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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론과 서평/소설 / 희곡 읽기

사랑의 고고학 ― 잃다, 파다, 스며들다

 

김한아 소설집, 『사랑을 말할 때 우리는』(알마, 2020)



이 책에 실린 작품들은 ‘사랑의 고고학’을 실천한다. 작가는 언어의 섬세한 솔질로 기억의 지층을 굴착해 사랑의 흔적을 발굴한다. 열세 살에서 열여덟 살까지, 어린 나이에 주로 첫사랑의 형태로 파묻힌 이 사랑은 퀴어의 형태로 존재하기에 낯설고 두렵고 들끓고 뜨겁고 위험하고 조심스럽다.

이 책에 담긴 청소년 퀴어 서사를 꿰뚫는 동사는 세 가지, ‘잃다, 파다, 스며들다’이다. 소설의 화자들은 모두 상실 이후를 살아간다. 「우리들의 우리들」의 은푸른하늘은 아빠가 없고, 「어리고 젊고 늙은 그녀들 스미다」의 서해림은 엄마가 세상을 떴고, 「사라지는 사라지지 않는」의 강희는 친구를 영원히 잃었고, 「사랑을 말할 때」의 장한나는 언어를 빼앗겼다. 사랑과 상실의 결합은 에로스를 더 애타게 하지만, 투사할 대상을 잃은 주체의 우울도 똑같이 깊게 한다. 

사랑과 상실의 정체를 해명해 보려는 마음이 두 번째 운동, 기억의 흔적을 모으고 되새기고 파고드는 운동을 일으킨다. 겉면의 인간 안에 있는 속살의 인간을 이해해 보려는 이 운동이야말로 인간을 성숙하게 하는 과정이다. 인간의 진짜 모습은 내면의 빛이 반짝이는 영역에 있다는 것, 이 웅숭깊음을 정직하게 응시하고 수용할 수 있을 때 비로소 아이는 어른이 된다. 소설의 화자들은 모두 기억의 지층을 파고들면서 ‘망각’에서 ‘발화’로, ‘침묵’에서 ‘대화’로, ‘죽음’에서 ‘불멸’로 움직여 간다. 잃은 후에 비로소 시작할 수 있었기에, 이 과정은 너무나 아프고 안타깝다.

상처를 핥아 위무하고 화자에게 살아갈 힘을 주는 것은 ‘스며드는 운동’이다. “냄새는 서로의 마음에 스미는 법”이고, ‘희’라는 이름은 “살갗에 스미는 느낌”이며, “옅은 어둠이 입김에 날리는 목탄처럼 부드럽게 흩어져 하늘에 스며”든다. 서로의 삶에 대해, 서로의 마음을 향해 스며드는 운동이야말로 사랑의 존재 형식이고, ‘홀로’를 ‘함께’로 만드는 마음의 진동이다. 엄마를 잃고 방황하는 소녀 서해림과 트랜스젠더로서 두 번째 삶을 살아가는 실험 고고학자 스미 씨, 광주의 상처를 안고 살아가는 응애 여사가 세대를 가로질러 밥상 공동체를 이루는 「어리고 젊고 늙은 그녀들 스미다」는 감동적이다. “말하는 사럼은 진심이제만 듣는 사럼이 고것이 진심이 아니라고 생각해 불먼 안 믿제. 애간장 타들어가도록 말해도 안 믿어. 그런 시상은 치가 떨린당께.” 이로써 광주의 서사가 퀴어의 서사가 만나 “우리들의 우리들”을 이루게 되었다.


김한아 소설집, 『사랑을 말할 때 우리는』(알마, 2020)의 추천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