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잡문(雜文)/걷는 생각

제2차 문맹 - 컴맹, 앱맹, 학맹, 문해맹

“상승과 하강으로 명징하게 직조해 낸 신랄하면서 처연한 계급 우화.”

영화 평론가 이동진이 「기생충」을 보고 남긴 한 줄 평이다. 불과 아홉 단어로 이루어진 이 문장은 현재 한국 사회 일반의 문해력을 그야말로 ‘명징’하게 보여주었다. “분명 더 쉬운 단어로 대체할 수 있었는데 왜 굳이 저렇게 썼냐” “대중 상대로 글로 먹고사는 평론가는 저런 말 쓰면 안 되죠.”

영화 기생충에 대한 이동진의 한줄평

문해력(literacy)은 글을 읽고 이해하는 능력을 말한다. 이 능력의 높이는 한 사회의 정보 처리 수준을 능력을 ‘신랄’하게 보여준다. 사소한 차이를 측정하려면 정밀한 기계가 필요하듯, 감동도 섬세한 표현을 써야 정확히 담을 수 있다. 비슷해 보여도 다르게 느껴지는 것을 구분해서 표현할 줄 알아야 마음을 제대로 다루는 것이다. 누구나 자기 마음의 주인이 되려면 풍부한 어휘가 필요하다. ‘아이답다’는 느낌도 ‘천진하다’와 ‘유치하다’와 ‘천연스럽다’와 ‘철없다’가 각각 다르다. 단순한 단어만 쓰이는 세상은 단일색상 천으로 ‘직조’된 옷만 입는 몰개성의 지옥이다.

사람들은 흔히 글자를 읽지 못하는 상태만 문맹으로 생각한다. 하지만 평생 태어난 마을을 떠나지 않고 정해진 일만을 하면서 살았던 전통 사회와 달리, 현대 사회에서는 살아가는 데 필요한 정보의 양과 질이 급증하고, 낡은 지식이 새로운 지식으로 빠르게 교체되며, 혁신 기술의 등장에 따른 사회 변동의 폭과 깊이가 심대하므로, 높은 수준의 지적 능력이 갈수록 요구된다. 이에 따라 글자를 읽을 줄 모르는 ‘문자맹’은 간신히 면했지만, 세상 변화의 속도를 따라잡지 못하는 새로운 형태의 문맹이 심각한 사회문제로 대두되는 중이다.

이러한 문맹에는 글은 읽을 수 있지만 정보기기를 다룰 수 없는 ‘컴맹’, 문자는 주고받지만 응용 프로그램은 이용할 수 없는 ‘앱맹’, 수필류의 생활글 정도는 읽을 수 있지만 중등 수준의 지식이 담긴 글은 이해하지 못하는 ‘학맹’, 기초지식 정도는 갖추었지만 전문가의 사고 흐름과 어휘력을 따라잡지 못하는 ‘문해맹’ 등이 있다. 이들은 모두 글자를 읽을 뿐 글을 읽을 수 없는 ‘제2차 문맹’에 해당한다. 

명징과 직조를 둘러싼 논란은 오늘날 한국 사회가 겪고 있는 심각한 정신적 질병을 드러낸다. 자신의 문맹을 깨달았을 때, 수치를 느끼고 학습에 나서거나 배움을 청하지 않고 오히려 화를 내고는 자신을 왜 이해시키지 않느냐면서 우르르 몰려들어 공격에 나선다. 소크라테스한테 독배를 내린 아테네 시민들, 예수를 고발해 십자가에 매단 유대인들, 갈릴레이를 재판정에 세운 이단 심문관들 같다. “감히 알려고 하라.” 이것이 계몽의 표어다. 무지가 드러났을 때, 어떤 태도를 취하느냐에 따라 한 사회의 야만과 문명이 나뉜다. 어느 쪽에 설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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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경제》 칼럼, 이번주에는 ‘명징과 직조’를 둘러싼 논란에 대해 써 보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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