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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론과 서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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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 - 자크 라캉 과일을 향해, 장미를 향해, 순식간에 불붙은 장작을 향해 뻗는 이 손, 가 닿는, 끌어당기는, 북돋는 그것의 손짓은 과일의 농익음, 꽃의 아름다움, 장작의 타오름과 긴밀히 연대한다. 그런데 이 가 닿고, 끌어당기고, 북돋는 움직임으로 손이 그 대상을 향해 상당히 멀리 갔을 때, 과일로부터, 꽃으로부터, 장작으로부터 한 손이 솟아나 당신의 손을 만나려 뻗어온다면, 그리고 이 순간 당신의 손이 충만하게 여문 과일과 활짝 핀 꽃 속에서, 타오르며 파열하는 다른 손 안에서 응고한다면, 자, 여기서 생겨나는 것, 그것이 사랑이다. ==== 이렇답니다.
지는 싸움 지는 싸움을 하는 것은 어리석지만, 바로 지기 때문에 싸워야 할 싸움도 있을 것이다. 세상은 약은 일만 할 수는 없다. 지는 싸움마저 없으면 아예 싸움이 없을 것이다. 싸움이 있는 것만으로도 얼마나 오지냐? (서정인) 작품과 싸운다는 것은 절망적입니다. 하지만 그런데도 그는 그 싸움을 구태여 멈출 생각이 없어 보였습니다. ===== 『부사스럽게 부사 사전』(yeondoo, 2021)에 실린 독립 기획자 신이연의 「지는 싸움」에 나오는 말이다. 평생 작품에 매진해 온 노소설가의 삶에 필자가 부친 부사는 ‘굳이’이다. 이 책은 김지은, 신이연, 문광용, 이택광, 이석, 강정화 등 서른 명의 필자가 품사 ‘부사’에 대해 쓴 글을 모아 만든 책이다. 문화평론가, 그림 작가, 북 디자이너, 건축 비평가, 도서관 ..
추첨제 민주주의 추첨은 투표보다 원초적일 뿐만 아니라 더 민주적이다. 민주주의의 핵심인 임의성이다. 누구나 할 수 있으며, 그 누구도 어떤 누구보다 더 큰 정치적 힘이나 자격이 주어지지 않았다. 또, 민주주의의 핵심은 교체 가능성이다. 위정자를 바꿀 수 있고, 제도를 바꿀 수 있고, 해석을 바꿀 수 있다. 민주주의의 원류 고대 그리스에서는 국정 운영을 맡을 시민들을 추첨제로 뽑았다. 현대 미국 연방 법원의 배심원도 추첨으로 뽑힌다. 자크 랑시에르는 민주주의와 대의제의 위기를 지적하면서 추첨제를 제안했다. 추첨에 의한 정치는 평소 정치의 주체로 호명받지 못한 개인과 집단에게 권한을 부여하는 문을 여는 하나의 열쇠로 작용할 수 있으며, 이 열림으로 인해 연쇄적으로 일어나는 후보군 확장의 흐름은 동물 정치에 유리하다. _ 이..
코로나19 팬데믹과 신자유주의의 종언 코로나19 팬데믹이 습격한 지 세 해째다. 전 세계 사망자 숫자가 605만 명에 이르렀다. 한국도 최근 사망자가 가파르게 증가해 어느새 1만 명을 넘었다. 강력한 ‘사회적 거리두기’로 의료 시스템이 감당할 정도로 감염자 숫자와 확산 속도를 조절했는데도 이 정도였다. 비극적인 일이다. ​ 팬데믹과 서구 국가의 무능 ​ 애덤 투즈 미국 컬럼비아대 역사학과 교수의 『셧다운』(김부민 옮김, 아카넷, 2022)에 따르면, 바이러스는 우리의 생명뿐만 아니라 경제 역시 맹렬히 공격했다. 세계 경제 규모는 20% 이상 급감했으며, 인구 95%의 1인당 평균 소득이 줄어들었다. 청년들 16억 명의 교육이 중단되어 평생 10조 달러의 소득 손실을 볼 것으로 예측됐다. 사상 유례없는 사태였다. ​이 책은 2020년 1월 2..
불평등과 특권층 불평등이 적을수록 사람들은 더 관대해지고 불평등이 심할수록 관대함이 사라진다. 마이클 루이스는 말한다. “불평등 자체 때문에 문제가 발생한다. 불평등은 소수의 특권층에게 화학반응을 일으켜서 그들의 뇌가 한쪽으로 기울어지게 한다. 그러면 그들은 자기 자신 외에는 아무에게도 관심을 두지 않게 되고, 품위 있는 시민이 되기 위해 필요한 도덕적 감정을 느끼지 못한다.” 특권층은 거울 속에서 자신의 고귀한 모습을 본다. 경제적으로 성공한 사람은 시급 14달러를 받고 식료품을 배달하거나 지하철을 청소하는 사람이 그런 경제적 운명을 겪는 게 당연하다고 여긴다. 그들은 똑똑하지도 않고, 훌륭하지도 않으며, 자기처럼 가치 있는 사람도 아니라는 것이다. _ 스콧 갤러웨이, 『거대한 가속』, 박선령 옮김(리더스북, 2021..
난파한 세계에서 널빤지 하나씩을 붙잡고 우리는 흔히 인생을 항해에 비유한다. 출항과 귀항, 정박과 운행, 폭풍과 잔잔함 등 항해의 여정에는 인생 전체가 압축적으로 형상화돼 있다.​ 바다는 한순간 삶을 파괴하는 무섭고 불확실한 운명을, 난파는 살면서 마주치는 끔찍한 비극들을 상징한다. 우리는 위험을 넘을 때마다 세파를 헤쳐간다고 생각하고, 쓰라린 실패와 마주치면 배가 뒤집혀 침몰하는 듯한 기분에 사로잡힌다. ​독일 철학자 한스 블루멘베르크의 『난파선과 구경꾼』(새물결 펴냄)에 따르면, 호메로스, 탈레스, 루크레티우스, 몽테뉴, 파스칼, 볼테뉴, 괴테, 쇼펜하우어, 니체 등 사유의 대가들 역시 ‘삶은 항해’라는 은유에, 특히 난파의 이미지에 사로잡혀 왔다. 호메로스가 오디세우스를 바다로 몰아넣어 무수한 난파 속에서 자신을 깨닫게 하듯, 수많은 사..
견디다(耐), 한마디를 꽉 붙잡고 지나가라 최근에 홍자성의 이 안대회 성균관대 교수의 교감 작업을 거쳐서 새로운 번역으로 나왔다. 이 책의 제목은 ‘풀뿌리를 씹는 이야기’란 뜻이다. “사람이 풀뿌리를 씹을 수만 있다면, 어떤 일이라도 할 수 있다”라는 송대 학자 왕신민의 말에서 왔다. 비참할 때 어려움을 참고 견딜 수 있다면 무슨 일이든 이룰 수 있다는 말이다. 은 처세의 지름길을 열어 주고 어리석음을 깨우쳐 주는 영원한 베스트셀러다. 1917년 한용운 번역으로 국내에 처음 출판된 후, 지난 100년 동안 수많은 책이 나왔다. 그러나 이번에 나온 안대회 번역본은 판본의 정미함에서 지금껏 나온 모든 책을 압도한다. 에는 크게 두 가지 원본이 존재한다. 저자 홍자성이 직접 간행에 참여한 초간본(初刊本)과 청나라 때 강희제 명령으로 출판된 청간본(淸刊..
좋은 집이란 무엇인가 건물은 어느 때 가장 아름다울까. 도면 속에서 아직 상상의 존재로 머물러 있을 때일까. 완공된 직후 누구도 몸담지 않았을 때일까. 수백 수천 년 시간을 견딘 흔적을 담았을 때일까. 부서져 폐허로 남아 한때의 웅장함을 떠올리게 할 때일까. 한 인간에게 집은 언제 가장 의미 깊을까. 막 지어진 신축 아파트를 아름답고 깔끔하게 꾸며서 입주했을 때일까. 지지고 볶고 하면서 수십 년 어울려 살아서 구석구석 기억의 자국이 새겨졌을 때일까. 모센 모스타파비와 데이비드 레더베로가 함께 쓴 『풍화에 대하여』(이유출판, 2021)는 우리에게 이런 질문을 던진다. 다른 모든 존재와 마찬가지로, 건물 역시 태어나자마자 소멸을 향해 기울어져 간다. “영원히 존재하는 건물은 없고, 모든 건물은 결국 자연의 힘에 굴복하고 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