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잡문(雜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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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답과 재치, 수능을 마친 청년들에게 대학수학능력시험이 있었다. 코로나19 팬데믹으로 인한 불편과 고통을 겪으면서, 시험을 치른 학생들이 참 대견하다. 모두에게 똑같이 주어지는 시험의 세계는 끝났고, 비로소 스스로 삶의 경로를 정할 수 있는 자유가 생겨났다. 주변의 도움과 충고는 있겠으나 이제 인생은 온전히 자신의 것이다. 스무 살 무렵엔 시험이 앞날의 인생을 크게 좌우하는 것처럼 느낄 수 있다. 그러나 인생 경로는 우발적 사건으로 가득해 어떤 인생도 지금 생각하는 것대로 이루어지지 않는다. 나 역시 스무 살 때에는 인터넷이 생길 줄 몰랐고, 국가 부도가 날 줄 몰랐고, 휴대전화가 나올 줄 몰랐고, 인공지능이 등장할 줄 몰랐고, 코로나19 팬데믹이 있을 줄 몰랐다. 인생은 시험과 다르다. 문제는 끝없이 던져지지만, 준비된 답으로 해결할 수 ..
루이스 세풀베다, 지구를 사랑한 소설가 칠레의 소설가 루이스 세풀베다가 코로나19에 감염되어 세상을 떠났다. 『연애소설 읽는 노인』으로 국내에도 잘 알려진 작가다. 평생 독재와 맞서 싸운 자유의 수호자였고, 인간의 탐욕과 무분별한 개발에 맞선 생태주의자였다. 또 “나의 조국은 스페인어”라면서 오로지 문학의 시민이기만을 원한 코스모폴리탄이기도 했다. 한 작가의 죽음에 대한 최고의 애도는 책장에 꽂아둔 책들을 꺼내서 먼지를 털어낸 후 천천히 읽어 나가는 것이다. 인물과 배경을 상상하고, 대화와 묘사를 음미한다. 단어에는 동그라미를 치고, 구절에는 밑줄을 긋는다. 있는 책은 새로 읽어 메모를 더하고, 없는 책은 마련해 마저 읽어 생각의 재료로 삼는다. 한 차례 작품을 모두 읽어 기억의 주름을 깊게 파고 나면, 홀로 천도제라도 지낸 느낌이 든다. 비..
책을 떠나보내면서 매년 연말이 되면, 책을 정리해 동생이 일하는 시골 도서관으로 보낸다. 한 해 동안, 이런저런 이유로 사고 얻고 받은 책이 수백 권. 침실을 작은 방으로 옮겨 안방을 서재로 쓰고 거실 한쪽 벽까지 모두 책장을 세웠지만 더 이상 감당할 수 없다. 책을 겹쳐 꽂을 서가는 이미 없고, 바닥에 쌓고 늘어놓는 바람에 손발 둘 곳이 더 이상 없을 지경이다. 어쩔 수 없이 몇 해 전부터 연말에 한두 달 틈나는 대로 시간을 들여 책을 처분해 왔다. 세 해 이상 들추지 않은 책을 버리라고 하는 이도 있다. 동의하지 못한다. 책은 읽으려고 사는 게 아니다. 어느 날 갑자기 서가의 책 중에서 눈에 띄는 것을 읽는 경우가 더 많다. 요즈음 도서관에선 출간된 지 다섯 해 이상 지난 책은 기증 자체를 받지 않는 경우도 있다고 한..
최고의 노후 준비 고대 인도 사람들은 지혜를 베다(veda)로 보았다. 베다는 ‘보다, 알다’라는 뜻이다. 지혜의 기록인 『베다』는 신들이 보는 것을 기록한 책이다. 지혜는 ‘밝게 보는 힘’이다. 과거는 돌아보고 미래는 내다보며 현재는 들여다보면서, 좋은 것과 나쁜 것, 옳은 것과 그른 것을 가리는 일이다. 수메르 사람들은 지혜를 엔키(enki)라고 했다. 엔키는 지혜의 여신이다. 이 여신은 ‘듣는 신’이다. “하늘 높은 곳에서 여신은 지혜를 받아들이는 자신의 귀를 땅을 향해 열었다.” 지혜란 주의 깊게 듣는 귀, 즉 ‘경청하는 힘’이다. 높은 곳의 소리는 가려듣고, 낮은 곳의 소리는 귀 기울여 듣고, 내면의 소리에는 예민해지는 일이다. 『인생의 아홉 단계』(교양인)에서 에릭 에릭슨과 조앤 에릭슨 부부는, ‘잘 보고 잘 ..
겨울을 맞는 마음 며칠 전, 한밤중에 첫눈이 내렸다. 후배랑 김치전을 곁들여 한잔하는 중에, 어둠 속에서 갑자기 눈송이가 뭉쳤다 사라지는 기분이 들었다. 바깥으로 슬쩍 나가서 손바닥을 공중으로 내밀자 피부에 닿은 눈이 스르르 방울졌다. 자연은 쉬지 않는다. 단 한 순간도 머무르지 않고 절기를 돌린다. 낳고 또 낳는 변화(易)야말로 세상의 이치다. 엊그제가 가을인 듯싶더니, 어느새 “이슬은 서리로, 비는 눈으로” 바뀌었다. 겨울이 온 것이다. 때마침 어제(22일)가 소설(小雪)이었다. 눈 내릴 무렵에 적절히 눈이 온 셈이다. 위스춘의 『시간의 서』(강영희 옮김, 양철북, 2019)에 따르면, 소설과 더불어 “만물의 숨결은 흩어지고, 나고 자람은 거의 멎어 겨울이 온다.” 사나흘 전부터 과연 사람들 옷차림이 두꺼워지더니, 올..
레이철 화이트리드의 「홀로코스트 기념비」(1995) - 비엔나 유대인광장 비엔나 유대인 광장에 있는 레이철 화이트리드의 「홀로코스트 기념비」(1995).이 작품은 책등 대신 책배가 드러난 형태로 책들이 꽂혀 있는 서재를 모형으로 만들어졌다. 제목이 없을지라도 여전히 책은 책이다.자세히 살피면 똑같아 보이는 책배에도 어떤 고유한 표지들이 새겨져 있다.기억한다는 것은 애써 노력해서 한걸음 다가서면서 그 미세한 흔적들을 적극적으로 읽어 냄으로써 성립한다.그런데 이 책들에는 정체를 드러내는 어떠한 이름도 적혀 있지 않기에 우리의 흔적 읽기는 기억의 복원이 아니라 어쩔 수 없이 창조가 된다.6만 5000명의 홀로코스트 희생자 각각을 상징하는 이 책들에 자신의 기억을 바치면서 일종의 저자로서 텍스트를 만들어 참여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좋은 예술이란 사람들의 그러한 행위성을 만드는 실천이..
일을 사랑하는 법 “대체 사람들은 어떻게 자신의 직업을 사랑할 수 있는 걸까?”『열정의 배신』(김준수 옮김, 부키, 2019)에서 칼 뉴포트 조지타운대 교수가 묻는다. 흥미로운 질문이다. 대부분 죽지 못해 일한다. 아침마다 사표를 항상 품에 넣은 채 출근하는데, 먹고사는 일을 열정적으로 좋아할 수 있다니 신기하기까지 하다. 질문의 답은 단 한 줄로 요약된다. “자기 일에 충분히 능숙해질 만큼 오래 일하면 된다.”때때로 대학에 다니는 아이들하고 직업 이야기를 할 때가 있다. 누구처럼 다 자란 아이들 스펙을 챙길 만큼 정신없지는 않지만, 부모 마음에 걱정이 되어 슬쩍 물으면 아이들은 펄펄 화를 날린다. 제 앞가림은 하겠다는 기개에 일단 마음은 놓인다. 어느 날 심각한 얼굴로 “아빠, 나 뭐 하면 좋을까” 하고 물어온다면, 재..
가벼움의 시대 현대 문명은 가벼움에 홀려 있다. 가벼움은 이 시대의 이상적 질서다. 『가벼움의 시대』(문예출판사)에서 프랑스 사회학자 질 리포베츠키가 말하는 바에 따르면, 우리는 가벼움을 “제도적으로 합법화하고 사회적으로 일반화하는 시대”를 살아간다.‘슬림’ ‘심플’ ‘홀로’ ‘쿨’ ‘큐트’ ‘초소형’ ‘초경량’ ‘초간편’ 등 우리를 둘러싼 세계 전체가 가벼움을 찬양한다. 가볍고 얇고 작고 짧은 물건들은 우수함의 증거다. 다이어트와 피트니스는 신체의 궁극적 관리 기술이 된다. 가벼운 몸, 즉 날씬하고 빼빼한 몸매의 생산은 이 시대의 지상명령이다. 혈연이라는 운명의 형식으로 묶인 가족마저 점차 가벼워진다. 대가족은 핵가족으로, 핵가족은 1인 가구로 세포분열 된다. 통계청 발표에 따르면, 2016년 말 1인 가구가 54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