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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정균(溫庭筠)의 「정서번(定西蕃) 3」 정서번(定西蕃) 3 온정균(溫庭筠) 내리는 보슬비, 새벽의 꾀꼬리, 봄날은 저무는데(細雨曉鶯春晩), 옥 같은 사람, 눈썹 같은 버들잎(人似玉, 柳如眉), 더없이 그립구나(正想思). 비단 휘장, 비취 주렴, 걷으려 하는데(羅幕翠簾初捲), 거울 속에는 꽃 가지 하나 놓여 있네(鏡中花一枝). 변방 소식에 애간장이 끊어지는데(腸斷塞門消息), 기러기마저 드물게 날아오누나(雁來稀). ===== 제목의 정서번(定西蕃)은 당나라 말기, 송나라 초기에 만들어진 노래 곡조 중 하나이다. 사패마다 글자 수가 정해져 있어서 여기에 맞추어 가사를 지어야 했다. 이 작품은 변방으로 군역 떠난 남편을 그리워하는 아내의 모습을 애절하게 그려낸다. 시절은 봄날이다. 보슬비가 소리 없이 내리는 새벽, 짝을 찾는 꾀꼬리 소리에 아내는 문..
온정균(溫庭筠)의 「보살만(菩薩蠻) 4」 보살만(菩薩蠻) 4 푸른 꼬리 금빛 깃털 물수리 한 쌍(翠翹金縷雙鸂鶒), 물결무늬 살짝 이는 봄 연못이 파라네(水紋細起春池碧). 연못가 해당화는(池上海棠梨) 비 갠 후 가지를 붉은 꽃으로 채웠구나(雨晴紅滿枝). 수놓은 저고리로 보조개를 살짝 가리는데(繡衫遮笑靨) 안개처럼 무성한 풀에는 나비가 달라붙었네(烟草粘飛蝶). 청색 창살 밖엔 향기로운 꽃들이 만발한데(靑瑣對芳菲) 옥문관 너머 임 소식은 드물기만 하구나(玉關音信稀). ==== 온정균(溫庭筠, 812∼870)은 만당(晩唐)의 시인으로 노래 가사를 잘 지어서 이름이 높았다. 제목의 보살만(菩薩蠻)은 기루에서 주로 불리던 노랫가락의 한 종류이다. 온정균은 이 노랫가락에 맞추어 여러 편 작품을 지었는데, 이 작품은 그중 한 편이다. 봄의 화려한 색채감이 돋..
책 수집가들만 아는 책의 뒷담화 책 수집가에게 양심과 염치는 사치다. 물고기에게 잠수복만큼이나 어울리지 않는 조합이기도 하다.(48쪽) 이 바닥 선수들은 지인이 중고책 전문가랍시고 구하기 어려운 책을 구해 달라고 부탁하면 전혀 귀찮아하지 않는다. 몰랐던 희귀본을 알게 해 준 지인에게 감사하며(오직 마음속으로만), 이런저런 자신만의 경로로 그 책을 찾다가 2권 이상이 나오면 다행이지만, 1권밖에 없으면 그 지인에게 할 말은 딱 하나이다. “찾아봤지만 내 재주로는 못 찾겠는걸. 미안해.” 그러곤 다음날 배송되어 올 친구가 알려준 희귀본을 기다리면서 ‘터져 나오는 웃음’을 참지 못한다. 물론 양심의 가책 따위는 느끼지 않는다. (98~99쪽) 확 와 닿는 말이다. 박균호의 『그래봤자 책, 그래도 책』(소명출판, 2021)은 책 수집가들의 무..
구독의 시대, 지역서점의 살 길을 열다 책바다봄. 경남 통영의 독립서점 봄날의책방에서 운영하는 ‘책 꾸러미 구독 서비스’ 이름이다. 25만 원을 내고 연 6회, 책방 일꾼이 선별해 보내는 책을 택배로 받아 읽는 서비스이다. 1회에 4만 원이 넘으니, 만만치 않은 가격이다. 그러나 지난 1월 28일 모집을 시작한 정기구독자 200명은 열흘이 되기 전에 마감됐다. 책바다봄은 단지 ‘책 받아 봄’을 넘어서 “좋은 책과 바다의 향기를 함께 만나는” ‘책-바다-봄’이었다. 먼저, 전국 각지의 바닷가에 자리 잡은 독립출판사 네 곳의 ‘책’이 있다. 봄날의책방을 운영하는 통영의 남해의봄날, 강원 고성의 온다프레스, 인천 강화의 딸기책방, 전남 순천의 열매하나가 힘을 모았다. 여기에 ‘바다’가 더해졌다. 지역 특산물을 함께 보내준다. 덕분에 구독자들은 두 ..
아테네, 비극의 도시 - 문학과 도시 (1) 인간 존재는 ‘죽다, 넘어서다, 모여 살다’ 셋으로 압축된다. 길어야 100년, 인간의 삶에는 끝이 있다. 영원을 누리는 신과 달리, 태어나자마자 우리의 물리적 생명은 시간의 침습을 받아 죽음을 향해 간다. 유한성은 인간을 비롯한 모든 생물의 특징이다. 그러나 인간은 패배자가 아니다. 끝이 있음을 알기에, 인간은 보이지 않는 것을 머릿속에서 보는 힘을 익혔다. 꿈꾸고 상상하면서 한 걸음 더, 주어진 운명에 굴복하지 않는 역량은 우리를 독특하게 한다. 넘어서는 힘은 인간을 창조자로 만든다. 먹지 못할 것을 먹게 하고, 살지 못할 곳에서 살게 하고, 죽을 때를 생명의 시간으로 바꾸어 준다. 인간은 홀로 넘지 못한다. 영웅 숭배는 역설이다. 재앙을 혼자 힘으로 돌파하는 인간의 희소를 상징한다. 인간은 모여 있..
SNS 민주주의(?)의 종언 지난 며칠 동안, 전 세계가 미국의 몰락을 생생히 지켜보았다. 현직 미국 대통령이 트위터로 사람들을 선동하고, 거짓에 부추겨진 폭도들이 의회를 점령해 선거를 통한 합법적인 정권 교체를 부정했다. 미국의 민주주의는 이로써 선연히 파산했다. 미국을 망가뜨린 것은 트럼프 개인이 아니다. 리더십은 중요하나, 한 사람의 저열한 품성에 모든 원인을 돌리는 것은 지적으로 무책임하다. 미 의회를 점거한 ‘반역자들’은 ‘선거 부정’이라는 가짜 뉴스에 속아 넘어가서 분노를 이기지 못하고 몰려든 평범한 시민들이다. 대부분 주변에서 흔히 만날 수 있는 이들일 것이다. 이들을 극단주의자로 만든 진짜 범인은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 정확히 말하면 가짜뉴스를 확산하고 증식하는 ‘인공지능 알고리즘’이다. 이들은 트위터, 페이스북..
재난의 사고법 ― 『2021 한국의 논점』(북바이북, 2020) 서문 올해는 한국전쟁 70주년이었다. 전쟁 이후, 대한민국 현대사를 이렇게 요약할 수 있을까. 처음 30년 동안은 혁명과 반동의 시대였다. 4.19혁명과 5.16 군사 쿠데타, 김대중・김영삼의 선거 돌풍과 유신 반동, 서울의 봄과 신군부의 쿠테타……. 1980년 5.18민주화운동의 역사적 의의는 여기에 있다. 이 사악한 되먹임 고리를 끊는 방아쇠 역할을 했다는 점이다. 1980년대 10년의 민주화 운동 기간을 거치고, 1989년 소비에트 붕괴 이후, 한국사회는 정치적으로는 민주주의가, 경제적으로는 ‘자본주의’가 지배하는 ‘정상’ 국가로 진입한 듯했다. 그다음 30년은 ‘재난과 복구의 시대’였다. 1997년에는 국가 부도 사태가 일어나고, 2008년에는 금융 위기가 있었다. 소수의 부유층과 권력층에게는 샴페인을..
2020년대 출판 트렌드 예측 김학원의 『편집자란 무엇인가』(휴머니스트, 2020)에서 예측한 향후 10년의 출판 트렌드. - 출판산업과 비즈니스의 모든 영역과 공정에서 온라인 비중이 더욱 늘어날 것이다. - 디지털 네이티브 세대가 생산과 소비의 새로운 주역으로 등장하면 책의 내용과 형식의 변화는 물론이고, 독서의 동기나 방식 등 e책의 소비 생태계에도 변화가 일어날 것이다. 플랫폼, SNS 미디어, 유튜브 등 온라인 미디어나 채널과 결합한 저렴하고 얇은 레퍼런스 북 등 새로운 시도들이 선보일 것이다. - 현재는 5퍼센트에 불과한 전자책 시장이 출판산업 성장의 새로운 변수로 떠오를 것이다. - 종이책은 연간 발행 종수 10만 종 시대를 열고, 전자책은 연간 발행 종수 30만 종 시대를 열 것이다. 2020년대 중반에 들어서면 전자책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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