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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능력주의의 역사적 기원 황경문 호주국립대 교수의 『출생을 넘어서』(백광열 옮김, 너머북스, 2022)가 출간되었다. 이 책의 주장은 상당히 논쟁적이다. 1 신분 의식은 현대 한국을 특징짓는 주요 요소이다. 고도로 근대화, 산업화한 나라 중에서 한국만큼 학력, 집안, 지역을 따지는 나라는 드물다. 높은 신분 의식과 고위 관료(명문대, 대기업, 언론사 등)를 향한 욕망은 한국 근대화의 고유한 특징 중 하나이다. 2 한국의 근대화는 제2신분집단, 즉 서얼, 중인, 무반, 향리, 서북 출신의 신분 변동에서 가장 뚜렷하게 나타난다. 신분을 향한 현대 한국인의 끝 모를 갈망에는 이들의 욕망이 큰 영향을 끼쳤다. 3 조선 시대 내내, 이들은 아무리 실력이 있어도 절대 높은 자리에 오를 수 없는 조선 특유의 관료제를 통해 억압당했다. 조선의..
파시즘 바이러스 『루이 보나파르트의 브뤼메르 18일』(1852)에서 마르크스는 말했다. “헤겔은 어딘가에서 세계사의 모든 위대한 사건과 인물은 두 번 등장한다고 언급했다. 그런데 그가 잊고 덧붙이지 않은 말이 있다. 첫 번째는 비극, 두 번째는 소극(farce)이라는 점이다.” 비극의 주인공은 프랑스 혁명 직후에 등장한 나폴레옹이고, 소극의 주인공은 1848년 혁명 이후에 나타난 그 조카 나폴레옹 3세다. 마르크스에 따르면, 이 사건은 부르주아의 본질을 폭로했다. “만일 민주주의의 가치(자유, 평등, 박애)를 버리는 것이 곧 경제적 지배력을 유지할 수 있다는 의미라면, 부르주아 계급은 언제든지 그 가치를 차 버릴 준비가 되어 있다.” 새로운 보나파르트인 ‘스트롱맨’ 도널드 트럼프 역시 같은 사실을 드러낸다. “미국의 많..
스파이크, 우리 뇌는 어떻게 작동하는가 (1) 스파이크란 무엇인가? “우리 뇌는 소통을 위해 전기를 사용한다. 신경세포 각각, 뇌 속 860억 개 뉴런 각각이 미세하고 짧은 전압 신호를 전송함으로써 다른 뉴런들에게 말을 건다. 신경과학자들은 그 짧은 신호를 ‘스파이크(spike)’라고 부른다.” 우리는 스파이크를 통해 보고 듣고 느끼며, 생각하고 계획하고 행동한다. “스파이크는 뉴런들이 대화하는 방식이다.”(1-17쪽) 이 대화를 통해 우리의 모든 활동이 이루어진다. (2) 대뇌 겉질과 스파이크 우리 뇌는 크게 겉질(cortex)과 속질(medulla)로 나누어진다. 겉질은 뇌의 외곽 층이다. 우리 대뇌의 겉질에는 다른 어떤 동물의 겉질보다 많은 뉴런이 들어 있다. 스파이크는 그 뉴런들 사이를 오가며 여러 가지 일을 한다. 시각에 종사하는 구..
책을 읽으면 머리가 좋아질까 (1) 생물학적 의미에서 인간의 지적 능력은 약 2만 년 전과 비교해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우리 조상들도 우리만큼 똑똑했다. 우리의 뇌는 여전히 구석기 시대의 (현대적) 뇌와 같다. ​ (2) 변화한 것은 뇌가 아니라 여러 세대에 걸쳐 경험을 축적하고 전달하며 학습하고 활용하는 문화적 역량이다. 기호와 문자의 발명은 인간과 동물의 문화적 역량을 가르는 결정적 사건이다. ​ (3) 정확히 알 수는 없으나, 현재 인간 뇌의 일반적 배선 상태는 구석기 인간의 일반적 배선 상태와 다르다. 문화적 역량은 인간 뇌의 물리적 배선 상태에 영향을 끼치기 때문이다. ​ (4) 인간은 자기 규율을 통해서 집단 및 주변 환경에 더 적응하기 쉬운 방식으로 자신을 길들인다. 뇌를 문화에 맞추어 길들이는 것은 인간 지능 발달에..
쓰기는 언제나 읽기에서 시작한다 글쓰기 전성시대다. 이처럼 많은 이가 온갖 곳에 다양한 글을 쏟아내는 시대는 역사상 없었다. 그러나 정작 좋은 글을 쓰는 일은 쉽지 않은 듯하다. 글쓰기 강좌는 호황을 누리고, 관련 책의 판매 부수도 늘지만, 사람들은 자꾸 묻는다. ‘어떻게 하면 좋은 글을 쓸 수 있을까요?’ 좋은 글을 쓰려면 단순한 요령을 넘어서는 더 큰 배움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글쓰기 사다리의 세 칸』(신혜경 옮김, 밤의책, 2022)에서 프랑스 페미니스트 철학자 엘렌 식수는 글쓰기가 H를 닮았다고 말한다. H는 “글이 오르내리는 사다리”를 말한다. 왼쪽 기둥(I)이 한 언어이고, 오른쪽 기둥(I)은 다른 언어이며, 둘을 이어주는 선이 있다. “글쓰기는 두 해안을 잇는 통로를 만든다.” 글쓰기는 널리 알려진 것과 아직 알려지지 않..
좋은 물건을 만드는 일은 영혼을 단련하는 것과 같다 누구나 자기 일을 통해 자기 자신이 누구인지 배울 수 있다. 집은 짓든, 가구를 만들든, 음식을 요리하든, 경지에 오른 장인은 모두 깊은 영성의 탐구자이기도 하다. 그들의 손길이 닿으면, 일상의 제품은 영혼의 작품이 된다. 물건 만드는 일은 영혼을 불어넣는 일이요, 영적 깨달음을 누적하는 일이다. 좋은 물건을 만나면 경건하고 거룩한 마음이 먼저 일어서는 이유다. 『울림』(니케북스, 2022)에서 독일의 바이올린 장인 마틴 슐레스케는 말한다. “악기를 만들다 보면 특별한 순간들이 찾아온다. 작업실에서 경험하는 거룩한 순간. 그 순간에 나는 삶의 외적·내적 일들을 새롭게, 다르게 지각한다. 단순히 습득된 지식을 넘어서는 경험이다. 나는 모든 사람의 일상에도 이같이 계시의 순간들이 주어질 거라고 확신한다. 우..
비독서 시대 오늘날 글은 읽지만 책은 읽지 않는 현상이 심화하고 있다. 글 읽기와 책 읽기는 다르다. 비독서는 우리 정신에서 많은 것을 소실시킨다. 책은 관조(theoria) 미디어다. 책은 종합적 분석, 비판적 통찰, 느린 지혜, 섬세한 감각을 주고받으려고 진화한 기계다. 독서는 독특한 읽기 양식을 요구한다. 천천히 읽기(Slow Reading), 능동적 읽기(Active Reading), 꼼꼼히 읽기(Close Reading), 다시 읽기(Re-reading) 등을 충분히 훈련하고, 지속적으로 반복 학습하며, 다양한 상황에 꾸준히 적용해 보지 않으면 우리는 ‘읽을’ 수 없다. 독서는 무척 힘들기 때문에, 일단 비독자가 된 사람 중에 스스로 독자가 된[독자로 되돌아온] 사람은 거의 없다. 인간은 (훈련되기 전에는)..
풍경과 인간 풍경은 인간보다 오래 지속될 것이다. 이제 풍경은 종으로서의 자신의 미래 따윈 아랑곳하지 않고 풍경을 파괴하는 인간의 소멸을 기다리고 있다. _하이너 뮐러 ===== 이렇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