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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도시에는 거리의 생활이 없다 어릴 때 살던 서울 약수동 달동네는 골목 천국이었다. 다양한 크기와 모양의 집들이 복잡하게 맞물리면서 좁고 넓은 길들을 거미줄처럼 뽑아냈다. 두 사람은 동시에 지나지 못할 골목에서 양보의 미덕을 익혔고, 동네 아이들 비밀 장소인 세 평 공터에서 놀면서 우정을 쌓았으며, 과일, 채소, 생선, 철물, 등유, 곡물, 잡화, 약국 등 구석구석 가게들을 구경도 하고 심부름도 다니면서 셈을 배웠다.약수동 떠나 서른 해 가까이 살아온 동네가 서울 노원이다. 갈대 무성한 드넓은 벌판을 바둑판처럼 정리해 비슷한 건물들을 줄지은 신도시다. 등산할 수 있는 산과 산책할 수 있는 강이 있고, 집 근처 한두 블록 안에 꼭 공원이 있다. 백화점과 쇼핑센터, 종합병원과 대학, 미술관과 과학관, 학원가와 상점가 등도 마련되어 있다...
빈자의 미학, 한 건축가의 생을 건 약속 “빈자의 미학, 여기에선 가짐보다는 쓰임이 중요하고 더함보다는 나눔이 중요하며 채움보다는 비움이 중요하다.” 승효상의 『빈자의 미학』(느린걸음, 2016)을 틈 내어 읽었다. 1996년 미건사에서 나왔다 품절된 것을 몇 해 전 느린걸음에서 다시 펴냈다. 절판되었을 때에는 헌책방에서 10만 원 넘는 고가에 판매되기도 한 책이다. 이 책은 영국의 한 건축학교 초청 강의록으로 쓰인 것이지만, 40대의 젊은 건축가였던 승효상이 자신의 미래를 걸고 쓴 건축 미학적 선언이기도 하다. 책을 열면 위에 인용한 유명한 제사가 나오고 이어서 충남 당진 돌마루 공소의 사진이 있다. 별다른 장식 없이 줄 지은 의자만으로 꾸려진 예배당 천정에서 한 줄기 강한 빛이 쏟아진다. 어둠과 빛만으로 꾸려진 소박한 공간에서 흑백의 강한 ..
크노소스에서 비잔티온까지 열한 군데 도시로 본 고대 그리스 새로운 분야의 공부를 시작할 때, 어떤 책을 길잡이로 삼을 것인가는 무척 중요한 문제다. 기초를 든든히 해두거나 방향을 제대로 잡아두지 못하면, 나중에 전혀 엉뚱한 곳에 가 있거나 부족한 부분을 채우느라고 더욱 큰 노력을 들이기 십상인 까닭이다. 하지만 시중에 나와 있는 많은 입문서들은 오래된 지식만 담고 있어서 별로 흥미롭지 않고, 때로는 한쪽 입장에 치우친 경우도 많아서 선뜻 권하기 힘들다. 옥스퍼드대학 출판부에서 기획한 ‘Very Short Introduction’ 시리즈가 나온 이래, 이러한 고민은 씻은 듯 사라졌다. 몇 년 전부터 학생들과 입문 수업을 하거나 아이들한테 첫 공부를 권하려 할 때 선뜻 추천하는 도서가 이 시리즈의 한국어 번역판인데, 주로 교유서가의 ‘첫단추 시리즈’에서 속해 있다...
조지 오웰, 그래픽 노블로 환생하다 『조지 오웰』(최정수 옮김, 마농지, 2020)은 피에르 크리스탱이 글을 쓰고 세바스티앵 베르디에 등 프랑스의 대표적 만화가들이 참여해 그림을 그린 그래픽 노블이다. 조지 오웰의 마흔여섯 해 인생을 오웰 이전의 오웰, 블레어가 오웰을 창조하다, 오웰은 누구인가 등 세 단계로 나누어서 정확하고 아름답게 그려내고 있다. 국내에서 오웰의 평전이 드물지만은 않다. 레이먼드 윌리엄스의 『조오지 오웰』(탐구당, 1981)에서 존 서덜랜드의 『오웰의 코』(민음사, 2020)에 이르기까지 꾸준히 출간되어 왔다. 박홍규의 『조지 오웰 : 자유, 자연, 반권력의 정신』(이학사, 2003/ 푸른들녘, 2017), 고세훈의 『조지 오웰 : 지식인에 대한 보고서』(한길사, 2012), 아거의 『조지 오웰 - 기억하는 인간, 기..
2019 국민독서실태조사 요약 1. 성인 종이책 연간 독서율은 52.1%, 독서량은 6.1권으로 2017년에 비해 각각 7.8%포인트, 2.2권 감소. 2. 초·중·고교생 종이책 연간 독서율은 90.7%, 독서량 32.4권, 2017년 대비 독서율 1.0%포인트 감소, 독서량 3.8권 증가. 3. 전자책 독서율은 성인 16.5%, 학생 37.2%로 2017년보다 각각 2.4%포인트, 7.4%포인트 증가. 20~30대 중심 증가 폭 확대. 오디오북 독서율은 성인 3.5%, 학생 평균 18.7%(초등학생 30.9%, 중학생 11.6%, 고등학생 13.9%). 4. 전자책, 오디오북 포함 연간 독서율은 성인이 55.7%, 학생은 92.1% 기록. 5. 대학생 독서율은 2017년 대비 2.7%포인트, 30대는 2.0%포인트 증가, 반면에 5..
시민적 휴머니즘의 탄생 한스 바론의 『초기 이탈리아 르네상스의 위기』(임병철 옮김, 길, 2020)를 빠르게 읽었다. 재작년 아내와 피렌체를 여행한 이후, 피렌체를 다룬 책들은 어떻게든 한 번쯤 훑어 읽는 버릇이 생겼다. 언젠가 이 매력적 도시에 대한 글을 써 보기 위해서다. 이 책이 주로 다루는 시기는 1400년 전후의 피렌체다. 이 시기에 머릿속에 떠올릴 수 있는 것은 나로서는 메디치 가문을 피렌체의 지배자로 끌어올린 코시모 데 메디치 정도다. 르네상스 인문주의의 세 스승은 이미 세상에 없다. 단테는 1321년에, 페트라르카는 1374년에, 보카치오는 1375년에 죽었다. 출판으로 르네상스를 가져온 알도 마누치오는 1449년에 태어난다. 다빈치는 1452년에, 미켈란젤로는 1475년에, 라파엘로는 1483년에야 등장한다. ..
사랑할 수 있는 지겨움 프로그램을 하다 보면 자꾸 섭외에 신경 쓰게 돼. 그게 제일 티가 많이 나거든. 안에서 '그 피디 열심히 하네.' 소리도 듣기 쉽고, 밖에서 기사도 많이 나고. 그런데 진짜 중요한 건 매일 하는 코너야. 오프닝 같은 거 있잖아. 매일 반복하는 코너를 어떻게 만드느냐가 그 프로그램의 성패를 결정하는 거야. _장수연, 『내가 사랑하는 지겨움』(라이킷, 2020) 중에서 MBC 라디오 장수연 PD의 에세이집.오후에 눈에 들어와, 한 시간, 가볍게 읽다. 어떤 일이든, 핵심은 반복에 달려 있다.나쁜 회사들은 리더가 매일 규칙을 바꾸고,그 때문에 점점 나쁜 회사가 된다.좋은 회사는 어제 한 일을 오늘 또 하고,그럴수록 점점 좋은 회사가 된다. 사랑할 수 있는 지겨움이 있다면,잘 살고 있다는 증거가 아닐까 싶다. ..
메타포적 인생 “온 세상이 다 무엇인가의 메타포라고 생각하시는 건가요?”안토니오 스카르메타의 소설 『네루다의 우편배달부』(민음사, 2004)에서 마을 청년 마리오 히메네스가 파블로 네루다에게 묻는다. 작품 배경은 1970년대 초 칠레의 이슬라네그라. 노벨문학상을 받은 시인 파블로 네루다가 1943년부터 정착해 살았고, 현재 그의 무덤이 바다를 바라보는 어촌 마을이다. 마리오는 네루다한테 온 우편물만 배달하는 사람으로 특별 채용된다. 열일곱 살 마리오는 이 일을 계기로 처음으로 네루다의 시집을 읽기 시작한다. 시를 읽으면서, 또 네루다와 대화하면서 청년은 세계를 바라보는 시인의 눈이 독특함을 깨닫고 질문을 던진 것이다.‘사실대로’ 세계를 보는 것과 ‘제대로’ 세계를 보는 것은 다르다. 비의 물리적 실체는 하늘에서 떨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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