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전체 글

(813)
앞으로 100년, 세계는 어떻게 될 것인가 코로나19 팬데믹과 함께 20세기가 저물었다. 조짐은 벌써부터 있었다. ​2008년 금융 위기로 신자유주의적 자본주의가 파산했다. 2018년 미국과 중국의 무역 전쟁으로, 짧게는 1990년 이후의 자유주의적 다자주의 무역 질서가, 길게는 1945년 이후로 75년 동안 지속해 온 자유주의적 국제 질서가 쇠퇴기를 맞이했다. ​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략은 ‘짧은 평화’라 불리는 미국 단극체제의 지속 불가능을 알리는 일격이다. 더 나아가 달러 공동체 해체나 인터넷 종언을 알리는 위험 신호다. 귀책이야 전적으로 러시아에 있으나, 해외 금융기관에 맡긴 자금 등이 정치적 사태 때문에 한순간 인출 불능이 되거나, 국제 정보 시스템이 접속 불능이 될 수 있다면 누가 그 시스템을 신뢰하겠는가. 다시 체제 선택을 강요당하는..
서유기 81난 - 인간이 겪어야 할 모든 고난 이야기 서유기는 크게 세 부분으로 나뉜다. (1) 손오공 인생 내력 (2) 현장의 탄생 비화와 취경단 모집 (3) 불경을 얻기까지 벌어진 모험 과정 -> 세 번째 부분이 81난으로 전체 분량의 80% 81가지 에피소드에서 현장이 실제 겪는 고난은 77가지이다. "사부님께서는 걸음마다 어려움이 있고, 곳곳에서 재난을 만나야 하시니." - 재난은 필연이다. "불문에서는 '구구팔십일'의 수를 채워야 참된 도에 귀의하게 되는 법이다." 시련은 열반으로 가는 길이다. - 떠날 때 삼장은 입으로는 불경을 외되, 행동은 그에 미치지 못한 평범한 승려에 불과했다. 손오공 왈, "사부는 외울 줄만 알지, 그 의미를 깨달으려고 하지 않는다!" - 당신은 범어를 붙들고 계시는군요. 도라는 것은 본디 중국에 있는데 서방에서 구하려 ..
모래 위에 쓰인 _ 헤르만 헤세 아름답고 매혹적인 것이 단지 한 번의 입김이고 전율일 뿐이라는 것 값지고 황홀한 것이 잠깐의 우아함이라는 것 구름, 꽃, 비눗방울, 불꽃놀이, 아이들의 웃음, 유리 거울 속 여자의 시선 그리고 많은 경이로운 것들 그것들은 발견되자마자 사라진다는 것 단지 한순간 지속될 뿐이라는 것 그저 향기이며 바람의 흩날림일 뿐이라는 것 아, 슬프게도 우리는 그것을 알고 있다 (중략) ​ 그래, 지고의 아름다움은 사랑스러움은 쇠락하는 것에 끌린다. 가장 값진 것은 언제든 부서질 수 있다. 음악의 소리, 생겨남과 동시에 이미 떠나가고 사라지는 음악의 소리는 그저 흩날리고 흘러가고 뒤늦게 따라가면서 나직한 애도의 기운에 싸여 있다. (중략) ​ 그런 우리에게는 장미 이파리의 이슬이 한 마리 새의 구애가 구름이 희롱하는 죽음..
사랑 - 자크 라캉 과일을 향해, 장미를 향해, 순식간에 불붙은 장작을 향해 뻗는 이 손, 가 닿는, 끌어당기는, 북돋는 그것의 손짓은 과일의 농익음, 꽃의 아름다움, 장작의 타오름과 긴밀히 연대한다. 그런데 이 가 닿고, 끌어당기고, 북돋는 움직임으로 손이 그 대상을 향해 상당히 멀리 갔을 때, 과일로부터, 꽃으로부터, 장작으로부터 한 손이 솟아나 당신의 손을 만나려 뻗어온다면, 그리고 이 순간 당신의 손이 충만하게 여문 과일과 활짝 핀 꽃 속에서, 타오르며 파열하는 다른 손 안에서 응고한다면, 자, 여기서 생겨나는 것, 그것이 사랑이다. ==== 이렇답니다.
지는 싸움 지는 싸움을 하는 것은 어리석지만, 바로 지기 때문에 싸워야 할 싸움도 있을 것이다. 세상은 약은 일만 할 수는 없다. 지는 싸움마저 없으면 아예 싸움이 없을 것이다. 싸움이 있는 것만으로도 얼마나 오지냐? (서정인) 작품과 싸운다는 것은 절망적입니다. 하지만 그런데도 그는 그 싸움을 구태여 멈출 생각이 없어 보였습니다. ===== 『부사스럽게 부사 사전』(yeondoo, 2021)에 실린 독립 기획자 신이연의 「지는 싸움」에 나오는 말이다. 평생 작품에 매진해 온 노소설가의 삶에 필자가 부친 부사는 ‘굳이’이다. 이 책은 김지은, 신이연, 문광용, 이택광, 이석, 강정화 등 서른 명의 필자가 품사 ‘부사’에 대해 쓴 글을 모아 만든 책이다. 문화평론가, 그림 작가, 북 디자이너, 건축 비평가, 도서관 ..
인간은 누구나 ‘아직 최선을 다하지 않았을 뿐’ 갓생(God生). ​ 신(God)처럼 완벽해 모범이 되는 삶을 말한다. 갓생을 사는 이들은 한순간도 낭비하지 않고 늘 부지런히 생산적으로 삶을 꾸려 간다. 그 결과는 사회적 성공, 특히 남들이 부러워할 만한 돈이다. ​ 임태우 감독의 티빙 오리지널 드라마 「아직 최선을 다하지 않았을 뿐」에서 처음 이 말을 접했다. ​ ‘항상 최선을 다하는’ 갓생의 열정적 삶은 ‘아직 최선을 다하지 않은’ 드라마 주인공 남금필의 비루한 삶과 대비돼 역설적 긴장을 일으킨다. ​ 40대 중반의 남금필은 진정한 자신을 찾겠다면서 어느 날 갑자기 멀쩡히 다니던 회사를 때려치운다. 억대 연봉을 버는 웹툰 작가 지망생으로 갓생을 살기로 마음먹은 것이다. ​ 아무런 재능도 없고 꾸준한 노력조차 안 하는 그가 과연 두 번째 인생에서는 ..
추첨제 민주주의 추첨은 투표보다 원초적일 뿐만 아니라 더 민주적이다. 민주주의의 핵심인 임의성이다. 누구나 할 수 있으며, 그 누구도 어떤 누구보다 더 큰 정치적 힘이나 자격이 주어지지 않았다. 또, 민주주의의 핵심은 교체 가능성이다. 위정자를 바꿀 수 있고, 제도를 바꿀 수 있고, 해석을 바꿀 수 있다. 민주주의의 원류 고대 그리스에서는 국정 운영을 맡을 시민들을 추첨제로 뽑았다. 현대 미국 연방 법원의 배심원도 추첨으로 뽑힌다. 자크 랑시에르는 민주주의와 대의제의 위기를 지적하면서 추첨제를 제안했다. 추첨에 의한 정치는 평소 정치의 주체로 호명받지 못한 개인과 집단에게 권한을 부여하는 문을 여는 하나의 열쇠로 작용할 수 있으며, 이 열림으로 인해 연쇄적으로 일어나는 후보군 확장의 흐름은 동물 정치에 유리하다. _ 이..
코로나19 팬데믹과 신자유주의의 종언 코로나19 팬데믹이 습격한 지 세 해째다. 전 세계 사망자 숫자가 605만 명에 이르렀다. 한국도 최근 사망자가 가파르게 증가해 어느새 1만 명을 넘었다. 강력한 ‘사회적 거리두기’로 의료 시스템이 감당할 정도로 감염자 숫자와 확산 속도를 조절했는데도 이 정도였다. 비극적인 일이다. ​ 팬데믹과 서구 국가의 무능 ​ 애덤 투즈 미국 컬럼비아대 역사학과 교수의 『셧다운』(김부민 옮김, 아카넷, 2022)에 따르면, 바이러스는 우리의 생명뿐만 아니라 경제 역시 맹렬히 공격했다. 세계 경제 규모는 20% 이상 급감했으며, 인구 95%의 1인당 평균 소득이 줄어들었다. 청년들 16억 명의 교육이 중단되어 평생 10조 달러의 소득 손실을 볼 것으로 예측됐다. 사상 유례없는 사태였다. ​이 책은 2020년 1월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