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잡문(雜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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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쓰기는 우리를 바꾼다 『뉴욕 3부작』의 세 작품에서 화자는 모두 누군가를 추적하고, 흔적을 관찰하며, 그 결과를 꼼꼼하게 공책에 기록한다. 글쓰기는 잊힌 자아를 환기할 계기를 제공할 뿐만 아니라 세계의 진정한 의미를 찾고 싶어 하는 마음을 일으킨다. 처음에 타인의 관찰로 시작된 기록은 사건 진행과 함께 묘하게 자신과 세계에 대한 기록으로 변해 간다. 블루의 말처럼, “길 건너에 있는 블랙을 염탐하는 일은 마치 거울을 보는 것 같은 느낌”을 준다. “그저 남을 지켜보는 것뿐만 아니라 자기 자신을 지켜보는 일도 된다는 사실을 깨달은 것이다.” 현재만 존재하는 뉴욕의 속도에 포섭된 후, 블루한테는 한순간도 자신을 돌아볼 때가 없었다. 블루는 말한다. “그는 지금껏 한 번도 자신의 내면을 이렇게 오래도록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물..
은유 은유(metaphore)는 우리의 앎을 너머(meta-)로 옮기는(perein) 언어다. ​ 우리가 무언가를 안다면, 그 바깥에는 언제나 은유가 있다. 앎이 쌓여서 새로운 앎을 만드는 게 아니다. 은유가 일으키는 신비, 은유를 통해 언표된 앎, 은유에 이끌리는 호기심이 우리의 인식을 이끈다. 인식은 은유 없이 생겨나지 않는다. 시가 있는 한 현실은 혁명 된다.
스무 살에 소설을 읽고, 쉰 살에 소설을 다시 읽어라 학교에 다닐 때 대학 도서관에 틀어박혀서 세계문학전집 한 질을 독파한 적이 있다. 작품마다 담고 있는 세계의 깊이와 넓이가 만만치 않았으나, 이때 힘들여 읽은 경험이 평생의 자산이 되었다. 좋은 소설은 인생을 미리, 심지어 여러 번 살도록 해준다. 타인의 슬픔과 기쁨, 상실과 회복, 고난과 승리를 내 일로 수없이 체험하는 것은 다가올 어떤 인생도 두렵지 않게 만들어 준다. 스무 살에는 반드시 소설을 읽어야 한다. 하지만 소설은 ‘중년의 예술’이다. 요즘 들어 이 말을 실감한다. 몇 해 전부터 한 달에 한두 권 정도 예전에 읽었던 고전 소설을 다시 읽는 중이다. 때때로 옛날에 내가 읽은 건 뭐인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줄거리나 내용을 잘못 기억해서가 아니다. 문학작품엔 스포일러가 없다. 좋은 작품은 결말..
한 역사학자의 죽음 서양사학자 이영석 교수가 세상을 떠났다. 대중한테 이름 높은 ‘미디어 인문학자’도, 연구는 뒷전이고 이른바 ‘활동’에 전념하는 참여파도 아니었다. 전공은 영국 사회 경제사. 평생 남의 나라 역사 한 부분을 좁고 깊게 팠다. 관련 학자들 말고 이름이 알려질 까닭은 별로 없었다. 주변 소셜 미디어 쪽 반응은 달랐다. 다른 분야의 많은 지식인들도 크고 작은 인연을 고백하고, 학문적 일생에 존경을 표했다. “요즘 젊은이들이 책은 읽지 않지만, 페이스북에 실린 글은 읽는다는 얘기를 들었다”라면서, 대학을 정년퇴직한 후 페이스북에서 역사 관련 지식과 통찰을 공유한 까닭도 있을 테다. 자기 공부를 정리한 『삶으로서의 역사』, 코로나19 팬데믹 이후 일상을 성찰한 『잠시 멈춘 세계 앞에서』 등은 그 결과였다. 목소리는..
독서의 가치 _블로그, 잡지, 책 중 어떤 걸 읽는 게 더 좋을까? 평균적인 성인의 독서 속도는 1분에 약 250단어다. 평균적인 블로그 게시글은 약 800단어이므로 게시글을 읽는데 3분 30초가 걸린다는 뜻이다. 그렇다면 그 시간을 들여서 독자는 무엇을 얻을까? 내 경우로 보자면 독자는 저자의 약 사흘치 노력을 얻는다. 일반적인 블로그 게시글 하나를 쓸 때 나는 1.5일을 들여서 해당 주제와 관련된 조사 작업을 하고 다시 1.5일을 들여서 원고를 쓴다. 조사 작업은 주로 책과 기사를 읽는 것으로 채워진다. 해당 분야의 전문가들과 나누는 대화도 포함된다. (중략) 이것이 바로 가치의 교환이다. 독자는 3분 30초를 들여서 저자의 노력을 자기 것으로 소화한다. (중략) 잡지의 기사를 살펴보자. 나
약자의 호소와 권력의 몰락 살려고 일하러 간 일터에서 사람이 죽는다. 광주 현대산업개발 아파트 외벽 붕괴, 양주 삼표산업 골재 채취장 토사 붕괴, 여수 여천NCC 폭발 등 사고가 끊이지 않는다. 안전의식 타령은 그만하자. 위험 감수를 압박하는 현장에서 하루 벌어 하루 사는 말단 노동자의 작업 거부는 어렵다. 아무도 직접 책임지지 않는 현장에 파견된 노동자라면 하소연 자체가 사치다. 그 처지를 모른 체하면 위선자, 못 느끼면 사이코패스다. 그런데도 법은 현장 앞에서 자꾸 멈추고, 정의는 법정에서 자주 반려된다. 태안화력발전소에서 일하다 죽은 비정규직 청년 노동자 김용균 씨 관련 며칠 전 판결도 역시나였다. 원청 대표는 위험을 몰랐다면서 무죄였고, 관련 임직원은 집행유예나 벌금형에 그쳤다. 억울한 죽음에 유가족 한은 쌓여간다. 하소연..
연마와 공부 저는 곡에 대한 공부를 좋아합니다. 모던타임스 레퍼토리를 짤 때는 독일 전기 작가 슈테판 츠바이크의 『어제의 세계』를 탐독했어요. 덕분에 연주 작품의 배경이 더욱 생생하게 떠올랐죠. 곡을 공부한다, 피아노를 공부한다는 말이 어색한가요? 피아노는 기술 연마와는 또 다른, 공부라는 개념이 있다고 생각해요. 스트레칭을 하는 건 연마죠. 저는 밥 먹을 때도 젓가락을 두들겨 가며 리듬감을, 화장품을 바르고 두드릴 때도 리듬감을 생각해요. 이것도 연마에요. 곡을 연습할 때 작곡가의 생애를 찾아보는 건 공부죠. 그 곡을 지금까지 연주한 사람들의 디스코그라피(discography·레코드목록)를 조사하는 것도요. 평소 헤겔, 릴케의 저서와 시를 읽어요. 역사책도 탐독하고요. 클래식 연주란 죽어 있는 텍스트를 되살리는 작..
근대 과학 - 틀리는 게 정상 우리는 지식을 주장할 수 있다. 우리가 틀릴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항상 진지하게 받아들인다면 말이다. 포퍼에 따르면, 근대 과학의 혁명은 증명이 아니라 반증을 핵심 무기로 삼은 데에서 왔다. 개별자들은 자기 가설을 증명하려 애쓰지만, 과학 자체는 잠정적으로 입증된 모든 가설의 비판을 기초로 작동한다. 실험, 논리, 시험 등 온갖 방법을 동원해 과학자들은 선배들의 언어를 시체로 만들어 무덤 속으로 보낸 후 기념비를 세운다. 그러나 근대 과학의 진짜 위대한 점은 반증 자체가 아니다. 틀려도 살해당하거나 매장당하지 않는 지적 경쟁 시스템을 만들었다는 점이다. 포퍼는 말한다. "우리의 가설을 우리 대신 죽게 한다." 조선시대 당쟁사에서 가설의 패배는 실각, 유배, 사약이었다. 틀림은 곧 죽음이었다. 아직도 우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