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잡문(雜文)/걷는 생각

정답과 재치, 수능을 마친 청년들에게

대학수학능력시험이 있었다. 코로나19 팬데믹으로 인한 불편과 고통을 겪으면서, 시험을 치른 학생들이 참 대견하다. 모두에게 똑같이 주어지는 시험의 세계는 끝났고, 비로소 스스로 삶의 경로를 정할 수 있는 자유가 생겨났다. 주변의 도움과 충고는 있겠으나 이제 인생은 온전히 자신의 것이다.

스무 살 무렵엔 시험이 앞날의 인생을 크게 좌우하는 것처럼 느낄 수 있다. 그러나 인생 경로는 우발적 사건으로 가득해 어떤 인생도 지금 생각하는 것대로 이루어지지 않는다. 나 역시 스무 살 때에는 인터넷이 생길 줄 몰랐고, 국가 부도가 날 줄 몰랐고, 휴대전화가 나올 줄 몰랐고, 인공지능이 등장할 줄 몰랐고, 코로나19 팬데믹이 있을 줄 몰랐다.

인생은 시험과 다르다. 문제는 끝없이 던져지지만, 준비된 답으로 해결할 수 있는 경우는 드물다. 인생에는 기존 규칙, 즉 정답이 사라지는 바람에 길 없는 길을 선택할 일이 자주 벌어진다. 적응할 시간을 주면 다행이나, 많은 경우 이번 팬데믹처럼 불시에 닥쳐온다.

따라서 인생을 잘 살려면 두 가지 역량이 필요하다. 첫 번째는 이미 해결된 문제를 주어진 규칙대로 처리할 수 있는 힘이다. 정답이 존재한다면 헛되게 힘을 낭비할 이유는 없다. 이 힘은 각자의 전문 영역에서 좀 더 배움을 쌓으면 얻을 수 있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아무런 답도 보이지 않아서 자유를 행해야 할 때 그 선택을 감당할 수 있는 힘이다. 이탈리아 르네상스 시대의 작가 보카티오는 데카메론(민음사 펴냄)에서 그 힘을 재치라고 불렀다.

르네상스는 항상 신이 정답을 내려주는 세계에서 인간이 스스로 답을 찾는 세계로의 이행이다. 한 해 만에 피렌체 인구의 절반가량을 죽음에 몰아넣은 흑사병을 겪은 후, 보카치오는 이 사실을 깨닫고 데카메론』에서 신이 아니라 인간을 중심으로 하는 100가지 이야기를 펼쳐낸다.

그중 단연 빛나는 인물들은 순간의 기지와 현명한 대답으로 무사히 삶의 덫을 탈출하는 인물들이다. 위선적 회개로 성자로 추앙받은 위대한 조롱꾼 차펠레토, 불륜을 들켰으나 남편에게 충실히 봉사하고 남은 정열로 사랑을 베풀었다는 변론으로 승소한 필리파, 밀회 현장에서 끌려 나왔으나 머리 숙여 속죄하는 대신 고개 들고 수녀원장의 비리를 폭로해 자유를 얻는 어린 수녀 이사베타. 인간 본역의 욕망과 세속적 가치를 대변하는 이들은 날렵한 처세술로 닥쳐온 불행을 발랄한 기쁨으로 바꾸는 데 성공한다. 이것이 우리의 삶이다.

인생이란 결과를 예측할 수 없는 무정형의 세계에서 생겨나는 일들에 지혜롭게 대응하면서 꾸준히 내일을 만들어 가는 것이다. 정답 있는 세계에서 얻은 점수가 정답 없는 세계에서 살 인생을 결정하지는 못한다. 자유의 세상에서는 경직된 정답보다 유연한 재치가 더 중요하기 때문이다.

시험은 끝났다. 이제 우발성으로 가득한 세계에서 각자의 자유로 좋은 삶을 이룩해 가야 할 시간만 남았다. 모두의 행운을 빌고 싶다.

 

조반니 보카치오의 『데카메론』(박상진 옮김, 민음사, 20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