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평론과 서평/시와 에세이 읽기

(20)
실업과 빈곤, 그리고 탁구 책 상자를 풀어서 서가에 꽂으면서 책을 넣었다 뺐다 하는 시간이 한없다. 그 사이사이 땀을 식히면서 안현미 시집 『미래의 하양』(걷는사람, 2024)을 읽었다. 우선 눈에 들어오는 시는 「초생활」이다. 이 시는 어느 날 직장을 때려친 후, 실업 급여를 받으면서 살다가, 석 달도 안 되어 생계 근심에 고통받는 시인의 마음을 생생히 그려낸다. 시의 근심은 몸의 근심에 비해서 얼마나 하찮은가. 월급쟁이 경력 30년 생계는 자신 있다고 산 입에 거미줄을 치더라도 그 거미줄은 예술일 거라고 진심으로 사기쳤다 개뿔 실업급여 수급자 생활 3개월 예술은? 예술은 어디 갔지? 거미줄만 예술이다 슬픔까지 사기다 3개월 동안 30년은 늙어 버린 노파가 중얼거린다 (「초생활」중에서) 직장 다니던 시절엔 차라리 “낮에는 돈..
옥탑 (이은우) 옥탑 이은우 제 몫을 끝낸 상자들 벽에 기대 있다 안에 든 게 뭐였는지 잊은 지 오래 밖으로 난 창 하나 없다 여기는 빛이 들면 좋겠고 저긴 새들이 날아와 앉았으면 아기 고양이를 위해 민트색 집을 지어주던 아이의 표정으로 뜬구름을 손바닥 위에 올려 보는 거지 비 새는 지붕 아래 실로폰을 두고 상자마다 발을 달아주면 어떨까? 걸음마다 노래가 되는 하울의 움직이는 성처럼 말이야 기울어진 골목을 오르다 이리저리 부딪는 어깨들 서로 사랑하는 상자들은 모서리가 닮아 음표처럼 둥글어질까 까마득한 절벽 아래를 내려다보며 꽁지깃 빠진 새처럼 오슬오슬 떨까 발끝으로 공중을 휘휘 젓는다 딸깍, 손잡이를 돌리면 팝업된 세상 속으..
영원한 햇빛 외(최현우) 영원한 햇빛 ​ 그런 일이다책장과 벽 사이에 끼어 있던쓰다 만 공책을 발견하는 일이곳에 살다가 저곳으로 옮겨본 적 있다는 것 보이지 않는 곳 볼 수 없는 곳 그늘의 인대가 끊어진다 먼지를 뒤집어쓴 채 파양된 기록이 누군가 탈피하며 벗어 놓은 구겨진 허물이라는 것 열쇠를 가진 줄 알고 문의 저편만 찾아다니느라 구멍을 뚫고 다녔지 그러다 그 구멍 너를 모조리 삼켰고 모든 짐을 다 싸고도 들어갈 곳 없어 어제까지 식탁 위에 놓여 있던 공책이 사라졌다 사각형 햇빛 한 칸만 그 자리에 있다 중단할 수 없는 이 빛 자꾸만 대신하여 맨 위에 포개지는 끔찍해서 아름다웠던 햇빛 ==== 어쿠스틱 한사코 밀폐된 줄 알았으나 사람에게 하고 싶은 말 남지 않았으나 그렇게 기대앉을 혼자만의 방이라는 건 기쁨의..
한편 소영의 합리적 사고 약속하고 나서야 약속이 생겨나는 이유를 떠올리며 소영은 아직 옷을 고르지 못했다. 자기소개는 계속 미뤄지고 있다. 이름을 잘못 선택한 것 같았다. 소영이라는 이름은 흔해서 인기가 없을 줄 알았는데 동시에 세 사람이 소영이 되어버렸다. 그들 중 영미라 불렸던 한 사람의 눈가에는 저번 生과 같은 자리에 점이 있다. 옷장의 옷들을 보며 소영은 자신의 지나간 역할을 생각했다. 소영은 소영에게 적합한 인물이 되기 위해 노력하는 것이 이번 모임을 대하는 최선의 자세라 여겼다. 시간이 얼마나 남았는지 모르지만 이 둥근 천장의 방에서는 다들 결말보단 과정의 전문가들이니까. 수년째 소영이었다는 어떤 사람은 양복을 입고 등장하더니 즉석에서 성별을 바꾸고 소영을 그만두기도 했지만. 소영은 고민했다. 무엇을 입을 것인가...
종 (임경섭) 종 우는 종을 생각하고 있었다 울지 않는 종은 종이 아닐 거라 생각하고 있었다 종종 우는 종은 종종 종이 되는 것이라 생각하고 있었다 종종 울리는 종은 종종 학교 종이 되었다가 교회 종이 되기도 하였다가 어떤 낮 텅 빈 아파트 단지 안에서 드문드문 울리는 고물상 주인의 목청과 섞이었다가도 어느 밤 낮게 깔리어 퍼지는 찹쌀떡 수레의 녹슨 바큇살에 감겨 엉기었다가도 종국에는 종종거리며 제집으로 돌아와 몸에 남아 있는 여린 울음 그칠 때까지 고요히 숨 참고 있는 그런 종을 생각하고 있었다 그렇게 울고 있는 종을 생각하고 있었다 자신의 몸을 때린 타인의 힘으로 종은 살아가고 있는 거라 생각하고 있었다 아무도 나를 건드리지 않은 날들이 종종 지나가고 있었다 =====아름다운 마음이 담긴 시다. 우리가 의존적 존재..
팔레스타인 가자 지구의 비극을 애도하다 30일의 금요일에 우리는 복수형을 숙고한다                                                      레나 칼라프 투파하                                                      조희정 옮김  국경에, 한 무리의 기자들, 희생되는 타이어들이 우리 뒤에서 불타고, 피크닉 텐트 아래에선, 가족들의 장례식, 우리가 모여서, 우리가 그 아슬아슬한 위기를 향해 우리의 목소리를 나를 수 있다면, 우리는 가자 지구에서 다른 무엇이 될 수 있을까? 우리는 질주하는 기도와 맞닥뜨린다, 수의 같은 습한 공기에 구멍을 내며 외쳐대는 낭송 소리들. 우리는 망상 같은 안부의 말들과 맞닥뜨린다, 포옹들 사이사이 초현실적인 '평화가 우리 위에 임하길', 발사..
조지에게(윤지양) 조지에게                                           윤지양 나 사실 신을 사랑해 그가 만든 여자와 남자와 개와 눈물을 사랑해 아니더라도 사랑해눈곱조차 사랑해실핏줄을 사랑해 눈 없는 것도보이지 않는 것도너는 내가 원하는 걸 줄 수 없다고 했고 당연히 그럴 수밖에 없는데일찍 깨닫지 못했어너를 뺀 모든 걸 사랑한다는 걸 알아절뚝거리며 가는 이도 사랑해 어느 날 손톱마냥 부러진 이도 오르는 계단도 높은 빌딩도 치솟다 무너질 문명도 증오하고 사랑해 거울에 얼핏 비친 빛나는 구석을 증오했어 커튼과 함께 말린 따듯함과 창문의 투명함이 식을 때까지 바라봤어 곧 아침이 올 거야 두드림 뒤에 따라올 가여운 존재를 실은 너무 사랑하고 있어 =====「조지에게」는 김수영문학상 수상 시집인『기대..
롤프 디터 브링크만 어느 순간에는 단지 시간을 느리게, 천천히, 흘러가도록 늘이는 것만으로 시(詩)가 된다. 한 처녀 검정 스타킹을 신은 그녀가 양말 올 하나 풀리지 않고 다가오고 있는 것은 아름답다. 그녀의 그림자 거리 위에 그녀의 그림자 담가에. 그녀가 치마 밑에까지 올 하나 풀리지 않은 검정 스타킹을 신고 가는 것은 아름답다. _ 롤프 디터 브링크만, 「단순한 그림」(이유선 옮김) 전문 한 처녀의 아름다움에 홀린 눈처럼, 만약 일상에서 시간이 천천히 흐르는 것을 느꼈다면, 그 순간 바로 시의 꽃이 거기에서 피어나고 있는 것이다. 그는 올 것이다, 손에 칼을 들지도 않고, 끔찍한 소리를 내지도 않고. 그는 올 것이다 우연히 지나다 시간을 묻는 누군가처럼, 그는 다가와 모자 벗고 인사를 할 것이다. 천구백육십삼년 이월 십..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