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잡문(雜文)/걷는 생각

최고의 노후 준비

고대 인도 사람들은 지혜를 베다(veda)로 보았다. 베다는 ‘보다, 알다’라는 뜻이다. 지혜의 기록인 『베다』는 신들이 보는 것을 기록한 책이다. 지혜는 ‘밝게 보는 힘’이다. 과거는 돌아보고 미래는 내다보며 현재는 들여다보면서, 좋은 것과 나쁜 것, 옳은 것과 그른 것을 가리는 일이다. 

수메르 사람들은 지혜를 엔키(enki)라고 했다. 엔키는 지혜의 여신이다. 이 여신은 ‘듣는 신’이다. “하늘 높은 곳에서 여신은 지혜를 받아들이는 자신의 귀를 땅을 향해 열었다.” 지혜란 주의 깊게 듣는 귀, 즉 ‘경청하는 힘’이다. 높은 곳의 소리는 가려듣고, 낮은 곳의 소리는 귀 기울여 듣고, 내면의 소리에는 예민해지는 일이다. 

에릭 에릭슨과 조앤 에릭슨,『인생의 아홉 단계』, 송재훈 옮김(교양인, 2019).


『인생의 아홉 단계』(교양인)에서 에릭 에릭슨과 조앤 에릭슨 부부는, ‘잘 보고 잘 듣는 힘’인 지혜를 노년기에 인간이 반드시 갖추어야 할 미덕으로 든다. 두 사람은 인간의 삶을 유아기, 유년기, 놀이기, 학령기, 청소년기, 청년기, 성인기, 노년기, 초고령기 등 아홉 단계로 나눈다. 인간은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단계별로 변화와 성장을 멈추지 않는다. 시기마다 인간이 필연적으로 겪어야 할 갈등과 불안을 이겨낼 경우, 인격의 성장과 함께 미덕을 얻을 수 있다.

노년기의 위기는 절망이다. 노년에 접어든 인간은 쉽게 절망에 빠진다. “박탈당한 시간과 줄어든 공간에 탄식”하고 “약화된 자율성, 잃어버린 주도성, 사라진 친밀성, 홀대받는 생산성”을 한탄한다. “새로운 삶을 시작하고 다른 길을 가기에는 시간이 너무 부족하다는 생각이 절망으로 표출된다.” 절망을 이기지 못한 마음이 울분이다. 세상이 망해 간다고 화를 내거나 자신이 쓸모없다고 비탄한다면 이미 절망에 패배한 것이다.

절망의 반대편에 완결성이 있다. 완결성은 나와 세계가, 나와 타인이, 현재의 나와 과거의 나가 하나로 온전히 이어져 있다는 느낌이다. 노년의 삶에 필요한 것은 손이다. 맞잡은 손이 이룩하는 접촉감은 인생에 풍요로움을 제공한다. “사랑・우정・헌신이 되살아나고, 슬픔은 아프게 짙어지며, 사람들과 맺었던 관계의 아름다움은 마음을 따뜻하게 해 준다. 과거의 기억은 기분 좋게 또렷하고 현재는 자연스러우며 작은 기쁨과 큰 즐거움과 많은 웃음으로 가득해진다.” 

나이 들어서도 여전히 세상과 온전히 접촉하려면 언제, 어떻게, 손을 내밀어야 할지를 아는 “눈치와 친밀성과 감수성”이 필요하다. 눈은 세심히 보고 귀는 조심히 듣고 손은 적절히 내밀 때, 세상과 내가 여전히 하나로 이어지면서 삶이 충만해진다. 이처럼 절망을 이겨내고 완결성을 충족한 사람을 우리는 지혜롭다고 한다. 그런데 노년에 접어들기 전에 이를 위한 사전 준비도 필요한 듯하다.

얼마 전 후배한테 이야기한 적이 있다. 50대의 10년을 어떻게 보내느냐에 따라 늙은이로 남느냐, 어른이 되느냐가 결정된다고. 요즈음 심정이다. 주어진 책무를 소중히 하되 대단한 업적을 이루겠다고 스스로 일을 벌이기보다 흥미로운 일을 시도하려는 후배들을 도우려면 어떻게 할지 더 많이 고민하는 중이다. 성인기 내내 남들을 신경 쓰기보다 어떻게든 홀로 서는 존재가 되려 했다면 지금은 노년에도 이야기를 주고받고 싶은 존재, 접촉을 유지하고 싶은 존재가 되는 법을 더 자주 생각한다. 가족한테 다정하고, 친구한테 친절하며, 선후배한테 겸손한 존재가 되고 싶다. 이것이 최고의 노후 준비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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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경제 칼럼입니다. 여기에 옮겨둡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