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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차 문맹 - 컴맹, 앱맹, 학맹, 문해맹 “상승과 하강으로 명징하게 직조해 낸 신랄하면서 처연한 계급 우화.” 영화 평론가 이동진이 「기생충」을 보고 남긴 한 줄 평이다. 불과 아홉 단어로 이루어진 이 문장은 현재 한국 사회 일반의 문해력을 그야말로 ‘명징’하게 보여주었다. “분명 더 쉬운 단어로 대체할 수 있었는데 왜 굳이 저렇게 썼냐” “대중 상대로 글로 먹고사는 평론가는 저런 말 쓰면 안 되죠.” 문해력(literacy)은 글을 읽고 이해하는 능력을 말한다. 이 능력의 높이는 한 사회의 정보 처리 수준을 능력을 ‘신랄’하게 보여준다. 사소한 차이를 측정하려면 정밀한 기계가 필요하듯, 감동도 섬세한 표현을 써야 정확히 담을 수 있다. 비슷해 보여도 다르게 느껴지는 것을 구분해서 표현할 줄 알아야 마음을 제대로 다루는 것이다. 누구나 자기 마..
옥스퍼드 학생들은 어떻게 배우는가? 고등교육은 기존의 사유와 믿음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고 반론을 증명해 내는 일인데, 이것이야말로 새로운 지식이 창출되는 과정이다. 이를 통해 대학들은 필연적으로 과학이든 예술이든, 또는 정치든 문화든, 또는 영향력 있는 사회의 집단이든 하나의 신념 체계이든, 대상을 불문하고 현재의 기득권에 도전장을 내밀게 된다. (수전 세일) _리처드 도킨스 외, 『옥스퍼드 튜토리얼』, 노윤기 옮김(바다출판사, 2019)에서 ===== 옥스퍼드 튜토리얼은 교수나 강사 같은 전문가(튜터)와 학생이 일주일에 한두 번 직접 얼굴을 마주 보고 학습하는 일종의 개인지도 과정입니다. 옥스퍼드 대학 수립되기 이전인 11세기부터 실시되었다고 전하며, 옥스퍼드대학 학생들은 무조건 참여해야 한다니다. 학생이 자기가 정한 주제를 에세이로 써..
서울국제도서전을 즐기는 방법 ‘글이 만든 세계’가 펼쳐진다. 다음주 수요일인 6월 19일, 서울국제도서전이 강남 코엑스에서 열린다. 국내 312곳과 해외 41개국 117곳 참여사가 이미 독자를 만날 온갖 준비를 마쳤다. 모바일로 세상 모든 책을 만날 수 있는 세상이지만, 도서전을 찾는 독자들 발길은 해마다 느는 중이다. 인간은 몸으로 살아간다. 표지와 소개 등 곁다리 정보로는 나한테 맞는 책을 얻기 어렵다. 알바노동의 결과이기 일쑤인 인터넷 서평과 댓글은 믿지 못한다. 게다가 남이 읽는 것은 내가 읽은 게 아니다. 종이의 질감, 무게, 만듦새 등은 책을 손에 들어야 느낄 수 있고, 전체 서술이나 구조 등은 책을 훑어야 알 수 있다. 피지컬과 사이버가 적절한 균형을 이루지 못할 때, 인간의 육체는 허약해지고 정신은 공허해진다. 독자를..
E. H. 카의 역사란 무엇인가를 넘어서 역사를 생각하다 E. H. 카의 『역사란 무엇인가』에는 기억할 만한 함축적 문장이 있다. “역사 연구는 원인에 대한 연구다.” (중략) 인과관계의 분석은 카가 『역사란 무엇인가』를 쓰던 시기에 실제로 역사 연구의 중추였다. 그 이후 수십 년간 강조점을 다른 곳에 두는 새로운 경향이 출현했다. 즉, 위대한 사건의 기원에 대한 관심은 줄고 사건에 관여한 사람들이 스스로의 행동을 어떻게 믿고 있었는가에 대한 관심이 늘었다. (중략) [역사에서] 원인을 찾는 것은 역사가의 현재를 중심으로 과거를 조직하는 나르시시즘과 다름없다. _ 사라 마자 ======== 『역사란 무엇인가』가 나온 지, 벌써 50년에 가깝다. 마르크스주의적 결정론에 사로잡혀 있는 이 오래된 책에 기반을 두고 역사를 이야기하는 방식을 이제는 넘어설 필요가 있다..
나는 사랑한다, 남편과 남자친구 모두를 동시에 죽을 때까지 이성 한 사람만 사랑하고 결혼하고 아이 낳고… 이 시대 사랑의 통념을 의심, 철학자 자기 경험으로 풀어내 “내 남자친구의 아파트를 나와서 남편과 같이 사는 우리 집으로 걸어가는 아침이면, 이 시대와 장소에서 흔히 이해하는 로맨틱한 사랑의 방식과 나 자신의 로맨틱한 사랑 경험 사이에 존재하는 괴리에 대해 이따금 생각에 빠지곤 한다.” 『사랑학 개론』(여문책, 2019)의 첫 쪽에 나오는 문장이다. ‘어쩔 수 없이’ 불편한 마음과 함께 도발적 호기심이……. 저자 케리 젠킨스는 철학자. 러셀과 비트겐슈타인의 분석철학 전통이 엄연한 케임브리지 트리니티칼리지에서 공부했고, 현재 브리티시콜럼비아대학교 철학 교수다. ‘탐구된 고백’은 철학의 전통에 속한다. 고대에서 중세로, 중세에서 근대로 넘어가는 시기..
지하철 소리 풍경 휴대전화의 이어폰이 무선으로 바뀌면서 지하철 등에서 민망할 때가 많다. 입술 앞에 휴대전화나 마이크가 없어서일까. 사람들 목소리가 저절로 커지면서, 본의 아니게 옆 사람 사생활을 생방송으로 듣곤 한다. 일종의 환지통 같은 것일지 모른다. 통화하는 본인은 소곤거린다고 느끼는 것 같다. 하지만 물리적 실체를 느낄 수 없다 보니 저도 모르게 존재하지 않는 마이크를 향해 소리를 지르는 것이다. 창피한 줄 모르고 지하철 한 칸이 다 들리도록 말이다. 인간은 도구를 사용하고, 도구는 인간을 바꾼다. 나로서는 아직 무선 이어폰을 사용해 본 적은 없으나 비슷한 일을 겪을 때마다 다짐하곤 한다. 유선 이어폰이 모조리 사라지면 몰라도, 저걸 쓸 일은 없을 거라고. 선이 없을 때 편리한 점도 없지는 않겠지만, 공중장소에서 ..
수다 중독 수다란 무엇인가. 미국의 언론학자 피터 펜베스에 따르면, “어떤 가치 있는 것도, 중요한 것도, 흥미로운 것도 포함되지 않는 이야기”를 말한다. 말 자체는 한없이 계속될 수 있다. 한가한 주말 오후 별로 안 친한 지인과 일없이 만났을 때처럼, 친목 모임에서 자리에 없는 사람들 뒷담화로 시간을 죽일 때처럼, 페이스북이나 트위터나 카카오톡 단톡방에서 문장이 흘러갈 때처럼, 시간이 닿는 한 말은 영원히 이어질 수 있다. 하지만 체력이 다할 때까지 이야기를 나누어도, 수다는 아무것도 남지 않는다. 의미 있는 말은 사실상 한마디도 주고받지 않기 때문이다. 아무것도 말하지 않으려고 모든 것을 이야기하는 아이러니가 이로부터 생겨난다. 상대방이 자기 인생에서 그다지 중요하지 않음을 표시하려고 한시도 쉬지 않고 입을 떼..
[시골마을에서 논어를 읽다 19] 유어예(游於藝) ― 논다는 것은 무엇인가 7-6 공자가 말했다. “도에 뜻을 두고, 덕에 익숙하고, 인(仁)에 기대고, 예(藝)에 노닐리라.” 子曰, 志於道, 據於德, 依於仁, 游於藝. ‘논다’는 것은 무엇인가. 자연스럽고 자유스럽다는 뜻이다. 이 장은 우리로 하여금 자유에 대해 성찰하도록 만든다. 자유는 어떤 일을 하는 데 방해받지 않는 것이다. 외부의 조건에 구애받지 않고 마음대로 하는 것이다. 방해는 한 사람이 자신만의 고유한 삶을 살아가지 못하도록 하는 힘이다. 자연으로부터 올 수도 있고, 사회로부터 올 수도 있다. 배움이란 결국 자유로워지기 위한 기술이다. 리쩌허우는 말한다. “숙달하여 완전히 장악함으로써 자유와 즐거움을 얻는다.”이을호는 이 장이 “도(道)-덕(德)-인(仁)-예(禮)의 종합적 구조를 형성하였음”을 가리킨다고 본다. 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