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잡문(雜文)/걷는 생각

88년생 김안나 - 일의 기쁨과 슬픔

88년생 김안나. 

요즈음 화제작이 된 베스트셀러 『일의 기쁨과 슬픔』(창비, 2019)의 주인공이다. 신예 작가 장류진이 쓴 이 소설은 판교 테크노밸리에 있는 스타트업 ‘우동마켓’이 배경이다. 중고거래 전문 앱을 운영하는 이 작품에서는 지난 20년 동안 기업이 시도해 왔던 온갖 업무 혁신의 결과가 적나라하게 폭로되면서 생생한 현실감을 준다. 더없이 불행히도, “회사에서 울어본 적 있어요?”라는 ‘일의 슬픔’의 형태로.

장류진의 『일의 기쁨과 슬픔』(창비, 2019)

“매일, 약속된 시간에, 선 채로, 짧게” 애자일로 업무 진행 상황을 점검하는 ‘스크럼’은 대표의 마지막 일장연설로 항상 길어진 채 끝난다. “수평한 업무 환경을 만들자는 취지”로 시행한 ‘영어 이름 쓰기’는 “데이비드께서 요청하신” 등 은근한 존칭을 즐기는 윗사람들 탓에 어이없게 무력화된다. ‘우동마켓’의 우수 판매자인 ‘거북이알’은 유명 카드회사 직원이다. 회사의 지시를 받고 죽도록 노력해 해외 연주자 방한 행사를 성사시켰는데, 어이없는 이유로 판교로 좌천당하고 급여마저 포인트로 받게 된다. 고객과 직접 소통을 좋아하는 카드사 회장이 개인 인스타 계정을 통해 가장 먼저 연주자 초청 성사 결과를 공지하는 즐거움을 빼앗았기 때문이다.

김안나가 바라는 ‘일과 삶의 균형’은 사장이 입술에 달고 사는 “광고만 붙으면”이라는 ‘지연된 약속’의 형태로만 존재한다. 얼마 전 장병규 4차산업혁명위원장이 “내일 당장 망할지 모르는데, 벤처가 어떻게 52시간을 지키나”라고 인터뷰한 것을 보았는데, 그 삶의 귀결은 고작해야 ‘거북이알’의 황당한 추락일 뿐이다. 그래서 김안나들의 직장은 여전히 한숨으로 가득하다. 심기가 절차를 초월한다. 돈이 법을 압도한다. 어찌 슬프지 않겠는가.

그러나 결혼을 통한 신분 상승을 노리다 실패한 『낭만적 사랑과 사회』(문학과지성사, 2004)의 ‘81년생 유리’나 맘충이 되어 ‘이번 생은 망’해 버린 ‘82년생 김지영’ 등 밀레니얼 세대 언니들과 달리, 88년생 김안나는 한층 야무진 형태로 진화해 있다. 그녀는 “4대보험, 상여금, 특근수당, 연차” 등과 연결된 꿀 같은 정규직 일자리를 포기할 마음이 전혀 없다. 자본주의 체제에 완벽히 적응한 그녀는 ‘감정 없는 계산기’처럼 일과 삶을 정확히 구분하고, ‘받는 만큼 일하고 일하는 만큼 받는다’는 교환 법칙에 철저하다.

영리하게도 김안나는 회사를 떠나거나 바꾸려 하기보다는 차라리 배신해 버린다. 직장을 교묘히 디딤돌 삼아서 작은 즐거움을 약삭빠르게 건져올린다. 어느 날 야근하는 그녀에게 사장은 “광고만 붙으면 후배를 뽑아주겠다”고 위악적 너스레를 떨지만, 사실 그녀는 일이 아니라 콘서트 예매를 위해 남아 있다. 퇴근해서 집에 가면 예매 시간을 지키기 애매했으니까. 내친김에 “공휴일과 주말, 아껴둔 연차를 하루 붙여 삼박 사일을 놀고 조성진 공연도 볼 것”을 꿈꾸며 홍콩행 항공권을 예매한다. 일의 전반적 슬픔에 삶의 소소한 기쁨으로 맞서기, 이것이 88년생 김안나의 생존전략이다.

88년생을 대푯값으로 하는 밀레니얼 세대가 현재 한국사회의 중심으로 진입 중이다. 노동시장에서 가장 높은 비율을 차지하고, 소비문화의 리더가 되어 가고 있다. 이들과 어떻게 일해야 할지 고민한다면, 먼저 이들의 눈부신 생활 감각이 반짝거리는 이 소설집부터 읽어야 하지 않을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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