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구사의 지평에서 호모사피엔스 20만 년의 역사를 이야기하다
책을 읽고 있는데, 아내가 묻는다. “옥스퍼드 세계사? 영국(서구) 중심주의 서술 아니야?” 역사를 제 입맛대로 농단해 왔던 서양 제국주의에 대한 의심과 회의, 이것이 오늘날 세계사를 대하는 독자들의 일반적이고 정당한 태도이다. ‘도대체 세계사가 가능할까?’ ‘설령 그런 게 있더라도 인종주의(민족주의)에 오염되지 않았을까?’ 그러나 세계사는 가능하다. 세계가 하나로 연결됨에 따라, 또 인류의 역사가 생명의, 지구의, 우주의 역사라는 거대사의 지평에서만 이해될 수 있다는 사실이 명확해짐에 따라, 세계사를 큰 흐름 위에서 기술하려는 시도들이 늘어 가고, 이에 대한 독자들 반응도 뜨겁다. 재러드 다이아몬드의 『총, 균, 쇠』, 데이비드 크리스천의 『빅 히스토리』, 유발 하라리의 『사피엔스』 등에 대한 열광은 ..
의자, 침묵의 살인자
인간은 살아가면서 수많은 질병에 시달린다. 타고난 질병도 일부 있으나, 대부분 삶의 결과로 생겨난 것이다. 젊을 때에는 사고나 중독이나 감염 탓에 병에 걸리고, 나이 들면 주로 노화로 인해 병든다. 그러나 당뇨병, 고혈압, 요통, 불안, 우울 같은 이상한 질병들도 있다. 우리의 구석기 조상들은 이러한 질병들을 몰랐다. 자연 상태에서는 극히 드물기 때문이다. 바이바 크레건리드는 『의자의 배신』(고현석 옮김, 아르테, 2020)에서 인간을 괴롭히는 이 이상한 질병들을 일으킨 범인이 ‘의자’라고 말한다. 인간의 기본형은 직립이다. 인간은 일어서서 두 발로 걸어서 손을 해방시킴으로써 지구의 지배자가 될 수 있었다. 인간 발은 움직임의 가능성을 극대화하고, 특히 오랫동안 걷는 데 최적화되어 있다. 하루 대부분을 ..
사랑의 고고학 ― 잃다, 파다, 스며들다
이 책에 실린 작품들은 ‘사랑의 고고학’을 실천한다. 작가는 언어의 섬세한 솔질로 기억의 지층을 굴착해 사랑의 흔적을 발굴한다. 열세 살에서 열여덟 살까지, 어린 나이에 주로 첫사랑의 형태로 파묻힌 이 사랑은 퀴어의 형태로 존재하기에 낯설고 두렵고 들끓고 뜨겁고 위험하고 조심스럽다. 이 책에 담긴 청소년 퀴어 서사를 꿰뚫는 동사는 세 가지, ‘잃다, 파다, 스며들다’이다. 소설의 화자들은 모두 상실 이후를 살아간다. 「우리들의 우리들」의 은푸른하늘은 아빠가 없고, 「어리고 젊고 늙은 그녀들 스미다」의 서해림은 엄마가 세상을 떴고, 「사라지는 사라지지 않는」의 강희는 친구를 영원히 잃었고, 「사랑을 말할 때」의 장한나는 언어를 빼앗겼다. 사랑과 상실의 결합은 에로스를 더 애타게 하지만, 투사할 대상을 잃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