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독서, 고독한 싸움 우리가 그 책에 다가가는 도중에 아무리 꼬불꼬불 구부러지고 빈둥빈둥하고 우물쭈물하고 어슬렁어슬렁하더라도 최후에는 고독한 싸움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 _버지니아 울프
[후한서 이야기] 조조의 도굴 《동아일보》에 강인욱 선생의 연재 기고 「도굴 당한 ‘도굴 왕’ 조조의 무덤… 헛된 욕망의 쳇바퀴」에 조조의 도굴 이야기가 실렸다. 유명한 일화다. 도굴이 기승을 부리게 된 시점은 국가가 등장하고 왕이나 귀족들이 경쟁적으로 자신의 무덤에 수많은 보물을 넣어 저세상에서도 영화를 이어가고자 하면서부터다. 보물을 묻은 화려한 무덤이 많아지면서 무덤 속 보물을 탐내는 사람들도 늘어났다. 삼국지의 간웅(奸雄) 조조는 중국 역사의 대표적인 도굴의 왕으로 꼽힌다. 중국 사서 ‘후한서’에 따르면 원소와 조조가 전쟁할 때 조조가 무덤을 파헤치는 부대인 발구중랑장(發丘中郞將)과 보물을 긁어모으는 모금교위(摸金校尉)라는 부대를 만들었다. 이들이 기원전 2세기 살았던 한나라 왕족인 양효왕(梁孝王)을 비롯해 여러 무덤을 도굴해..
페미사이드, 여자라서 살해되는 여자들 최근 스물다섯 살 황예진 씨가 남자친구의 폭력 행위로 사망했다. 억울한 죽음이었다. 법원은 가해 남성에 대한 구속영장을 기각했고, 경찰은 살인죄 대신 상해치사죄를 적용하려 했다. 이건 현대 국가에서 데이트 폭력에 대한 흔한 사법적 처리 방식의 하나다. 유족들은 현장 폐쇄회로(CCTV) 화면을 공개하고, 청와대에 청원을 올려 가해자에 대한 강한 처벌과 함께 ‘데이트 폭력 가중처벌법’ 제정을 호소 중이다. 그런데 황예진 씨는 예외적인 피해자가 아니다. 한국여성의전화에 따르면, 작년에 우리나라에서 남편, 애인 등 친밀한 사이의 남성에게 살해당한 여성이 97명, 간신히 살아남은 여성이 131명이다. 언론에 보도된 사건에서 최소로 잡은 숫자다. 보도되지 않은 사건도 있을 테니, 한국에서 여성 살해 관련 사건은 거..
너희가 1980년대를 아느냐고? ‘네가 1980년대를 아냐’고 꾸짖었던 교수에게 돌려주고 싶은 말이 있다. 나는 1980년대 초반엔 존재하지 않았고, 중후반에도 그저 생존하는 생물일 뿐이었으나, 그러므로 나는 1980년대를 몸으로 겪어내지 않았으나 그 시절 일어났던 일들에 대해 누구 못지않게 싸우고 있다고. 내 일생의 쟁투는 전부 내가 직접 체험하지 않았던 일들에 닿아 있고, 그것에 부끄러움도 부채 의식도 느끼지 않는다고. 왜냐하면 당신이 살았고 감각했던 1980년대는 당신에게는 지나가 버린 한 시절일 뿐이지만 나에게는 여전히 미지의 영역이자 탐구해야 할 대상이므로. 지금 탐구하고자 하는 자에게는 당시의 당신에게보다 더 많은 자료가 주어져 있고, 조사와 검수를 통해 숨겨진 사실들이 밝혀진 바 있으며, 그러므로 나의 산문과 역사적 연대기..
어른의 언어로 말하기 수십 년 동안 사이비 정치가 사람들의 감수성을 고취함으로써 그들을 오히려 어린애로 만들어 버린 데 대해 ‘성인언어’는 어린애처럼 좋은 생각만을 고집하기보다는 자신으로부터 거리를 확보하여, 다른 사람이 정말로 생각하고 있는 것을 성인 자신이 생각하고 있는 것과 동일한 수준으로 고려하는 언어의 성숙이다. _ 로베르트 팔러, , 이은지 옮김(도서출판 b, 2021) ===== 이렇답니다. 언제부터인지 출판에도 '나'를 주어로 한 책들이 쏟아지는 중이다. '나'의 고통을 전시하고, '나'의 불편함을 표시하고, '나'의 능력을 몰라 준다는 칭얼대는 어린이 같은 호소들...이 대량으로 복제되고 있다. '나'에서 '우리'로 크게 비약하지 못한 문집의 언어들이 여기저기 범람한다. 자기 언어를 타자의 언어로 만들지 못하..
언론, 윤리, 권력 저널리스트가 규범으로 삼고 따르는 것은 공동체의 도덕이나 국익이 아니라 더욱 큰 ‘윤리’이며 자기 내면의 ‘정의’입니다.(이는 ‘사회 정의’와도 다릅니다.) 어떤 사람은 이를 ‘공공성’이라 부릅니다. (중략) 서로의 가치관이 대립하는 권력과 미디어의 관계야말로 공동체에는 건전한 형태이며, 개인에게도 자기 자신과 그가 속한 사회를 늘 상대화해서 생각하는 시선의 확보라는 측면에서 중요합니다. 그러므로 저널리스트는 권력자와 거리를 둬야 합니다. ―고레에다 히로카즈, 『작은 이야기를 계속하겠습니다』, 이지수 옮김(바다출판사, 2021) 중에서 ===== 이렇답니다. 이 책은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의 짤막한 글들과 대담을 모은 에세이집이다. 영화를 통해 억압된 이들의 목소리를 들려 주려고 늘 애썼던 고레에다 감독..
협력의 인류사 7만 년 제프리 삭스 미국 컬럼비아대학 교수는 『지리 기술 제도』(이종인 옮김, 21세기북스, 2021)에서 7만 년 전부터 현재에 이르는 인류사 전체를 ‘세계화’라는 관점에서 다루고 있다. 자연 지리, 인간 기술, 문화 제도의 상호작용이 인류 역사의 핵심 동력이고, 그 방향은 인간 사이의 연결을 증진하는 쪽이었다. 코로나19가 보여 주듯 연결의 부작용이 적지 않았으나, 더 넓은 지역에 사는 이들이 더 많이 협력할수록 빈곤, 질병 등을 해결해 더 큰 번영을 이루었기 때문이다. 7만 년 전, 기후 변화를 이기지 못한 몇몇 호모사피엔스 무리가 아프리카 대륙을 떠나 아랍 지역에 진출한 순간부터 세계화는 시작되었다. 낯선 포식자, 병원균, 경쟁자와 마주치면서 인류는 기술의 힘으로 자연을 정복하고 문화의 힘으로 협력을 창..
경기는 왜 예술 작품처럼 아름다운가? 멋진 경기 장면은 뛰어난 예술작품처럼 아름답다. 선수들은 오직 승리에 몰두하지만, 지켜보는 마음에는 강렬한 미적 경험이 일어난다. 이보다 더 극적인 아름다움이 있을까. 미국의 철학자 한스 굼브레이트 스탠퍼드대학 교수는 『매혹과 열광』(돌베개, 2008)에서 스포츠의 아름다움을 미학적으로 파고든다. 그에 따르면, 스포츠는 아레테(arete), 즉 탁월성을 획득하기 위한 노력이다. 경쟁을 통해 자신을 증명하려는 선수들을 지켜보는 것은 “현대의 가장 강력하고 대중적인 미적 체험”이다. 무엇보다 경기는 “순수하고 사심 없는 만족”을 가져다준다. 승부가 벌어지는 순간에는 선수도, 관중도 모두 일상의 이해관계를 망각한 채 전적으로 경기 자체에 매혹된다. 이는 칸트가 말하는 미의 본질, 즉 무관심성 그 자체다. 이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