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잡문(雜文)/걷는 생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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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하철 소리 풍경 휴대전화의 이어폰이 무선으로 바뀌면서 지하철 등에서 민망할 때가 많다. 입술 앞에 휴대전화나 마이크가 없어서일까. 사람들 목소리가 저절로 커지면서, 본의 아니게 옆 사람 사생활을 생방송으로 듣곤 한다. 일종의 환지통 같은 것일지 모른다. 통화하는 본인은 소곤거린다고 느끼는 것 같다. 하지만 물리적 실체를 느낄 수 없다 보니 저도 모르게 존재하지 않는 마이크를 향해 소리를 지르는 것이다. 창피한 줄 모르고 지하철 한 칸이 다 들리도록 말이다. 인간은 도구를 사용하고, 도구는 인간을 바꾼다. 나로서는 아직 무선 이어폰을 사용해 본 적은 없으나 비슷한 일을 겪을 때마다 다짐하곤 한다. 유선 이어폰이 모조리 사라지면 몰라도, 저걸 쓸 일은 없을 거라고. 선이 없을 때 편리한 점도 없지는 않겠지만, 공중장소에서 ..
수다 중독 수다란 무엇인가. 미국의 언론학자 피터 펜베스에 따르면, “어떤 가치 있는 것도, 중요한 것도, 흥미로운 것도 포함되지 않는 이야기”를 말한다. 말 자체는 한없이 계속될 수 있다. 한가한 주말 오후 별로 안 친한 지인과 일없이 만났을 때처럼, 친목 모임에서 자리에 없는 사람들 뒷담화로 시간을 죽일 때처럼, 페이스북이나 트위터나 카카오톡 단톡방에서 문장이 흘러갈 때처럼, 시간이 닿는 한 말은 영원히 이어질 수 있다. 하지만 체력이 다할 때까지 이야기를 나누어도, 수다는 아무것도 남지 않는다. 의미 있는 말은 사실상 한마디도 주고받지 않기 때문이다. 아무것도 말하지 않으려고 모든 것을 이야기하는 아이러니가 이로부터 생겨난다. 상대방이 자기 인생에서 그다지 중요하지 않음을 표시하려고 한시도 쉬지 않고 입을 떼..
인공지능의 대가가 삶의 마지막에서 깨달은 것 “언제나 계산하고 모든 것을 숫자로 보는 태도는 우리 내부에 진실로 존재하는 것을 좀먹어요. 우리한테 진정한 삶을 살게 해 주는 사랑을 질식사시켜요.”조용한 산사에서 타이완의 싱윤 큰스님이 말한다. 눈물을 흘리며 듣는 사람은 구글차이나 설립자이자 창신그룹 회장인 리카이푸. 『AI 슈퍼파워』(이콘)의 한 장면이다. 세계적인 인공지능 전문가인 리카이푸는 ‘잘 나가는’ 사람이었다. 카네기멜론 대학에서 공부해 인공지능 연구의 첨단에 있었고, 인공지능 경제가 새로운 발견의 시대에서 빠른 실행의 시대로 전환되었음을 통찰함으로써 글로벌비즈니스의 정점에 섰다. 《타임》 선정 ‘세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100대 인물’에도 들었다. 날개를 단 채 하늘로 오를 것만 같았다. 그러나 모든 것이 한 순간 멈추었다. 2013년..
“벚꽃의 목소리를 들으려면” 나중까지 간직되는 건 깊이 음미된 순간 뿐, 그래서 꽃에는 시가 필요하다 금요일 저녁 퇴근할 때 본 양재천 풍경은 아직 황량하더니, 월요일 아침 출근길에 벚나무가 일제히 꽃을 열었다. 뻗어나간 나뭇가지 사이로 군데군데 검은 흙이 드러난 공원 풍경이, 주말 사흘 만에 붉고 흰 물감을 공중에 흩뿌린 것 같다. 안개가 일어선 듯 는개가 내리는 듯 눈을 감아도 어두워지지 않고 여전히 사물거린다. 헤어져 사흘이면 선비를 눈을 크게 뜨고 보아야 한다고 들었는데, 자연 또한 며칠이면 눈을 떼지 못할 변화를 일으킨다. 하기야 인간에게 있을 법한 일이 어찌 자연에 없겠는가. 습관적 인식을 무너뜨리고 정해진 경로를 이탈한 현실의 도래가 기적이라면, 비루한 일상 탓에 모르는 체 잊고 지낼 뿐 신은 어디서나 목소리를 내고 기..
강의와 강연 봄에는 얼어붙은 입들도 풀리는 것일까. 사나흘에 한 번쯤 도서관 등에서 강연 요청을 받는다. '말하기'와 '듣기' 시즌이 바야흐로 시작된 것이다. 고정으로 하는 일이 있기에 강연을 많이 할 수는 없지만, 강연을 하러 다니다 보면 당황스러운 일이 하나 있다. 이 강연에서 만났던 청중을 저 강연에서 보는 일이다. 강연은 일종의 리듬을 타는데, 비슷한 주제를 이야기하다 보면 분명히 겹치는 부분이 생긴다. 관련한 일화 정도라면 괜찮겠지만, 때때로 분위기 환기에 필요한 농담마저도 같을 수 있다. 한데 강연을 한 차례 들었던 사람이 눈에 띄면, 어떻게 이야기를 풀어야 할까 싶어 시작부터 말이 꼬이는 것이다. 강의와 강연은 다르다. 일반적으로 강의가 똑같은 사람을 대상으로 특정 분야의 지식이나 학문의 방법을 일정 기..
사랑과 정욕 “롤리타, 내 삶의 빛, 내 몸의 불이여. 나의 죄, 나의 영혼이여. 로올리이타. 혀끝이 입천장을 따라 세 걸음 걷다가 세 걸음째에 앞니를 가볍게 건드린다. 롤, 리, 타.” 나보코프의 『롤리타』(문학동네)의 첫 구절이다. 가장 기억에 남는 소설의 첫 문장을 꼽으면, 분명히 열 손가락 안에 들어갈 것이다. 몇 번을 읽어도 울림이 멈추지 않고, 세월이 아무리 지나도 떨림이 지지 않는다.사랑을 하면 인간의 신체는 예민해진다. 비로소 온몸을 어떻게 써야 할지 알게 된다. 혀끝의 미세한 움직임조차 이처럼 선명히 떠올릴 수 있다. 사랑은 우리 신체를 낯설게 만든다. 사랑에 빠지면 몸은 평소와 다르게 움직인다. 사랑이 찾아오는 순간, 등뼈는 곧추 서고, 피부는 일어서며, 핏방울들은 들끓어 오르지 않는가. 그래서 사..
봄은 언제 시작하는가 입춘대길(立春大吉).봄이 나타나니 크게 길하리라. 문에 붙은 글씨가 씩씩하고 정갈하다. 삿된 기운은 그치고, 더러운 먼지는 돌아서라. 강병인 선생의 글씨다. 글자는 뜻을 전하는 수단이지만, 글씨는 인간을 세우는 예술이다. 선생은 기계 글자로 가득한 차디찬 세상을 인간의 글씨가 넘치는 따뜻한 세계로 바꾸는 일을 지금껏 해 왔다. 작은 인연을 기억해 해마다 기운찬 글씨를 보내는 선생으로부터 항상 나의 봄은 시작한다. 나아가 방을 단단히 붙이고, 돌아와 시를 읽으며 봄을 맞이한다.퇴계 이황의 봄은 언제 시작되는가. 근심 가득한 한밤중, 홀로 잠 깨어 서성이는데, 바람이 매화 향기를 뜰에 채울 때다. 기적을 만난 입술이 감탄을 이기지 못하고 시를 이룩한다. 홀로 창에 기대니 밤기운 차가운데(獨倚山窓夜色寒)매화가..
미식이란 무엇인가 한 달에 한 차례, 《대전일보》에 쓰는 칼럼입니다. ‘미식의 시대’입니다. 먹방이 인기를 끌고, 이른바 맛집이 넘쳐나죠. 하지만 맛이란 무엇일까요. 명절을 맞이해서 집집마다 음식이 푸짐하겠죠. 맛의 의미를 한 번 생각해 보았습니다. 미식이란 무엇인가 미식의 시대다. 맛집 탐방은 이 시대의 성지 순례요, 먹방은 이 시대의 복음이요, 음식 평론가는 이 시대의 사도다. ‘알아두면 쓸데없는 신비한 잡학’(알쓸신잡)이라는 이름의 하찮은 정보 목록에도 음식이 한 자리를 차지한다. 그런데 무엇이 맛있는 것인가? 맛의 뿌리는 향토에 있다. 산과 들과 강과 바다로부터 얻은 재료에 갖은 정성을 다하면 충분하다. 흔히 ‘고향의 맛’이라 불린다. 뮈리엘 바르베르의 장편소설 『맛』(홍서연 옮김, 민음사, 2011)에 따르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