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잡문(雜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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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8년생 김안나 - 일의 기쁨과 슬픔 88년생 김안나. 요즈음 화제작이 된 베스트셀러 『일의 기쁨과 슬픔』(창비, 2019)의 주인공이다. 신예 작가 장류진이 쓴 이 소설은 판교 테크노밸리에 있는 스타트업 ‘우동마켓’이 배경이다. 중고거래 전문 앱을 운영하는 이 작품에서는 지난 20년 동안 기업이 시도해 왔던 온갖 업무 혁신의 결과가 적나라하게 폭로되면서 생생한 현실감을 준다. 더없이 불행히도, “회사에서 울어본 적 있어요?”라는 ‘일의 슬픔’의 형태로.“매일, 약속된 시간에, 선 채로, 짧게” 애자일로 업무 진행 상황을 점검하는 ‘스크럼’은 대표의 마지막 일장연설로 항상 길어진 채 끝난다. “수평한 업무 환경을 만들자는 취지”로 시행한 ‘영어 이름 쓰기’는 “데이비드께서 요청하신” 등 은근한 존칭을 즐기는 윗사람들 탓에 어이없게 무력화된다..
대학 가지 않아도 행복한 나라 정부 정책을 집행하는 공무원들은 이상하게도 중대한 문제일수록 잘 해결하지 못하는 특성이 있다. 오랫동안 특정한 정책을 정해진 틀 안에서만 다룬 습벽이 장벽이 돼 혁신적 해결책을 좀처럼 떠올리지 못하는 까닭이다. 입시 공정성의 해결 방법으로 정시 비중을 높이겠다는 최근 정부 방안은 아무래도 미봉책일 뿐 좋은 해결책이라는 생각이 전혀 들지 않는다 한 모임에서 교사들을 만났는데, 정시 비중이 높아질수록 학교수업 전체가 문제풀이 학원이 될 수밖에 없다고 토로했다. 현재의 수능 시험은 현대사회가 요구하는 창의성과 관련이 적으므로 미래 가치가 낮은 데다 현행 학교 교육 과정이 감당하기 어려워 사교육을 부채질할 게 빤하다. 따라서 아무리 따져도 정시 강화는 게으르고 정형화된 사고의 결과일 뿐이다. 2019년 노벨경제..
아내와 10년 여행을 계획하다 요즈음 아내와 나는 들떠 있다. 인생 100년의 절반을 막 지난 아내와 함께 오래전부터 두런두런 이야기해 온 일을 실행에 옮기려 하고 있다. 다리 힘이 더 떨어지고 호기심이 더 줄어들기 전에 앞으로 10년 동안 한 계절에 한 차례씩 중국을 중심으로 아시아 도시 마흔 곳쯤을 골라서 차례로 방문할 생각이다. 주로 주말을 이용해 한 도시에서 사나흘, 또는 휴가를 얻으면 일주일쯤 돌아보려 한다.버스 타고 몰려다니며 잠깐 유명 관광지를 방문하는 관광 여행은 질색이지만 오랜 검색 끝에 찾아낸 '가성비 맛집'이나 '인스타 골목 명소' 같은 식으로 이른바 '현지인 체험'을 즐길 생각도 없다. 짧은 방문에 현지인 어쩌고는 청춘들이나 행할 일로 치부하는 '솔직한 꼰대'가 되는 쪽을 택하려 한다.유명 관광지를 깊게 즐기는 ..
프리랜서 전문가와 잘 일하는 법 때때로 전자우편, 문자, 메신저 등으로 불쑥 강연이나 원고를 청탁받는다. 나로서는 이런 접촉 방식이 다소 어색하다. 신입 편집자 시절, 먼저 문자 등을 보내 연락 가능 시간을 확인하고, 대화를 통해 뜻을 전한 후, 실제 청탁을 진행하는 게 글이나 말을 얻는 정중한 예의라고 배운 까닭이다. 이는 청탁하는 글과 말의 힘을 깊게 존중하는 일이기도 하고, 글과 말의 빚을 더 무겁게 만드는 일이기도 하다. 청탁의 예가 곡진할수록, 아무래도 원고나 강연에 더 신경 쓰게 마련이니 말이다. 또 청탁할 때에는 원고료나 강연료, 지급 방법, 지급 시기 등을 정확히 밝히는 게 당연하다. 청탁받는 이들은 대개 프리랜서 전문가다. 이들한테 원고나 강연은 가욋일이 아니라 먹고삶에 이어지는 노동이다. 내용을 살펴 청탁을 받을지 말..
386세대 적폐론 386세대를 다룬 책이 늘어난다. 산업화의 막내이자 민주화의 중심이며 정보화의 개척자를 자부하는 이 세대가 한국사회의 사실상 적폐로 탄핵받는 중이다. 김정훈・심나리・김항기 등 30대 중후반이 쓴 『386세대 유감』(웅진지식하우스)은 “아무 견제 없이 우리 사회의 제왕으로 군림”하는 이 세대가 “부의 추월차선에 올라타 사다리를 걷어찼다”고 주장한다. “헬조선 탄생을 주동하거나 최소한 가담하거나 방관해 온 386세대의 미필적 고의”에 “‘가해자성’을 물을 시간”이라면서 이들은 이 세대한테 “혁명의 열정을 뽐내는 주체”의 자리에서 내려와 “세대독점의 해소”에 겸손히 봉사함으로써 “혁명을 완결”하자고 말한다. 40대 후반인 이철승의 『불평등의 세대』(문학과지성사)도 진단과 제안은 비슷하다. “좋은 운을 향유”한..
소출판 인플레이션 - 발행종수 8만 종, 실적 출판사 8000개 시대 한국출판문화산업진흥원의 ‘2018년 출판산업동향 보고서’가 발표됐다. 한국 출판산업의 상태 변화 추이를 살필 수 있는 유일한 공식 자료에 해당한다. 국민이 출판 실상을 알 수 있게 정확한 사실을 알리는 게 정부 산하기관의 임무일 터인데, 이상하게도 아무 보도자료 없이 자료실에만 올려 두었기에 내려받아 한 해 동안 출판산업의 변화를 간략히 살펴보았다. 2018년 출판산업은 한마디로 ‘소출판 인플레이션’으로 정리할 수 있다. 전체 산업 규모는 단행본 1조 1698억 원, 교육출판 2조 8244억 원 등 3조 9982억 원으로, 전년 대비 0.1% 상승에 그쳤다. 오래전부터 시장규모는 정체와 하향을 반복하면서 조금씩 줄어들고 있다. 이에 반해 해마다 출판사 숫자는 늘어나고 발행 종수는 폭증 중이다. 2018년..
제2차 문맹 - 컴맹, 앱맹, 학맹, 문해맹 “상승과 하강으로 명징하게 직조해 낸 신랄하면서 처연한 계급 우화.” 영화 평론가 이동진이 「기생충」을 보고 남긴 한 줄 평이다. 불과 아홉 단어로 이루어진 이 문장은 현재 한국 사회 일반의 문해력을 그야말로 ‘명징’하게 보여주었다. “분명 더 쉬운 단어로 대체할 수 있었는데 왜 굳이 저렇게 썼냐” “대중 상대로 글로 먹고사는 평론가는 저런 말 쓰면 안 되죠.” 문해력(literacy)은 글을 읽고 이해하는 능력을 말한다. 이 능력의 높이는 한 사회의 정보 처리 수준을 능력을 ‘신랄’하게 보여준다. 사소한 차이를 측정하려면 정밀한 기계가 필요하듯, 감동도 섬세한 표현을 써야 정확히 담을 수 있다. 비슷해 보여도 다르게 느껴지는 것을 구분해서 표현할 줄 알아야 마음을 제대로 다루는 것이다. 누구나 자기 마..
서울국제도서전을 즐기는 방법 ‘글이 만든 세계’가 펼쳐진다. 다음주 수요일인 6월 19일, 서울국제도서전이 강남 코엑스에서 열린다. 국내 312곳과 해외 41개국 117곳 참여사가 이미 독자를 만날 온갖 준비를 마쳤다. 모바일로 세상 모든 책을 만날 수 있는 세상이지만, 도서전을 찾는 독자들 발길은 해마다 느는 중이다. 인간은 몸으로 살아간다. 표지와 소개 등 곁다리 정보로는 나한테 맞는 책을 얻기 어렵다. 알바노동의 결과이기 일쑤인 인터넷 서평과 댓글은 믿지 못한다. 게다가 남이 읽는 것은 내가 읽은 게 아니다. 종이의 질감, 무게, 만듦새 등은 책을 손에 들어야 느낄 수 있고, 전체 서술이나 구조 등은 책을 훑어야 알 수 있다. 피지컬과 사이버가 적절한 균형을 이루지 못할 때, 인간의 육체는 허약해지고 정신은 공허해진다. 독자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