시간이 천천히 흐르는 것을 느꼈다면, 그 순간 바로 시의 꽃이 거기에서 피어나고 있는 것이다. 그는 올 것이다, 손에 칼을 들지도 않고, 끔찍한 소리를 내지도 않고. 그는 올 것이다 우연히 지나다 시간을 묻는 누군가처럼, 그는 다가와 모자 벗고 인사를 할 것이다. 천구백육십삼년 이월 십..
춤추는 눈물 서시 라이너 마리아 릴케 끝없는 그리움에 하늘로 한껏 솟아오르지만 유한한 행위는 때가 되면 바르르 몸을 떨며 머리를 숙이는 힘 없는 분수와 같다. 그러나, 그렇지 않았으면 우리가 몰랐을 것들, 우리의 즐거운 힘들이 이 춤추는 눈물 속에 모습을 드러내는 것이다. ===== 이 시는 라이너 마리아 릴케의 『형상시집』(김재혁 옮김, 책세상, 2000)에 실려 있다. 인간의 삶이란 분수와 같다. 무한을 향해 힘차게 솟구치려 하나, 유한성 앞에서 힘없이 머리를 숙인다. 그러나 높이 뛰지 않는 자는, 춤추면서 울지 않는 자는 우리 안에 즐거운 힘들이 있음을 절대 알지 못한다. 울면서 치솟는 것, 인생의 비의는 거기에 있다.
인생이란 비오는 한밤중에 다리를 건너는 것 건너는 사람 여태천 정말로 뭔가를 보지 못할 것처럼 눈앞이 캄캄하다. 무엇을 보고 있는 것이 아닐지도 모른다. 그냥 눈만 뜨고 있는 것일 뿐 사람들은 어서 여기서 벗어나려고 했지만 칠흑의 이 밤이 끝나려면 아직 멀었다. 누군가 또 다리를 건너나 보다. 이런 밤이면 인기척도 무섭다. 폭우로 불어난 물 때문인지 재난방송이 간격을 두고 울린다. 선한 의도가 때론 누군가의 목줄을 죄고 지금의 기쁨이 십 년 뒤의 후회가 될 수도 있는 법. 떠나려는 이들의 목소리가 계속 들린다. 흙탕물은 단비가 되어 어딘가에 내리기도 하겠지만 이번 삶은 다시 되풀이되지 않을 것이다. 텅 비어 버린 사람처럼 우두커니 서서 다시 내리기 시작하는 비를 맞는다. 다리를 건너는 저 사람도 필경 우산이 없을 것이다. 젖을 대로 젖어서 건너는..
고독에 대하여 고독 라이너 마리아 릴케 고독은 비와 같다. 고독은 바다에서 저녁을 향해 오른다. 고독은 아득한 외딴 평원에서 언제나 고독을 품어 주는 하늘로 향한다. 그러다 비로소 하늘에서 도시 위로 떨어져 내린다. 동틀녘에 고독은 비가 되어 내린다. 모든 골목이 아침을 향할 때, 아무것도 찾지 못한 몸뚱어리들이 실망과 슬픔에 서로를 놓아줄 때, 서로 미워하는 사람들이 한 침대에서 자야 할 때, 고독은 강물이 되어 흐른다…… ==== 이 시는 『소유하지 않는 사랑』(김재혁 옮김, 고려대학교출판부, 2003)에 실려 있다. 고독은 초기부터 릴케 시의 핵심 개념이었다. 1902년 스물일곱 살의 릴케는 낯선 도시 파리에서 이 시를 썼다. 릴케에게 파리는 눈부시게 황홀한 예술의 낮과 소외감과 외로움에 몸부림치는 고독의 밤이 ..
폭력으로 가득한 세상에서 건져올린 기쁨의 언어 배수연의 첫 시집 『조이와의 키스』(민음사, 2018)는 폭력으로 가득한 슬픔의 세상에서 ‘기쁨’의 언어를 발굴하고 싶어 하는 애처로운 마음을 담았습니다.세상의 표상은 더럽고 위협적입니다. “헝클어지는 머리칼/ 머리를 쓰다듬는 커다란 손∥ 엄살쟁이야/ 주사 맞기 싫으면/ 선생님 뺨에 입을 맞춰 봐” 시 「병원놀이」의 한 구절입니다. 이 땅의 여자들이 흔하게 겪는 일상을 생생하게 포착합니다.하지만 시인은 세상의 폭력에 지지 않습니다. 폭행하는 세계 속에서 시인은 곳곳에서 자아의 기쁨을 흩뿌리고 또 수확합니다.“너의 아름다운 몸이 침대 위에서도 웅크려야 하는지/ 나는 와락 눈물이 안기는 걸 뿌리친 채로/ 세상에서 가장 가느다란 눈썹을 꺼내 네 발에 시를 썼어/ 아니 그건 코란이나 성경이었을지도 몰라”이 시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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