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판은 확실히 타이밍이다.
이번 주 출판면은 존 베일런트의 『파이어 웨더』(곰출판)와 조엘 자스크의 『숲이 불탈 때』(필로소픽 펴냄)으로 뒤덮였다.
동해안을 덮친 불 재난의 이유와 원인을 알고,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가를 공론화하기 위해서겠다.
두 책은 초대형 산불에 관한 접근 방식이나 서술 형태가 다르다.
베일런트는 기자답게 자료를 누적하고 화재 현장과 사건 흐름을 중시하는 서술형 문체로 캐나다 앨버타주 포트맥머리 대화재에 접근한다. 15개월가량 지속된 이 대재앙의 주요 국면을 하나도 놓치지 않고 기록하는 문장력이 돋보이는 책이다. 그 묘사와 서술이 너무나 밀도 높고 생생해서 오히려 전체를 조감하기 힘들 정도다.
자스크는 철학자답게 초대형 산불을 개념화하고, 그 원인과 현재 대응 방안의 핵심만 뽑아 진단하면서, 사고를 전환해서 오래된, 그러나 새로운 대안을 알리는 데 집중한다. 분량도 250쪽으로 베일런트 책의 절반에도 못 미친다.
두 책은 모두 인류를 연이어 공포로 몰아넣고 있는 메가 파이어(Megafire, 자스크)나 화염 토네이도(Fire Devil, 베일런트)의 배경에 산업화에 따른 기후 변화가 있음을 새삼 확인해 준다.
조선시대 등에도 흔히 대형 산불이 있었다면서, 이런 산불을 연례 행사 비슷한 것으로 치부하는 이들도 가끔 있다. 하지만 이는 확연한 데이터 차이를 무시하는 인식이다.
기후 변화로 인해 대기는 과거보다 더 건조하고, 온도는 더 높고, 바람은 더 강해지고, 산은 바짝 메말라 있고, 게다가 인공 조림 등의 영향으로 그 구성은 단조로워졌다. 베일런트는 말한다. “지구는 이제 우리가 알던 곳이 아니다. 지난 300만 년간 대기의 상태가 그 어느 때보다 연소에 적합해진, 이 불의 행성은 우리가 만든 결과물이다.”
아울러 숲 바깥의 인간 마을은 온통 석유나 석탄 제품들로 가득하다. 일단 불이 나면, 겉잡을 수 없이 번져가고, 어떤 장비를 동원해도 쉽게 잡을 수 없으며, 그저 비가 오거나 바람이 잦아들 때까지 기다리는 수밖에 없을 정도다. 『파이어웨더』에서 베일런트는 그 참혹함을 눈앞에 보이듯 세밀하게 재현한다.
그러나 숲의 구성을 바꾸는 등 예방 활동을 강화하자는 주장은 쉽게 무너진다. 불로 돈을 벌어먹는 산업들 때문이다. 석유-석탄 등 화석 연료 산업체들, 불이 나야 돈을 버는 소방 장비 업체들, 여러 임업 사업자들은 집요하게 로비를 펼쳐 현재 기조를 바꾸는 데 저항한다.
베일런트는 말한다. “불은 마음도 없고 영혼도 없다. 화재 피해가 얼마나 되고 누가 다치는지도 상관하지 않는다. 그저 불길을 계속 유지해서 가능한 곳 어디든 최대한 넓게 퍼지는 데 집중할 뿐이다. 불의 이런 특징은 대부분의 상업계와 기업 이사회, 주주들, 더 넓게는 식민주의 충동과 비슷하다.” 석유에 대한 탐욕으로 연소와 소비에 전념하는 이들은 지구를 불태우는 호모 플라그란스(Homo Flagrance, 불태우는 사람)의 대표들이다.
불 폭풍이 남긴 재앙을 남김없이 보여준 후, 베일런트는 그 재앙의 자리에서 한 달도 안 되어 다시 솟아난 작고 여린 새싹 하나에서 희망을 본다. 재녹색화(revirescence), 즉 기회만 있으면 다시 살아나는 자연의 특성에 마음을 기대는 것이다.
재녹색화란 표현은 12세기 중세의 여성 철학자 힐데가르트 폰 빙엔의 비리디타스(viriditas) 개념을 이어받은 말이다. 라틴어 비리디타스는 본래 ‘푸름’이라는 뜻이다. 힐데가르트는 이 말을 생물을 자라게 만드는 신비한 힘, 살아 있는 모든 생물을 건강하고, 온전하게 하고, 재생력을 부여하는 내재적 자극이란 뜻으로 썼다. 이 말을 받아들여 베일런트는 호모 플라그란스의 정체성을 벗어던지고 지구의 재생과 쇄신에 신경 쓰는 호모 비리디타스가 되라고 우리에게 호소한다.
자스크의 해법은 좀 다르다. 그에 따르면, 현재 인류는 자연을 바라보는 두 가지 극단적 태도를 보인다. 하나는 자연을 인간 필요와 욕구에 순순히 복종하는 존재로 바라보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자연을 멀리서 인간으로부터 경외받고 관조되는 순수한 존재로 바라보는 것이다.
그러나 초대형 산불은 이러한 두 가지 이상이 더 이상 작동하지 않음을 보여주는 경고등이다. 현대 과학과 기술로 통제할 수 있다는 개입주의도, 산불은 정상적이고 자연스러운 것으로 생물 다양성에 이롭다는 보존주의도 크게 변화한 생태계에서 빈번히 발생하는 메가파이어를 제압하거나 예방하지 못한다. 후자에 가까운 베일런트의 해법 역시 마찬가지일 테다.
자스크는 불을 이용하는 존재인 인류의 등장과 함께 순수한 의미의 자연, 원시적 자연은 사라졌음을 인정해야 한다고 말한다. 자연은 이제 인간과 상호작용을 통해 유지되는 경관으로 변했다. 따라서 북미 인디언들이 정기적으로 작은 화재를 내서 숲을 불태움으로써 생태계 건강성을 유지한 것과 같은 ‘불의 문화’를 되찾아야 한다.
자스크는 말한다. “지속 가능한 문명에 적합한 방식으로 불을 다루고 땅을 경작해 돌보며, 물질적·정신적 양식을 생산하는 행위 사이의 동맹을 되살려야 한다.” 큰 흐름에선 베일런트와 같지만, 자연의 재생력에 눈길을 돌리기보다 그 재생력을 어떻게 우리 문명의 지속가능성과 연결할 것인가를 고민한다는 점에서 살짝 차이가 난다고 하겠다.
어쨌든 두 책 모두 마지막 대안은 추상적이다. 발전과 풍요를 향해 질주해 온 누적된 인간 탐욕 앞에서 선연한 대안이 쉽게 눈에 들어오지 않기 때문일 테다. 하지만 질문을 던지고, 탐색을 거듭하면서, 한 걸음씩 앞으로 나아갈 수밖에 없는 것 아닐까.
=====
이렇답니다.
지브리 놀이 하느라 지구 자원을 낭비한 걸 새삼 반성합니다... 앞으로 안 할게요.....ㅜㅜ


'평론과 서평 > 책 읽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마법, 종교, 과학 - 인류 정신의 삼중나선 (2) | 2025.04.13 |
---|---|
파시즘 체제를 어떻게 막을 것인가 (0) | 2025.04.12 |
탄핵이란 무엇인가 (0) | 2025.04.06 |
다윈주의란 무엇인가 (0) | 2025.04.05 |
마구스(Magus)에 대하여 (0) | 2025.03.1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