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쩌면 내가 우울해지는 가장 주된 이유일 수 있는 내 감수성은 내가 작업물을 내놓을 수 있는 이유이기도 하다. 상투적으로 보일지도 모르지만, 내 취약성은 사실 나의 가장 강력한 무기이다. 내 경계에는 구멍이 많다. 내 피부는 벽이 아니다. 외부에 있는 것은 쉽게 흘러 들어올 수 있고, 내부에 있는 것은 항상 나갈 길을 찾는다. 작품을 만들기 위해서는 세계와 자신 사이의 이런 끊임없는 교류가 필요하다. _ 에바 메이어르(Eva Meijer), 『부서진 우울의 말들 : 그리고 기록들』, 김정은 옮김(까치, 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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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바 메이어르(Eva Meijer)는 네덜란드의 소설가이자 철학자이고 화가이자 가수이기도 하다. 한마디로, 다재다능한 사람이다. 국내에는 개인 경험과 철학적 사유를 가로지르면서 우울증에 관한 사적 탐구를 기록한 『부서진 우울의 말들 : 그리고 기록들』과 동물의 의사소통 행위를 통해 그 내면을 재구성해 가는 과학 교양서인 『이토록 놀라운 동물의 언어』(까치, 2017)이 출간되어 있다.
이 글은 이영주의 에세이 「수영장에서」, 《현대문학》 2024년 10월호를 읽다가 밑줄 그은 문장이다. 작가들은 책 어딘가에 자신이 왜 글을 쓰는지, 어떻게 해서 쓸 수 있는지, 글쓰기가 자기 몸과 마음을 어떻게 바꾸었는지 같은 질문에 대한 답을 남긴다. 예부터 나는 이 답을 얼마나 그럴듯하게 하느냐를 보면 작가적 재능을 알 수 있다고 생각해 왔다. 좋은 작가는 글을 쓸 때는 설령 영매 들려서 쓰더라도, 글을 쓰고 나서 돌아볼 때는 반드시 웅숭깊은 사유가 깃든 문장으로 자기를 표현할 줄 안다.
에바 메이어르에 따르면, 작가란 약한 피부를 두른 존재다. 그는 세계를 받아들이기도, 자신을 흘려내기도 좋도록 액체 상태로 존재하는 법을 안다.
이 에세이에는 또한 글이 어떻게 자신을 변형하는가에 대한 이영주의 답도 실려 있다. “인간은 문장을 쓰면서 그 문장을 닮아간다. 그는 그것이 신비로웠다. 우울한 사람들은 예민하고 감수성이 넘치며 세상과의 대립을 숙명처럼 받아안고 간다. 하지만 그것이 주는 괴로움도 잘 알고 있다. 예민하고 섬세하게 문제를 받아안는 능력. 그것이 주는 고통. 그런 면 때문에 더욱 자신을 아낀다. 자신을 아끼는 방식이 오로지 자기만 생각하는 이기심으로 빠지기도 한다. 그것은 슬픈 이기심이다. 위험 신호를 자신에게 보내는 것일지도 모르니까. 그 위험신호를 자기만 깨닫고 있는 것을 무의식적으로 알을지도 모른다. 주변에 알리고 싶은 마음과 주변에서 몰랐으면 하는 양가성이 내부를 휘어 잡는다. 양가성은 인간의 복잡한 특성이다. 긍정과 부정이 뒤섞여서 기묘한 욕망이 된다. 가끔 그는 자신이 누군가를 수동 공격하는 것을 깨닫고 소스라치게 놀란다. 사랑하고 있지만 증오한다. 사랑한다고 말하고 싶지만 상관없는 지점을 공격한다. 함께하자고 손을 내밀고 싶지만 엉뚱한 부분에서 손을 뺀다. 그는 그런 사람을 여럿 알고 있다. 그들은 취약하고 슬프고 잔인하며 아름답고 약간 미쳐 있다.” (18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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