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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빌어먹을 놈들한테 절대 짓밟히지 말라.” 작품을 처음 접한 것은 서른 해 전이다. 먼저 영화를 접했고, 다음에 소설을 읽었다. SF 소설을 읽기는 하지만 일부러 찾아 읽지 않는 나 같은 이들한테 흔한 경로다. 국내 개봉 영화 제목은 ‘핸드메이드’. 처음에는 handmade인 줄 알았는데, 자세히 보니 handmaid였다. ‘시녀’라는 뜻이다. 지금은 영화를 보지 않지만, 당시엔 영화광이었다. 영화 의 폴커 슐렌도르프가 감독을, 노벨문학상을 나중에 수상한 해럴드 핀터가 각색을, 사카모토 류이치가 음악을 맡았다. 안 볼 수 없는 작품이다. 영화를 보고 난 후 원작 소설을 읽고 싶어졌다. 이건 습관이다. 영화를 보고 좋았는데, 원작이 있으면 거의 찾아 읽는다. (솔직히 반대 방향은 잘 안 그런다. 주로 실망하니까.) 작가 이름은 마거릿 애트우드. 흔..
‘주니어 평론가 시스템’의 파산과 문학 제도의 혁신 계간 《자음과모음》 봄호 특집 ‘작가-노동’이 화제다. “원고료로 생활이 가능한 ‘전업 평론가’는 과연 존재할 수 있는가”라는 질문에 문학평론가 장은정이 구체적 숫자로 답했기 때문이다. 2009~2019년까지 11년 동안 그가 발표한 글은 176편, 원고 매수로 5728매다. 대가는 총 3390만 원, 한 달 평균 46만 원이다. 이른바 ‘주니어 평론가 시스템’에 속해 상당히 많은 발표 기회가 주어졌는데도 이 정도다. 나머지 평론가들 수입은 말할 것도 없다. ‘전업 평론가’는 불가능하다. ‘주니어 평론가 시스템’은, 문학동네, 문학과지성사, 민음사, 창비 등 주요 문학 출판사의 내부 독회에 바탕을 둔 차세대 평론가 운영 체제를 말한다. 2000년대 중반 이후, 이들 출판사는 내부 편집위원, 편집자, 외부..
재난 유토피아 1755년 11월 1일, 리스본 대지진이 일어났다. 리히터 규모 8.5~9.0. 엄청난 지진은 이 아름다운 도시를 폐허로 만들었다. 건물의 85%가 파괴되고, 사망자가 수만 명에 이르렀다. 살아남은 사람들은 곧이어 찾아온 식량 부족과 감염병 때문에 굶어죽고 병들어 죽었다. 재난은 유럽인의 머릿속을 바꾸었다. 인간과 신의 관계에 확실한 균열이 생겨났다. 신정정치가 끝장나고 계몽주의가 일어섰다. 지진 발생 세 주 후, 볼테르는 「리스본 재앙에 관한 시」를 발표한다. “이 세상의 끔찍한 폐허를 응시하라./ 이 잔해들, 이 파편들, 이 불운한 잿더미들을.” 현실을 정확히 인식하자, 프랑스대혁명까지 100년이면 충분했다. 1906년 샌프란시스코 대지진에서 2005년 뉴올리언스 대홍수까지 미국을 덮친 다섯 차례 재..
인간은 ‘상대방의 거짓말’을 가려내는 데 무능하다 “낯선 사람이 우리 눈앞에서 거짓말을 하는데, 왜 우리는 그걸 알아채지 못할까?”『타인의 해석』에서 베스트셀러 저자 말콤 글래드웰이 묻는다. 관련한 연구를 집약하고 풍부한 사례를 집적해 인간 마음의 심오한 비밀을 캐내는 날카로운 통찰력, 한 편의 추리 소설을 읽는 듯한 느낌을 주는 탁월한 글 솜씨는 여전하다.인류사 대부분 동안 인간은 서로 잘 아는 이웃과 함께 살았다. 상대가 누구이며 어떤 방식으로 행동하는지 모르는 경우는 드물었다. 이러한 환경에서 진화했기에 우리 마음은 몸짓이나 어조 같은 사소한 신호만으로도 친한 사람의 마음을 읽어내는 데에는 상당한 실력을 갖추고 있다. 이에 반해 낯선 사람의 생각이나 행동을 이해하려고 애쓸 필요가 없었기에 우리 마음은 이들의 의도를 파악하는 데 아주 서투르다. 현대..
한국사회의 ‘감정 사전’을 비판적으로 다시 쓰다 김신식의 『다소 곤란한 감정』(프시케의숲, 2020)을 읽다. 이 에세이는 ‘심정’을 다루고 있다. 김경자・한규석의 논의를 빌려서 저자는 심정을 “상대방이 이해해 주었으면 하는 바람을 지닌 활성화된 속마음”으로 정의한다. 한마디로, 심정이란 어떤 일이 일어났을 때 상대방 마음에 신경 쓰도록 하는 감정의 특정한 작용이다.왜 어떤 사람은 다른 사람 마음에 더 신경을 쓸까? 사회 내 위계가 사람의 감정을 불공평하게 표출하도록 만들기 때문이다. 따라서 누군가의 감정을 읽는다는 것은 한 사회가 감정을 처리하는 특정한 규칙을 다루는 일이고, 동시에 감정을 권력의 작동을 들여다보는 렌즈로 사용함으로써 한 사회 내부에 층층이 쌓여 있는 위계를 읽어내는 일이다. 이 책이 “한국사회의 감정 문화에 대한 비평”이면서 한국사..
한국 문학은 젊은 비평가를 어떻게 관리해 왔는가 ‘지식인-비평(가)’의 시대가 국가, 민족, 공동체, 집단 주체라는 단위를 통해 문학을 재단함으로써 작품의 개별성과 복수성을 박탈해 왔고, 이를 기존 비평의 무능으로 평가하는 입장이 등장합니다. (중략)그리하여 각 작품의 분석적이고 세밀한 읽기를 통해 ‘공동체’의 윤리보다 ‘개별자’의 도덕을 강조하는 2000년대 전후의 ‘작가-비평가’가 출현합니다. (중략)젊은 평론가들을 고정 멤버로 하여 신간들에 대한 서평 콘텐츠를 지속적으로 발행하는 팀이 [주요 출판사에] 있었습니다. 즉 2009년을 전후로 일종의 ‘주니어 평론가 시스템’이 형성되었으며 이 시스템 안에서 활동했던 평론가들은 ‘젊은 평론가’라는 호명 하에 여러 특집 기획에서 함께 묶여 필자로 초대되는 일이 잦았고 이러한 기획들이 여러 번 반복되면서 2..
“난 어쨌거나 좀 더 살아야 해요.” ― 루쉰의 『고독자』를 읽다 루쉰의 소설은 이미 모두 여러 번 읽었지만, 손에 새로운 번역본이 들어올 때마다 어떻게든 다시 읽는다. 이번에 읽은 책은 『고독자』(이욱연 옮김, 문학동네, 2020)다. 이 판본은 2002년 인민출판사에서 특별 간행되었던 것으로 중국 현대 판화의 거장 자오옌넨이 새긴 목각 판화가 삽화로 실린 것이 특징이다. 『아Q정전』(2011), 『들풀』(2011), 『광인일기』(2014)에 이어 네 권째 나왔으며, 번역은 이번에도 이욱연 교수가 맡았다. 차후에 『옛이야기, 다시 쓰다』로 완간될 예정이다. 이 책에 실린 루쉰의 작품은 「복을 비는 제사」, 「비누」, 「장명등」, 「가오 선생」, 「고독자」, 「애도」, 「이혼」 등 일곱 편이다. 역자에 따르면, 루쉰의 두 번째 소설집 『방황』에 실린 작품 중에서 고른 ..
걷기에서 희망을 읽다 집 앞, 당현천 산책길에 사람들이 부쩍 늘었다. 지루한 방바닥 구르기와 답답한 마스크 생활을 견디지 못한 사람들이 몰려나와 물 따라 난 길을 천천히 걷는다. 따스한 봄볕이 마음을 부추기고, 상쾌한 바람이 생기를 가져오며, 살짝 벌어진 꽃들이 기쁨을 일으킨다. 우연히 마주친 이웃과 가볍게 안부를 나누고 반가운 대화를 즐기기도 한다. 우정과 사랑이 곳곳에서 피어난다.프랑스 철학자 로제 폴 드루아의 『걷기, 철학자의 생각법』(백선희 옮김, 책세상, 2017)에 따르면, “모든 이동이 기계화・동력화된” 현대 사회에서 걷기는 “산으로, 숲으로, 들판으로, 바닷가로” 떠나야만 할 수 있는 “특별한 활동”으로 받아들여진다. 그러나 ‘걷기’는 “인간의 기본적 몸짓, 세상에 존재하는 본래적 방식”이다. “오래 걸을수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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