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해나의 「스무드」(현대문학 2024년 10월호)를 읽었다. 여러 면에서 독특한 소설이다.
일단, 콜라주 기법. 여러 책에서 가져온 모티브 또는 세상 이해가 겹겹이 서사에 결합되어 있다. 이창래의 『네이티브 스피커』에 나오는 아버지, 한병철의 『아름다움의 구원』에 나오는 제프 쿤스와 매끄러움 비판, 노리나 허츠의 『고립의 시대』에 나오는 외로움 인식, 여러 코미디에서 외국인을 대하는 한국인의 행태를 풍자하는 데 흔히 등장하는 ‘두 유 노우’ 밈 등이 이 한국계 2세의 서울 오디세이아에 틈틈이 박혀서 서사적 건축물을 쌓아올린다.
게다가 한국 소설에선 흔하지 않은 성찰 깊은 블랙 코미디 기법도 흥미롭다.
화자는 듀이, 한국계 미국인으로, 미국에서 태어나 자랐다. 아버지 용복은 한국과 일말의 연도 남기지 않으려는 이주 1세대이고, 어머니는 한국인 입양아 출신이다. 한국이라면 무조건 치를 떠는 아버지 탓에 듀이는 한국어도 못하고, 한국 음식을 먹은 적도 없으며, 한국에 관해서도 전혀 알지 못한다.
어릴 때부터 한국을 잊고 무시하도록 자라난 듀이가 제프의 작품 전시 준비를 위해 한국에 도착하는 순간부터 이야기가 시작된다. 이 작품을 지배하는 정서는 어색함이다. 이 세계에서 뿌리 뽑힌 채 홀로 존재하는 듯한 기분과 그에 따른 근원적 외로움이다.
작품은 철저하게 듀이의 1인칭 시점으로 전개된다. 일단 그는 한국이 “뱀술이나 개고기를 파는 상점이 즐비한 우범지대, 낡고 부서진 건물들”이 가득한 저개발 국가가 아니라 거리는 잘 정비되고 청결하며, 고층 건물들과 차량이 가득한 초현대적 나라라는 사실을 알면서 계몽된다. 하지만 진짜 계몽은 겉보기엔 완벽한 한국인인 그가 진짜 한국인들과 접촉하면서 생겨난다.
먼저 듀이가 만난 이들은 서울의 최상급 주상 복합 아파트 건물에서 전시를 준비하는 사람들이다. 이 고급 아파트는 주민들과 그들이 허가한 사람들 말고 다른 사람들은 전혀 출입할 수 없다. 제프의 작품 「스무드」도 이 건물 안 전시장에서 철저히 그들을 위해서 전시된다.
“스테인리스스틸을 매끈하게 세공한 검은색의 구”인 제프의 작품 「스무드」는 분노도 불안도 결핍도 없는 매끈한 세계를 상징한다. 이 작품은 언제든 미슐랭 셰프의 요리를 즐길 수 있는 이 고급 아파트 주민들의 부르주아 취향을 반영한다.
이 안으로는 매끄러운 동시에 바깥과는 완전히 단절된 세계는 오늘날 양극화되고 격차에 따라 분열된 한국 사회를 상징한다. 특히, 아파트마다 암호문이 달리고 차단기가 내려진 게이티드 커뮤니티, 즉 바깥과 단절된 자신들만의 고립된 유토피아를 구축하려 하는 서울 중상층 전문직들의 세계 인식을 선연하게 드러낸다. 듀이는 생각한다. ‘대단히 차별적이군. 한국은 이런 나라인가.’ 그런 나라다. 이 격절과 차별이 문제를 일으킨다.
공식 업무를 처리한 후 시간이 남은 듀이는 궁궐 산책을 위해 이 매끄러운 세계에서 벗어나 바깥으로 나선다. 그때부터, 다른 한국, 그러니까 웃을 수도 웃지 않을 수도 없는 기묘한 한국이 그의 눈앞에 출현한다.
매끄러운 세계에 있을 때, 화자는 “Do You Know~~” 공세 탓에 다소 괴로워하면서도 크게 불편하지 않았다. 김치도, 묵도, 매운 갈비찜도, 감 셔벗도 단지 입맛에 안 맞았을 뿐이다. 그러나 거칠고 울퉁불퉁한 거리로 나가는 순간, 매끈함 속에 감춰졌던 것들이 겉으로 드러나기 시작한다.
“한국의 국기를 ‘타이극기’라고 부르며, 집 안에서 신발을 벗어야 한다는 것 따위”밖에 모르는 듀이는 휴대전화에 의존해 종로 거리를 헤매다 배터리가 방전되자 그만 패닉 상태에 빠진다. 그는 “동선이 복잡한 갤러리 같”은 거리, 이질적 문화가 서로 뒤섞인 채 카오스처럼 뒤엉켜 있는 거리에서 갈팡질팡 헤매다 그만 길을 잃는다.
그러다 우연히 “성조기와 ‘타이극기’를 든” 행렬을 마주치면서 마음 놓고 다가서서 묻는다. “왜 성조기를 들고 있는 거죠? 지금 어디로 가는 거예요?” 그러나 영어로 물어보는 듀이와 소통할 수 있는 사람은 그 안에 없고, 대화는 자꾸 어긋나면서 그는 시끄러운 노래와 확성기 소리가 웅웅대는 ‘축제장’으로 가게 된다. ‘축제장’은 앞에는 산이 있고, 뒤에는 청동상에 세워진 넓은 광장이다.
‘고령화 사회’답게 노인들이 대다수인 이 ‘축제장’에서 듀이는 생전 처음 따뜻한 환대를 맛본다.(때때로 거리를 지나는 사람들에게 이유를 알 수 없는 경멸 어린 눈길도 받지만 말이다.) 이곳에선 도시락도 무료로 나누어 주고, 휴대전화도 공짜로 충전해 주고, 모두 따뜻한 얼굴로 ‘미국인’인 그를 맞이한다.
듀이를 구원한 것은 온몸에 태극기를 두른 ‘애국’ 노인 ‘미스터 김’이다. 대구 토박이로 미군에게 치킨을 팔면서 영어를 배운 그는 어설픈 영어로 듀이와 대화를 주고받는다. 그러나 영어를 잘 못 알아듣는 김 노인 탓에 대화는 자꾸 엉뚱한 방향으로 흐르기만 한다.
드문드문, 그러나 오해로 점철된 이 대화를 통해 작가는 이 ‘축제장’을 밑바닥에서 떠받치는 깊은 비애를 보여준다. 외로움이다. 아들들 사진을 보여주면서 그리움에 젖은 김 노인에게 듀이는 묻는다.
“이분들도 당신과 ‘대구’에 살고 있나요?
그들은 ‘서울’에 삽니다. 하지만…… 만나지 못합니다.
왜요?
내 물음에 미스터 김은 선글라스를 벗고 눈가를 문질렀다. 무뚝뚝한 입매와 달리 그의 눈은 맑고 순했다. 뜸을 들이다 그는 슬픈 표정으로 말했다.
알 수 없습니다.
미스터 김이 한국어로 무어라 웅얼거리며 말을 이었다. 말소리가 뭉개져 명확히 알아들을 수 없었지만 나는 그의 묵음을 이렇게 유추해 보았다.
하지만 안다고 해도 달라지는 건 없겠죠.”
내내 어긋나던 대화가 이 순간, 서로 통한다. 그 이유는 듀이가 그의 얼굴에서 때때로 자기 얼굴에 떠올랐던 표정을 보았기 때문이고, 그의 외로움에서 자기 속에 있는 외로움, 뿌리 뽑힌 마음이 가져온 서걱댐을 마주했기 때문이다. 그 소외감의 근원엔 속내를 절대 내비치지 않는 아버지가 있었다.
듀이의 아버지는 아들은 어떻게든 완벽한 미국인이 되기를 바라면서 강제로 뿌리를 끊어냈다. 어릴 때 듀이가 아버지 서재에서 할아버지 사진을 보고 기뻐했을 때, 아버지는 그 사진을 빼앗아 눈앞에서 갈가리 찢었다. 독한 마음을 품고 그는 한국어도 가르치지 않았고, 한국 음식도 먹지 않았다. 그러나 듀이는 이런 아버지를 전혀 이해하지 못한다.
“아버지는 의뭉스러운 사람이었다. 늘 속내를 감추었고 무얼 물어도 제대로 된 답을 해준 적이 없었다. 침묵과 불통, 묵인만 이어지는 집이 점점 지겨워졌다. 아버지의 메시지에는 답을 하지 않았다.”
그러나 ‘축제장’에서 듀이는 지극한 환대를 맛보면서 자기가 진짜 바라왔던 걸 깨닫는다.
“당신에게 무척 고맙다고 전해달랍니다. 당신이 아주 소중하대요.
타인에게 그런 말을 들은 건 처음이었다. 가족에게도 들어본 적 없는 말이었다. 감정의 가느다란 실금이 점차 갈라졌고 뜨거운 무언가가 그 바깥에서 울컥 밀려 들어오듯 온몸이 달아올랐다. 이건 민망함일까, 뭉클함일까. 말로 표현하기 어려웠다.”
이것이 디아스포라 이주민으로 외롭게 살아가면서 듀이가 원했던 것이다.(그는 제프의 스태프 중에서 유일한 동양인이다) 그와 마찬가지로, 이 기묘한 ‘축제장’에 모인 사람들은 모두 사랑이 절실하고 뿌리 내릴 사회 공간이 필요한 사람들이다.
“아버지는 내게 한국 얘기를 한 번도 해준 적이 없어요. 나는 아버지에 대해서도 잘 몰라요. 아버지의 나라를 전혀 알지 못해요. 그래서 아버지와 나 사이에 갈등이 없는 거겠죠. 서로를 전혀 모르니까요. 알려고 하지 않으니까요. 그래서…….
목소리가 떨렸다. 빗장뼈 부근에 알 수 없는 통증이 일었다.”
이 통증 덕에 이 ‘축제장’의 실체를 전혀 모르는 그는 중년 여성이 내미는 어떤 명부에 “한국에 온 것을 기념하기 위한” 서명을 남기고, 가슴에 (누군지 모르는) 군복 입은 한국 대통령 배지를 달고 “좋은 사람들”과 함께 깃발을 흔들면서 축제를 즐기게 된다. 아울러 성조기와 타이극기가 교차하는 그림이 새겨진 배지를 아버지 생일 선물로 챙기고, 더 이상 제프의 인종차별적 비아냥에 반응하지 않게 된다.
한 편의 블랙 코미디 같은 이야기는 여기서 끝난다. 작가는 이질적인, 그러나 완전히 익숙한 눈 하나를 태극기 부대 속에 던져넣음으로써 그 시끌벅적한 ‘축제장’을 휘감은 정서를 잡아낸다. 감정이 이성을 지배한다. 이들은 정치적 신념 때문에 모인 게 아니라 외로워서, 소속감을 얻고 싶어서 여기에 모여 있다. 이 익숙한 사회적 통찰을 깊이 공감이 가면서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게 만든 건 작가적 재능일 것이다.
뒷이야기도 저절로 떠오른다. 과연 듀이의 아버지는 박정희 배지를 가슴에 단 아들이 내미는 타이극기 배지를 선물로 받으면 어떤 반응을 보일까. 불같이 화를 낼까, 아니면 어이없어 실소할까. 어느 쪽이든 선물은 대화(갈등)를 낳고, 상대에 대한 관심으로 이어져 결국 “유대와 소속감”을 우리 안에 돌려줄 것이다.
경멸과 조롱만으로는 ‘타이극기 부대’를 해산할 수도, 박멸할 수도, 위축시킬 수도 없다. 무시와 질타를 넘어 극진한 환대를 통한 대화를 이어가지 않는 한 타이극기 부대가 극우 비즈니스 업자들의 꾐에 넘어가 광화문 광장을 점거하는 걸 막을 수 없다. 소속감을 잃은 이들이 소속감을 얻으려 모이는 걸, 유대와 사랑을 빼앗긴 이들이 곁을 얻으려고 나란히 앉는 걸 어찌 가로막을 수 있겠는가.
겉으로 드러난 것이 아니라 감추어진 것을 바라볼 때, 결국 우리는 분쟁과 내전의 암울한 그림자를 걷어낼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이 문학의 해결책이다. 어떻게든 인간을 사랑의 존재로 되돌리려 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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