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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론과 서평/책 읽기

책 수집가들만 아는 책의 뒷담화

책 수집가에게 양심과 염치는 사치다. 물고기에게 잠수복만큼이나 어울리지 않는 조합이기도 하다.(48쪽)

이 바닥 선수들은 지인이 중고책 전문가랍시고 구하기 어려운 책을 구해 달라고 부탁하면 전혀 귀찮아하지 않는다. 몰랐던 희귀본을 알게 해 준 지인에게 감사하며(오직 마음속으로만), 이런저런 자신만의 경로로 그 책을 찾다가 2권 이상이 나오면 다행이지만, 1권밖에 없으면 그 지인에게 할 말은 딱 하나이다.
“찾아봤지만 내 재주로는 못 찾겠는걸. 미안해.” 그러곤 다음날 배송되어 올 친구가 알려준 희귀본을 기다리면서 ‘터져 나오는 웃음’을 참지 못한다. 물론 양심의 가책 따위는 느끼지 않는다. (98~99쪽)

확 와 닿는 말이다. 

박균호의 『그래봤자 책, 그래도 책』(소명출판, 2021)은 책 수집가들의 무자비하고 비양심적인 세계를 따뜻하고 유쾌하게 다루고 있다. 새벽에 일어나서 읽었다. 선생님께 선물 받은 지는 꽤 되었다. 제목은 재일교포 바둑 기사인 조치훈 9단의 말 “그래봤자 바둑, 그래도 바둑”에서 따 온 듯하다.

‘책에 관한 책’은 너무나 많이 ‘수집’해 두어서, 나로서는, 더 이상 새로운 이야기를 만나기 힘들다. 하지만 여전히 ‘책의 내용’이 아니라 ‘책의 삶’ 또는 ‘책을 둘러싼 삶’을 다룬 글들은 눈길을 끈다. 다른 책 애호가들의 내밀한 목록을 살피고, 분투를 들여다보는 호기심을 자극하기 때문이다. 이 책은 클리앙이나 디시 같은 곳에서 활동하는 독서광들의 세계를 알려주는 에피소드들을 듬뿍 담고 있어서 무척 흥미롭다.

혹여 써 본 사람은 알겠지만, 꾸준히 책 이야기꾼들의 세계에 참여해 시간을 바치고, 자료를 모아 온 내공이 없으면 이런 글을 책 분량으로 써 내는 것은 꿈도 못 꾼다. 책 내용은 검색으로 얼마든지 구할 수 있지만, 책을 둘러싼 에피소드들은 직접 독서광 세계에 뛰어들어 꾸준히 체험하면서, 호기심을 느낄 만한 이야기들을 몸에 새겨 넣지 않으면 글로 나오기 어려운 까닭이다. 게다가 이런 책들은 책을 정말 좋아하는 고수들만 읽는다. 다 아는 이야기로 잘난 체하면 망신살일 뿐이다. 한마디로, 이 책은 ‘독자의 독자’가 쓰는 책이다.

제임스 조이스의 『율리시즈』, 파스테르냐크의 『닥터 지바고』, 김소월의 『진달래꽃』, 백석의 『사슴』, 김기림의 『기상도』, 서정주의 『화사집』 등 많은 책 이야기는 이미 익숙하다. 하지만 『후장 사실주의』 1집(나도 한 권 있다!!), 동서문화사에서 『죄와 벌』, 『인생이란 무엇인가』 등 러시아 문학 번역가도 활약(?)한 채대치(채수동) 이야기 등은 이 책에서 처음 접했다.

당연히 가장 신선한 것은 북케이스, 주석판, 호화 장정본 등을 둘러싼 최근 책 수집가들의 이야기이다.(사실 난 책을 수집하지 않고 모아두었다 적당히 처분하기 때문에 이분들 세계는 잘 모른다. 언뜻 들여다보니 빠져들면, 책에도 나오지만, 부부 싸움의 신대륙을 개척할 듯하다.)

책 수집가들의 생태계에서 떠도는 이런저런 에피소드들은 저자의 책에 대한 애정을 듬뿍 담고 있다. 책에 대한 호기심을 일으키는 촉매로서 좋은 책이다.

ps. 선생의 책갈피 사용법은 나와 똑같다. “띠지 또한 헌책으로 팔 때 가격에 영향을 준다고 들었다. 띠지를 버리는 사람은 광고지로 생각하는 것이고, 소중히 간직하는 사람은 책의 부속물이라고 생각한다. 나의 경우는 이도 저도 아니고 띠지를 책갈피로 사용한다. 물론 다 읽으면 다시 끼운다.”(145쪽) 다만, 나는 책을 되팔지 않기 때문에 띠지가 사라져도 전혀 안타깝지 않다.

ps. 오래전부터 생각해 온 것인데, 책에 대한 책을 낼 때에는 색인이 있었으면 좋겠다. 이런 책을 꾸준히 읽어 온 사람들한테는 좋은 편집 전략이 될 것이다. 분명히 고마워할 테니까.

ps. 이 글은 선생님께서 책을 보내실 때, 내가 페이스북에 올린 포스팅을 보고, 한정판 카렌다시 클라인블루 연필 세트를 함께 보내신 감격에 쓴 글이 절대 아님을 밝혀 둔다.^^;;;   

 

박균호의 『그래봤자 책, 그래도 책』(소명출판, 2021)
박균호 선생님께서 보내 주신 한정판 카렌다시 클라인블루 연필 세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