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전체 글

(734)
문학 번역 발자크, 스탕달, 플로베르, 졸라로 이어지는 사실주의 계열의 소설을 번역할 때 가장 먼저 겪는 어려움은 물리적인 어려움이다. 다시 말해 분량이 방대하기에 상당한 시간적 투자와 함께 특별한 집중력을 요한다. 그런데 방대한 분량의 번역에서 주의력보다 더 중요한 것은 우리말 실력임이 틀림없다. 번역자에게 풍요로운 어휘 지식, 다채로운 문장 구성력이 없다면, 요컨대 300쪽 이상 길게 쓸 문장력이 없다면 좋은 번역서가 탄생하기 힘들 것이다. 프랑스 번역학자 앙투안 베르만의 표현을 빌리자면, ‘낯선 언어의 시련’ 이상으로 ‘낯익은 언어의 시련’을 이겨내지 않으면 안 된다. _ 유기환, 「문학번역이란 무엇인가?」, 《악스트》 40호(2022년 01/02호) 중에서 ====== 낯익은 언어의 시련..... 깊은 함축..
인생이라는 게임을 어떻게 치를까 세상의 게임은 대체로 둘로 나뉜다. 유한 게임과 무한 게임이다. 시작과 끝이 분명한 유한 게임의 목표는 승리이고, 시작도 끝도 없는 무한 게임의 목표는 게임의 지속 자체이다. 예를 들면, 입사 시험은 유한 게임이고, 인생 전체는 무한 게임이다. 시험 게임에서는 합격이 최선이지만, 인생 게임에서는 한 번 더 시도할 수 있으면 가장 좋다. 예수는 말했다. “사람이 온 세상을 얻는다고 해도 제 목숨을 잃는다면 무슨 이익이 있겠느냐?” 혹여 유한 게임에서 승리해도, 무한 게임을 지속할 수 없다면 아무 소용 없다는 뜻이다. 제임스 카스 뉴욕대 교수는 『유한 게임과 무한 게임』(노상미 옮김, 마인드빌딩, 2021)에서 유한 게임의 아이러니에 관해 이야기한다. 유한 게임은 플레이어, 즉 참가자가 승리하면 게임이 끝나..
차별은 인간을 어떻게 파괴하는가 올해 편집자들이 가장 사랑한 책 중 하나가 『마이너 필링스』(마티 펴냄)이다. 재미교포 2세인 캐시 박 홍이 쓴 이 책은 아시아계 미국인이 겪는 인종차별 경험과 그로 인해 뒤틀리는 자아에 관한 에세이다. 2020년 미국 출간 직후, 전미도서비평가협회상을 받았다. 자서전 형태로 쓰인 이 책에서 저자는 백인 우월주의 국가에서 태어나서 느껴온 더러운 기분을 예민한 감각과 섬세한 언어로 그려내서 독자들 마음을 사로잡는다. 저자는 그 기분을 마이너 필링(minor feeling)라고 부른다. 소수적 감정, 즉 사회적 차별 탓에 소수자가 느끼는 불쾌하고 불편한 감정이다. 소수자가 이 기분을 느낄 때 다수자는 이를 ‘지나친 예민함’이나 ‘과민반응’ 등으로 폄훼하면서 사소한 것으로 얼버무리곤 한다. 상처 입은 사람이 ..
단어 수집가 녹는점: 시를 쓰며 가장 자주 도달하는 상태. 내게 녹는다는 건 부드러움과 동의어이다. 그리고 이런 문장들. 물속에서 녹고 있는 물고기. 한낮의 태양 아래, 아이스크림보다 먼저 손이 녹아 버린다면? 눈사람에게 허락된 마지막 밤. 흰 사슴의 눈동자가 호수로 변하는 순간. _ 안희연, 『단어의 집』(한겨레출판, 2021) 중에서 ==== 언어의 새로운 가능성을 시험하는 것이 시인의 주요 임무이다. 이 때문에 대다수 시인이 단어 수집가로 살아간다. 시인은 시로 말해야 하므로, 민감하게 단어를 모으고 강박적으로 의미를 되새김하는 이 작업은 일종의 정거장이다. 안희연 시인이 모으고, 다시 뜻을 풀이한 이 사전(私典)은 일찍이 김소연 시인이 『마음 사전』이나 『시옷의 세계』에서 보여 준 단어에 대한 열정만큼 흥미롭..
시간에 대하여 시간은, 본질적으로 기억과 예측으로 만들어진 뇌를 가진 인간이 세상과 상호 작용을 하는 형식이며, 우리 정체성의 원천이다. 그리고 우리의 고통의 원천이기도 하다. 우리를 고통스럽게 하는 것은 과거에 혹은 미래에 있지 않다. 지금 여기에, 우리의 기억 속에, 우리의 예측 속에 있다. 우리는 영원불멸을 갈망하고 시간의 흐름에 고통스러워한다. 시간은 고통이다. 이것이 시간이다. 이런 특성이 우리를 매혹하며 안절부절못하게 만든다. (중략) 시간은 세상의 일시적인 구조이고 세상에서 일어나는 사건들의 일시적인 변동일 뿐이면서도, 우리를 어떤 존재로 생기게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즉, 우리는 시간으로 만들어진 존재다. 그 때문에 우리가 존재하고, 우리 자신에게 우리라는 소중한 존재를 선물하고, 모든 고통의 근원인 영..
서평이란 서평이란 근본적으로 친절한 행위다. 책을 통해 알게 된 이 세상의 진실과 자기 삶에 대한 성찰을 공유하며, 더 나은 세상에서 더 좋은 삶을 누리자고 소곤소곤 말 건네는 일이다. 세상을 느끼는 감각과 사유를 바꾸지 않고는 비루하기 짝이 없는 이 삶과 잔인하기 그지없는 이 세상을 바꿀 수 없다. 그러기에 인류의 지혜가 온축된 책 이야기를 함께 나눔으로써 우리의 공통 감각(common sense)을 혁신하고 우리가 생각하는 틀을 달리하고자 하는 것이다. 좋은 서평은 또 하나의 작품으로 읽는 사람을 변화시킨다. 여섯 달 동안 수많은 서평을 읽으면서 새삼스레 이 사실을 깨달았다. 마음에 와 닿는 좋은 서평이 많았고, 읽으면서 내 안에서 끝없이 변화가 일어났다. 행복한 경험이었다. ===== 이렇답니다. 서평 프로..
시간은 사회적 구성물이다 - 1초는 세슘 원자의 진동수(초당 91억 9263만 1770회)에 따라 결정된다. 하루는 지구 자전 운동이 아니라 이 진동수의 규칙적 쌓임으로 정해진다. - 지구 자전 운동은 아주 미세하게 느려진다. 이에 따라 원자초를 세계시의 기준으로 삼은 후 하루가 점점 길어지는 문제가 생겨났다. 그래서 2년마다 1초씩 더하는 윤초가 만들어졌다. - 오늘날 우리가 사용하는 시간은 자연의 시간이 아니라 전문가들이 정해서 유포하는 인공 시간이다. - 전 세계 세슘 시계는 약 320개이다. 이 시계들은 나노초 단위에서 서로 다르게 작동한다. 국제 표준시는 그중 전 세계에 흩어져 있는 마스터시계 50개의 차이를 조정해서 생산한다. 이를 협정 세계시라고 한다. - 정확한 시간은 없다. 평균 시간만 있을 뿐이다. 그것은 국제..
완독가 끝까지 읽는 사람. 무조건 샅샅이 읽는 사람. 완독가는 글자를 읽는다. 단어나 문장이 아닌 글자를. 마침표와 쉼표를 포함해 종이에 배열된 기호를 빠짐없이 읽는다. 모든 기호에 한 번 이상 시선이 닿게 하는 것. 그것이 완독가의 목표다. 완독가는 독서의 즐거움을 구하지 않는다. 유익한 정보를 습득하려 하지도 않는다. 재미라든가 쓸모 같은 것은 완독가의 시야에 없다. 완독가는 완독이라는 행위를 위해 책을 손에 든다. (중략) 완독가는 등반가와 다르다. 차라리 보도블록의 금을 모조리 밟지 않으면 견딜 수 없는 마음. 그런 마음으로 책에 꽂힌 사람. 완독이 끝나도 성취감이나 희열은 따라오지 않는다. 책을 덮으면 모래벌판 한가운데에 홀로 서 있는 느낌이 든다. _ 신해욱, 『창밖을 본다』(문학과지성사, 20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