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평론과 서평

(366)
착한 소설 김유나, 『내일의 엔딩』(창비, 2024).착한 사람이 착한 내용을 착하게 쓴 소설이다. 평온하고 담담한 문장이 우선 눈에 띈다.요즘 소설에 넘실대는 인스타그램식 경구도 거의 없다. 그저 쓰러져 누워 버린 아버지를 6년간 간병하면서겪고 느끼고 생각 나는 것들을,특히 자기 삶의 궤적들을 천천한 속도로 회고하고 확인할 뿐이다.그걸 성장이라고 부를 수 있겠다."영화엔 러닝타임이라는 게 있어. 네 속도만 고집할 수가 없다는 거지. 다른 시간도 좀 따라가 보고 그래라."자기의 속도로 세상을 질주하는 게 아니라, 러닝타임, 즉 유한성(현실)을 받아들이고,다른 시간, 다른 속도와 섞여서 살아가는 것,그걸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게 성장이고 성숙일 테다. 단단한 디테일이 돋보였으나, 약간의 격정도 허용하지 않는 무난함으로..
‘낙원의 꿈’ 깃든 정원 책을 펼치면, 먼저 눈에 띄는 건 섬세하고 예민한 감성이 빚어낸 우아하고 싱그러운 문장의 향연이다. 혀끝에서 몇 번이고 굴리고 싶은 달콤한 수사, 마음의 현을 살며시 건드리는 생생한 표현이 페이지마다 넘쳐난다. 나도 몰래 손을 놀리다 문득 정신 차리면, 어느새 판면엔 밑줄이 가득했다. 과연 올리비아 랭이구나 싶다.『정원의 기쁨과 슬픔』(허진 옮김, 어크로스, 2025)은 다가올 봄을 기다리는 이들이 마음에 담을 만한 책이다. 이 책은 랭이 마흔 살에 결혼해 영국 서퍽에 정착하는 장면에서 시작한다. 1961년 유명 정원사 마크 루머리가 디자인했으나, 오랫동안 돌보지 않아 잡초와 부엽으로 뒤덮인 정원 딸린 집이었다. 그녀는 비밀의 방처럼 칸막이 진 이 정원의 가치를 한눈에 알아본다. 이로부터 노동과 사유가 ..
유명한 사람들은 왜 유명해지는가 좋은 책이어서 팔리는 것일까, 팔리는 책이어서 좋은 책일까. 출판계에서 떠도는 흥미로운 질문이다. 예전에는 내용이 좋고 만듦새가 좋은 책은 다소 시간이 걸릴 수는 있어도 언젠간 눈 밝은 독자들의 선택을 받고, 입소문을 타면서 결국엔 팔린다고 믿었다. 그러나 착각에 불과했다. 『페이머스 : 왜 그들만 유명할까』(박세연 옮김, 한국경제신문, 2025)에서 캐스 선스타인은 비틀스를 예로 들면서 명작이나 명곡이라서 유명해지고 사람들이 많이 듣는 게 아니라고 말한다. 실제로는 그 반대다. 비틀스 노래는 명곡이라서 듣는 이의 선택을 받는 게 아니라, 세계적 스타인 비틀스가 불러서 유명한 노래가 된다. 제인 오스틴과 메리 브런턴은 비슷한 시기에 활동한 작가였으나, 오늘날 브런턴의 작품을 읽는 사람은 극히 드물다. 사..
크리스티앙 보뱅, 글쓰기에 대하여 “시간은 일 속에서, 휴가 속에서, 어떤 이야기 속에서 소모된다. 시간은 우리가 할 수 있는 모든 활동 속에서 소모된다. 그러나 어쩌면 글쓰기는 다를지도 모른다. 글쓰기는 시간을 잃는 것과 매우 가까운 일이지만, 또한 시간을 온전히 들이는 일이다. 글을 쓴다는 것은 남아서 눅눅해진 시간을 조리하는 것이다. 그러면 매 순간은 감미로워지고 모든 문장은 축제의 밤이 된다.”  “당신은 글을 쓰기 시작한다. 작가가 되기 위해서가 아니다. 모든 사랑에 결여된 그 사랑을 침묵 속에서 다시 만나기 위해서이다.”=====크리스티앙 보뱅의 『빈 자리』(이주현 옮김, 1984Books, 2025)에 나오는 말이다. 무슨 책이 새로 나왔나 살피다가 책 소개 글에서 이 문장들을 만났다. 글이란, 시간을 써서 시간의 파수꾼이 ..
신문 책 소개에서 가져온 말들(2025년 3월 1일) ‘의식을 앞질러 제멋대로 문제를 해결하는 몸’은 전 프로야구 투수의 자세를 분석한 가시노 마키오의 연구에서도 확인된다. 정교한 제구력을 자랑하며 요미우리 자이언츠에서 에이스로 활약한 구와타 마스미는 ‘똑같은 자세로 30회를 던져달라’는 가시노의 요구를 의식하며 공을 던졌다. 동작 측정 결과 그는 ‘매번 다르게’ 던졌다. 똑같이 던지려고 노력했지만 공을 놓는 지점 등이 모두 달랐다. 반면 공은 모두 같은 위치에 꽂혔다. 그의 투구는 “늘 똑같은 행위를 수행하는 것이 아니라 결과가 똑같도록 행위를 조정”하며 몸이 해법을 찾아낸 실례라고 이토 아사는 설명한다. _이토 아사, 『몸은, 제멋대로 한다』, 김영현 옮김(다다서재, 2025).   가치와 비전을 갖고 일을 하면 아무리 천한 일이라 하더라도 그것은 활동..
읽다, 일하다, 사랑하다 첫 번째 산문집이 풍월당에서 드디어 출간됐다. 생활에 대한 것은 아니고, 문학에 대한 것이다. 하지만 비평하고는 상관없는 지극히 주관적인 읽기로서  그저 삶에 대한 것이고, 굳이 말한다면, 읽기를 통해서 다른 삶을 엿보면서 자유를 연습하는 방법에 관한 것이다. 어떻게 살아야 할지 알 수 없는  이 막막한 세계에서 문학과 함께하는 상상의 실천만이 어쩌면 우리를 더 나은 존재로 만들어 줄지도 모른다. 그런 기대를 담아서 오늘도 나는 읽고, 읽고 또 읽는 것이다.  이 책은 그렇게 읽은 것에 대한 작은 회상 같은 것이다. 아래는 서점 링크다.교보문고 : https://product.kyobobook.co.kr/detail/S000215892671 알라딘 : https://www.aladin.co.kr/shop..
사랑, 일, 가족 존재의 공포에 대한 가장 좋은 방어 수단은 사랑, 일, 가족이라는 가정적인 편안함이다. 이는 우리의 바람에는 미치지 못하나, 우리의 필요에 반응하는 세상과 우리를 연결해 준다. 프로이트가 특유의 날카로운 표현으로 지적했듯, 사랑과 일을 통해 우리는 극심한 감정적 갈등을 평범한 불행으로 바꿀 수 있다. 사랑과 일은 우리 각자가 세상의 작은 구석을 탐험한 후, 그 자체로 그것을 받아들일 수 있게 해준다. 그런데 우리 사회는 사소한 편안함을 폄훼하거나 너무 많은 것을 기대하는 경향이 있다. '창의적이고 의미 있는 일'에 대한 우리 기준은 실망을 견뎌내기에는 너무 높다. '진정한 로맨스'에 대한 우리 이상은 개인적 관계에 불가능한 부담을 준다. 우리는 삶에 너무 많은 것을 요구하고, 자신에게는 너무 적은 것을 ..
작가는 어떤 존재인가(마르셀 프루스트) “작가는 공세를 퍼붓듯 끊임없이 힘을 모으고, 피로감을 견디고, 규칙처럼 수용하고, 교회처럼 구축하고, 체제처럼 따르고, 장애물처럼 극복하고, 우정처럼 성취하고, 아이에게처럼 과한 영양분을 제공하고, 다른 세계에서만 설명이 가능하며 삶과 예술에서 우리를 감동시키는 신비감을 빼놓지 않고 세심한 글을 써야 한다.” _ 마르셀 프루스트 “진정한 삶, 마침내 발견되고 밝혀진 삶, 결과적으로 충만하게 살아진 유일한 삶은 바로 문학이다. 예술을 통해서만 우리는 스스로에게서 벗어나 타인이 보는 다른 세계를 볼 수 있고, 달의 정경만큼 알려지지 않은 풍경을 볼 수 있다.” _ 마르셀 프루스트 =====언제나 힘이 되는 문장들이 있다. 이 문장들은 새로운 번역본에서 만날 때마다 나를 감동시킨다. 이번에 나온 『프루스트의..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