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평론과 서평

(312)
로마는 세 번 세상을 통일했다 로마는 세계를 세 번 지배했고, 수많은 민족을 세 번 결합하여 통일했다. ​첫째, 로마가 가장 강성했을 때 여러 국가를 통일했다. 둘째, 로마제국이 몰락한 후 교회들을 통일했다. 셋째, 중세에 계승되어 서양 법의 근간을 제공할 로마법 체계를 발전시켰다. 첫 번째는 무력을 이용해서 강제로 한 통일이었지만, 두 번째와 세 번째 통일은 정신의 힘에 의한 것이었다. 로마가 세계사에서 갖는 의미와 사명을 한마디로 요약하면, 민족적 원리를 보편성의 사상에 의해 극복하는 것이다. _루돌프 폰 예링 ​ ==== 정신성, 그러니까 민족적 원리를 보편성의 사상에 의해 극복하는 것, 이게 늘 문제죠. 이 말은 정기문 선생의 쫄깃한 역사 뒷이야기 기행 『역사를 재미난 이야기로 만든 사람들에 대한 역사책』(책과함께, 2019)..
양자 컴퓨터란 무엇인가 현황 ​양자 컴퓨터는 현재의 컴퓨터가 정보를 처리하는 원리를 기반으로 하면서 ‘양자’라는 새로운 성질을 더해서 기능을 향상한 컴퓨터이다. (1-18쪽) 양자 컴퓨터에는 세상을 바꿀 능력이 있다. 컴퓨팅 능력을 획기적으로 개선하기 때문이다. 주판, 시계, 계산기, 컴퓨터 등 지금까지 발명된 모든 계산 도구는 숫자를 계산하는 규칙을 물리 현상으로 대체하여 계산한다. (1-33쪽) 양자 컴퓨터는 원리적으로 현재 우리가 사용하는 전기 스위치를 사용하는 계산기(트랜지스터)의 물리적 한계를 뛰어넘는다. 사람들 착각과 달리, 양자 컴퓨터는 현재 우리 곁에 이미 존재한다. 2019년 1월부터 IBM에서는 양자 컴퓨터를 판매하기 시작했다. 2019년 10월에 구글은 “최첨단 슈퍼컴퓨터로도 푸는 데 1만 년 걸리는 문제를..
정치철학이 언제나 정치를 이긴다 언젠가 관념 이외에 아무것도 담고 있지 않은 책을 쓴 루소라고 불리는 사람이 있었지. 그 책의 제2판은 초판을 비웃은 사람들의 가죽으로 제본되어 있었다네. (토머스 칼라일) 데이비드 밀러의 『정치 철학』(이신철 옮김, 교유서가, 2022)에 나오는 말이다. 밀러에 따르면, 정치적 삶에 직접 개입하고자 한 정치철학자들은 대개 실패했다. 아리스토텔레스, 마키아벨리 등 그들은 강력한 통치자에게 조언해 왔다. 그들의 조언은 정치를 실제로 바꿨을까? 당연히 그렇지 않았다. 정치철학자들이 정치적 사건에 직접적 영향을 끼치는 바가 드문 이유는 그들이 정치인과 일반 대중 모두가 지니는 관습적 믿음에 도전하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말해, 정치인이든 대중이든 정치 철학자의 말을 싫어한다. 그러나 정치철학이 시간의 흐름과 더..
식량 위기와 문명의 종말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략으로 세계 식량 위기가 현실화했다. 두 나라는 세계 최대 밀 수출국으로 전 세계 밀 공급량의 27%를 맡는다. 러시아산 밀 수입 비중이 60%가 넘는 아프리카 국가는 당장 기아 위기에 몰렸다. 식용유 공급망도 붕괴했다. 두 나라는 세계 해바라기씨유 공급을 절반 이상 책임진다. 두 나라 수출이 막히자, 그 영향이 인도네시아로 이어졌다. 전 세계 팜유 생산량의 50%를 떠맡은 인도네시아에서 식용유 품귀를 이유로 수출을 중단한 것이다. 여기에 이상기온으로 인한 가뭄, 홍수, 산불 등 기후 재앙까지 겹쳐져 전 세계적으로 식량 부족이 심화 중이다. 유엔 식량농업기구, 세계은행 등의 수많은 전문가가 국제 식량 위기를 경고하고 있다. 『문명과 식량』(눌와, 2018)에서 루스 디프리스 미국 컬..
삶을 증오하는 사람, 사랑하는 사람 “우리는 인간처럼 행동하는 기계를 제작하고, 기계처럼 행동하는 인간을 생산한다. 옛날에는 노예가 될지 모를 위험이 있었다면, 지금은 로봇이나 자동인형이 될 위험이 있다.” ​ 『우리는 여전히 삶을 사랑하는가』(김영사, 장혜경 옮김, 2022)에서 독일 철학자 에리히 프롬은 말한다. 이 말에는 현대인을 움켜쥔 삶의 아이러니가 섬뜩하게 표현돼 있다. ​ 오늘날 자기 삶의 주인으로 생동감 넘치게 살지 못하고, 무력하게 일상의 쳇바퀴를 굴리고 있다는 느낌에서 자유로운 사람은 드물다. ​ 인공지능 도입에 따른 일상생활의 급진적 자동화, 자기 생각의 독립적 표현보다 남의 생각에 대한 공감과 공유를 조장하는 소셜미디어, 하루 24시간 시도 때도 없이 쏟아지는 문자와 메일 등 스마트 업무 환경 등은 생각의 로봇화를 촉..
앞으로 100년, 세계는 어떻게 될 것인가 코로나19 팬데믹과 함께 20세기가 저물었다. 조짐은 벌써부터 있었다. ​2008년 금융 위기로 신자유주의적 자본주의가 파산했다. 2018년 미국과 중국의 무역 전쟁으로, 짧게는 1990년 이후의 자유주의적 다자주의 무역 질서가, 길게는 1945년 이후로 75년 동안 지속해 온 자유주의적 국제 질서가 쇠퇴기를 맞이했다. ​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략은 ‘짧은 평화’라 불리는 미국 단극체제의 지속 불가능을 알리는 일격이다. 더 나아가 달러 공동체 해체나 인터넷 종언을 알리는 위험 신호다. 귀책이야 전적으로 러시아에 있으나, 해외 금융기관에 맡긴 자금 등이 정치적 사태 때문에 한순간 인출 불능이 되거나, 국제 정보 시스템이 접속 불능이 될 수 있다면 누가 그 시스템을 신뢰하겠는가. 다시 체제 선택을 강요당하는..
서유기 81난 - 인간이 겪어야 할 모든 고난 이야기 서유기는 크게 세 부분으로 나뉜다. (1) 손오공 인생 내력 (2) 현장의 탄생 비화와 취경단 모집 (3) 불경을 얻기까지 벌어진 모험 과정 -> 세 번째 부분이 81난으로 전체 분량의 80% 81가지 에피소드에서 현장이 실제 겪는 고난은 77가지이다. "사부님께서는 걸음마다 어려움이 있고, 곳곳에서 재난을 만나야 하시니." - 재난은 필연이다. "불문에서는 '구구팔십일'의 수를 채워야 참된 도에 귀의하게 되는 법이다." 시련은 열반으로 가는 길이다. - 떠날 때 삼장은 입으로는 불경을 외되, 행동은 그에 미치지 못한 평범한 승려에 불과했다. 손오공 왈, "사부는 외울 줄만 알지, 그 의미를 깨달으려고 하지 않는다!" - 당신은 범어를 붙들고 계시는군요. 도라는 것은 본디 중국에 있는데 서방에서 구하려 ..
모래 위에 쓰인 _ 헤르만 헤세 아름답고 매혹적인 것이 단지 한 번의 입김이고 전율일 뿐이라는 것 값지고 황홀한 것이 잠깐의 우아함이라는 것 구름, 꽃, 비눗방울, 불꽃놀이, 아이들의 웃음, 유리 거울 속 여자의 시선 그리고 많은 경이로운 것들 그것들은 발견되자마자 사라진다는 것 단지 한순간 지속될 뿐이라는 것 그저 향기이며 바람의 흩날림일 뿐이라는 것 아, 슬프게도 우리는 그것을 알고 있다 (중략) ​ 그래, 지고의 아름다움은 사랑스러움은 쇠락하는 것에 끌린다. 가장 값진 것은 언제든 부서질 수 있다. 음악의 소리, 생겨남과 동시에 이미 떠나가고 사라지는 음악의 소리는 그저 흩날리고 흘러가고 뒤늦게 따라가면서 나직한 애도의 기운에 싸여 있다. (중략) ​ 그런 우리에게는 장미 이파리의 이슬이 한 마리 새의 구애가 구름이 희롱하는 죽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