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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적 불평등 세인트폴은 변두리의 작은 학교다. 전체 학생 수 500명. 미국 뉴햄프셔 주 외곽의 후미진 곳에 있다. 그러나 이 학교의 한 해 학비는 5000만원에 가깝다. 부모가 내야 하는 수억 원의 기부금은 별도다. 서민들은 입학을 상상조차 못할 이 학교 학생들은 상당수 아이비리그에 입학한다. 미국 최고의 엘리트 교육기관인 셈이다.졸업생이었던 세이머스 라만 칸 컬럼비아대 교수는 ‘불평등 연구자’로서 세인트폴의 교사로 취업한 후, 달라진 학생들 모습에 충격을 받는다. 물려받은 특권을 과시하면서 별세계 삶을 살던 자기 때의 학생들 모습이 그사이 사라진 것이다.칸이 쓴 『특권』(후마니타스)에 따르면, 세인트폴 학생들은 ‘특정한 역사와 취향을 가진 계급’으로 더 이상 자신들을 인식하지 않는다. 부모한테서 물려받은 것을 공..
테니스의 미학이 탄생하다 스포츠가 예술의 일종임은 누구나 안다. 아름다우니까. 위대한 선수들은 모두 인체의 물리학을 위반한다. “인간 안에서 신의 모습을 드러내는 초월”을 실행한다. ‘아!’ 하는 외마디로 표현할 수밖에 없는 동작의 기적적 응축. 언어의 길을 완벽하게 무너뜨리는 순간적인 창조가 거기에 있다. 오랜 연습을 통해 인간의 모든 움직임을 극한에 이를 때까지 단련한 후에도, 아주 잠깐 동안만 구현할 수 있는 힘의 엄청난 약동. 그런데 순간은 예술이 아니다. 찰나의 덧없음을 영원의 형태로 붙잡아 둘 수 있는 미학적 힘이 있어야 비로소 예술이 된다. 위대한 선수들의 자서전은 흔히 자신의 아름다운 움직임을 예술로 만드는 데 실패한다. 잘못은 없다. “한 번에 공 하나씩” 같은 언어적 클리셰에 대한 완전한 믿음과 게임에서 이를 ..
겨울을 맞는 마음 며칠 전, 한밤중에 첫눈이 내렸다. 후배랑 김치전을 곁들여 한잔하는 중에, 어둠 속에서 갑자기 눈송이가 뭉쳤다 사라지는 기분이 들었다. 바깥으로 슬쩍 나가서 손바닥을 공중으로 내밀자 피부에 닿은 눈이 스르르 방울졌다. 자연은 쉬지 않는다. 단 한 순간도 머무르지 않고 절기를 돌린다. 낳고 또 낳는 변화(易)야말로 세상의 이치다. 엊그제가 가을인 듯싶더니, 어느새 “이슬은 서리로, 비는 눈으로” 바뀌었다. 겨울이 온 것이다. 때마침 어제(22일)가 소설(小雪)이었다. 눈 내릴 무렵에 적절히 눈이 온 셈이다. 위스춘의 『시간의 서』(강영희 옮김, 양철북, 2019)에 따르면, 소설과 더불어 “만물의 숨결은 흩어지고, 나고 자람은 거의 멎어 겨울이 온다.” 사나흘 전부터 과연 사람들 옷차림이 두꺼워지더니, 올..
레이철 화이트리드의 「홀로코스트 기념비」(1995) - 비엔나 유대인광장 비엔나 유대인 광장에 있는 레이철 화이트리드의 「홀로코스트 기념비」(1995).이 작품은 책등 대신 책배가 드러난 형태로 책들이 꽂혀 있는 서재를 모형으로 만들어졌다. 제목이 없을지라도 여전히 책은 책이다.자세히 살피면 똑같아 보이는 책배에도 어떤 고유한 표지들이 새겨져 있다.기억한다는 것은 애써 노력해서 한걸음 다가서면서 그 미세한 흔적들을 적극적으로 읽어 냄으로써 성립한다.그런데 이 책들에는 정체를 드러내는 어떠한 이름도 적혀 있지 않기에 우리의 흔적 읽기는 기억의 복원이 아니라 어쩔 수 없이 창조가 된다.6만 5000명의 홀로코스트 희생자 각각을 상징하는 이 책들에 자신의 기억을 바치면서 일종의 저자로서 텍스트를 만들어 참여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좋은 예술이란 사람들의 그러한 행위성을 만드는 실천이..
일을 사랑하는 법 “대체 사람들은 어떻게 자신의 직업을 사랑할 수 있는 걸까?”『열정의 배신』(김준수 옮김, 부키, 2019)에서 칼 뉴포트 조지타운대 교수가 묻는다. 흥미로운 질문이다. 대부분 죽지 못해 일한다. 아침마다 사표를 항상 품에 넣은 채 출근하는데, 먹고사는 일을 열정적으로 좋아할 수 있다니 신기하기까지 하다. 질문의 답은 단 한 줄로 요약된다. “자기 일에 충분히 능숙해질 만큼 오래 일하면 된다.”때때로 대학에 다니는 아이들하고 직업 이야기를 할 때가 있다. 누구처럼 다 자란 아이들 스펙을 챙길 만큼 정신없지는 않지만, 부모 마음에 걱정이 되어 슬쩍 물으면 아이들은 펄펄 화를 날린다. 제 앞가림은 하겠다는 기개에 일단 마음은 놓인다. 어느 날 심각한 얼굴로 “아빠, 나 뭐 하면 좋을까” 하고 물어온다면, 재..
가벼움의 시대 현대 문명은 가벼움에 홀려 있다. 가벼움은 이 시대의 이상적 질서다. 『가벼움의 시대』(문예출판사)에서 프랑스 사회학자 질 리포베츠키가 말하는 바에 따르면, 우리는 가벼움을 “제도적으로 합법화하고 사회적으로 일반화하는 시대”를 살아간다.‘슬림’ ‘심플’ ‘홀로’ ‘쿨’ ‘큐트’ ‘초소형’ ‘초경량’ ‘초간편’ 등 우리를 둘러싼 세계 전체가 가벼움을 찬양한다. 가볍고 얇고 작고 짧은 물건들은 우수함의 증거다. 다이어트와 피트니스는 신체의 궁극적 관리 기술이 된다. 가벼운 몸, 즉 날씬하고 빼빼한 몸매의 생산은 이 시대의 지상명령이다. 혈연이라는 운명의 형식으로 묶인 가족마저 점차 가벼워진다. 대가족은 핵가족으로, 핵가족은 1인 가구로 세포분열 된다. 통계청 발표에 따르면, 2016년 말 1인 가구가 540..
이미… ‘미국의 세기’는 저물고 있다 세계의 심장이 부활하고 있다. 유라시아 대륙은 “세계 인구의 75%, 에너지 매장량의 75%, 세계 총생산의 60%를 보유”하고 있다. 인류 역사의 대부분 동안 이곳이 “지정학적 중심축”이었으며, 서반구와 오세아니아 등은 “지정학적 주변부”에 불과했다. 지난 수백 년 동안, 서구 여러 제국은 함선 등 과학기술을 활용해 기동력을 확보함으로써 이 심장을 해양에서 포위하는 식으로 패권을 얻었다. 네덜란드, 스페인, 영국, 미국 등이 모두 같은 지정학적 전략을 사용했다. 그러나 경제 대국으로 일어선 중국의 거대한 투자를 바탕으로 철도와 고속도로, 석유와 천연가스 수송관 등이 유라시아 내륙에 들어서면서 유라시아 전체가 하나로 통합돼 ‘세계섬’을 이룩하는 ‘대전환’이 시도되는 중이다. 제국이란 “강대국이 직접 통치..
88년생 김안나 - 일의 기쁨과 슬픔 88년생 김안나. 요즈음 화제작이 된 베스트셀러 『일의 기쁨과 슬픔』(창비, 2019)의 주인공이다. 신예 작가 장류진이 쓴 이 소설은 판교 테크노밸리에 있는 스타트업 ‘우동마켓’이 배경이다. 중고거래 전문 앱을 운영하는 이 작품에서는 지난 20년 동안 기업이 시도해 왔던 온갖 업무 혁신의 결과가 적나라하게 폭로되면서 생생한 현실감을 준다. 더없이 불행히도, “회사에서 울어본 적 있어요?”라는 ‘일의 슬픔’의 형태로.“매일, 약속된 시간에, 선 채로, 짧게” 애자일로 업무 진행 상황을 점검하는 ‘스크럼’은 대표의 마지막 일장연설로 항상 길어진 채 끝난다. “수평한 업무 환경을 만들자는 취지”로 시행한 ‘영어 이름 쓰기’는 “데이비드께서 요청하신” 등 은근한 존칭을 즐기는 윗사람들 탓에 어이없게 무력화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