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잡문(雜文)/공감과 성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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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역사학자의 죽음 서양사학자 이영석 교수가 세상을 떠났다. 대중한테 이름 높은 ‘미디어 인문학자’도, 연구는 뒷전이고 이른바 ‘활동’에 전념하는 참여파도 아니었다. 전공은 영국 사회 경제사. 평생 남의 나라 역사 한 부분을 좁고 깊게 팠다. 관련 학자들 말고 이름이 알려질 까닭은 별로 없었다. 주변 소셜 미디어 쪽 반응은 달랐다. 다른 분야의 많은 지식인들도 크고 작은 인연을 고백하고, 학문적 일생에 존경을 표했다. “요즘 젊은이들이 책은 읽지 않지만, 페이스북에 실린 글은 읽는다는 얘기를 들었다”라면서, 대학을 정년퇴직한 후 페이스북에서 역사 관련 지식과 통찰을 공유한 까닭도 있을 테다. 자기 공부를 정리한 『삶으로서의 역사』, 코로나19 팬데믹 이후 일상을 성찰한 『잠시 멈춘 세계 앞에서』 등은 그 결과였다. 목소리는..
약자의 호소와 권력의 몰락 살려고 일하러 간 일터에서 사람이 죽는다. 광주 현대산업개발 아파트 외벽 붕괴, 양주 삼표산업 골재 채취장 토사 붕괴, 여수 여천NCC 폭발 등 사고가 끊이지 않는다. 안전의식 타령은 그만하자. 위험 감수를 압박하는 현장에서 하루 벌어 하루 사는 말단 노동자의 작업 거부는 어렵다. 아무도 직접 책임지지 않는 현장에 파견된 노동자라면 하소연 자체가 사치다. 그 처지를 모른 체하면 위선자, 못 느끼면 사이코패스다. 그런데도 법은 현장 앞에서 자꾸 멈추고, 정의는 법정에서 자주 반려된다. 태안화력발전소에서 일하다 죽은 비정규직 청년 노동자 김용균 씨 관련 며칠 전 판결도 역시나였다. 원청 대표는 위험을 몰랐다면서 무죄였고, 관련 임직원은 집행유예나 벌금형에 그쳤다. 억울한 죽음에 유가족 한은 쌓여간다. 하소연..
연마와 공부 저는 곡에 대한 공부를 좋아합니다. 모던타임스 레퍼토리를 짤 때는 독일 전기 작가 슈테판 츠바이크의 『어제의 세계』를 탐독했어요. 덕분에 연주 작품의 배경이 더욱 생생하게 떠올랐죠. 곡을 공부한다, 피아노를 공부한다는 말이 어색한가요? 피아노는 기술 연마와는 또 다른, 공부라는 개념이 있다고 생각해요. 스트레칭을 하는 건 연마죠. 저는 밥 먹을 때도 젓가락을 두들겨 가며 리듬감을, 화장품을 바르고 두드릴 때도 리듬감을 생각해요. 이것도 연마에요. 곡을 연습할 때 작곡가의 생애를 찾아보는 건 공부죠. 그 곡을 지금까지 연주한 사람들의 디스코그라피(discography·레코드목록)를 조사하는 것도요. 평소 헤겔, 릴케의 저서와 시를 읽어요. 역사책도 탐독하고요. 클래식 연주란 죽어 있는 텍스트를 되살리는 작..
재난의 사고법 ― 『2021 한국의 논점』(북바이북, 2020) 서문 올해는 한국전쟁 70주년이었다. 전쟁 이후, 대한민국 현대사를 이렇게 요약할 수 있을까. 처음 30년 동안은 혁명과 반동의 시대였다. 4.19혁명과 5.16 군사 쿠데타, 김대중・김영삼의 선거 돌풍과 유신 반동, 서울의 봄과 신군부의 쿠테타……. 1980년 5.18민주화운동의 역사적 의의는 여기에 있다. 이 사악한 되먹임 고리를 끊는 방아쇠 역할을 했다는 점이다. 1980년대 10년의 민주화 운동 기간을 거치고, 1989년 소비에트 붕괴 이후, 한국사회는 정치적으로는 민주주의가, 경제적으로는 ‘자본주의’가 지배하는 ‘정상’ 국가로 진입한 듯했다. 그다음 30년은 ‘재난과 복구의 시대’였다. 1997년에는 국가 부도 사태가 일어나고, 2008년에는 금융 위기가 있었다. 소수의 부유층과 권력층에게는 샴페인을..
대학 가지 않아도 행복한 나라 정부 정책을 집행하는 공무원들은 이상하게도 중대한 문제일수록 잘 해결하지 못하는 특성이 있다. 오랫동안 특정한 정책을 정해진 틀 안에서만 다룬 습벽이 장벽이 돼 혁신적 해결책을 좀처럼 떠올리지 못하는 까닭이다. 입시 공정성의 해결 방법으로 정시 비중을 높이겠다는 최근 정부 방안은 아무래도 미봉책일 뿐 좋은 해결책이라는 생각이 전혀 들지 않는다 한 모임에서 교사들을 만났는데, 정시 비중이 높아질수록 학교수업 전체가 문제풀이 학원이 될 수밖에 없다고 토로했다. 현재의 수능 시험은 현대사회가 요구하는 창의성과 관련이 적으므로 미래 가치가 낮은 데다 현행 학교 교육 과정이 감당하기 어려워 사교육을 부채질할 게 빤하다. 따라서 아무리 따져도 정시 강화는 게으르고 정형화된 사고의 결과일 뿐이다. 2019년 노벨경제..
프리랜서 전문가와 잘 일하는 법 때때로 전자우편, 문자, 메신저 등으로 불쑥 강연이나 원고를 청탁받는다. 나로서는 이런 접촉 방식이 다소 어색하다. 신입 편집자 시절, 먼저 문자 등을 보내 연락 가능 시간을 확인하고, 대화를 통해 뜻을 전한 후, 실제 청탁을 진행하는 게 글이나 말을 얻는 정중한 예의라고 배운 까닭이다. 이는 청탁하는 글과 말의 힘을 깊게 존중하는 일이기도 하고, 글과 말의 빚을 더 무겁게 만드는 일이기도 하다. 청탁의 예가 곡진할수록, 아무래도 원고나 강연에 더 신경 쓰게 마련이니 말이다. 또 청탁할 때에는 원고료나 강연료, 지급 방법, 지급 시기 등을 정확히 밝히는 게 당연하다. 청탁받는 이들은 대개 프리랜서 전문가다. 이들한테 원고나 강연은 가욋일이 아니라 먹고삶에 이어지는 노동이다. 내용을 살펴 청탁을 받을지 말..
소출판 인플레이션 - 발행종수 8만 종, 실적 출판사 8000개 시대 한국출판문화산업진흥원의 ‘2018년 출판산업동향 보고서’가 발표됐다. 한국 출판산업의 상태 변화 추이를 살필 수 있는 유일한 공식 자료에 해당한다. 국민이 출판 실상을 알 수 있게 정확한 사실을 알리는 게 정부 산하기관의 임무일 터인데, 이상하게도 아무 보도자료 없이 자료실에만 올려 두었기에 내려받아 한 해 동안 출판산업의 변화를 간략히 살펴보았다. 2018년 출판산업은 한마디로 ‘소출판 인플레이션’으로 정리할 수 있다. 전체 산업 규모는 단행본 1조 1698억 원, 교육출판 2조 8244억 원 등 3조 9982억 원으로, 전년 대비 0.1% 상승에 그쳤다. 오래전부터 시장규모는 정체와 하향을 반복하면서 조금씩 줄어들고 있다. 이에 반해 해마다 출판사 숫자는 늘어나고 발행 종수는 폭증 중이다. 2018년..
서울국제도서전을 즐기는 방법 ‘글이 만든 세계’가 펼쳐진다. 다음주 수요일인 6월 19일, 서울국제도서전이 강남 코엑스에서 열린다. 국내 312곳과 해외 41개국 117곳 참여사가 이미 독자를 만날 온갖 준비를 마쳤다. 모바일로 세상 모든 책을 만날 수 있는 세상이지만, 도서전을 찾는 독자들 발길은 해마다 느는 중이다. 인간은 몸으로 살아간다. 표지와 소개 등 곁다리 정보로는 나한테 맞는 책을 얻기 어렵다. 알바노동의 결과이기 일쑤인 인터넷 서평과 댓글은 믿지 못한다. 게다가 남이 읽는 것은 내가 읽은 게 아니다. 종이의 질감, 무게, 만듦새 등은 책을 손에 들어야 느낄 수 있고, 전체 서술이나 구조 등은 책을 훑어야 알 수 있다. 피지컬과 사이버가 적절한 균형을 이루지 못할 때, 인간의 육체는 허약해지고 정신은 공허해진다. 독자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