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잡문(雜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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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하철 소리 풍경 휴대전화의 이어폰이 무선으로 바뀌면서 지하철 등에서 민망할 때가 많다. 입술 앞에 휴대전화나 마이크가 없어서일까. 사람들 목소리가 저절로 커지면서, 본의 아니게 옆 사람 사생활을 생방송으로 듣곤 한다. 일종의 환지통 같은 것일지 모른다. 통화하는 본인은 소곤거린다고 느끼는 것 같다. 하지만 물리적 실체를 느낄 수 없다 보니 저도 모르게 존재하지 않는 마이크를 향해 소리를 지르는 것이다. 창피한 줄 모르고 지하철 한 칸이 다 들리도록 말이다. 인간은 도구를 사용하고, 도구는 인간을 바꾼다. 나로서는 아직 무선 이어폰을 사용해 본 적은 없으나 비슷한 일을 겪을 때마다 다짐하곤 한다. 유선 이어폰이 모조리 사라지면 몰라도, 저걸 쓸 일은 없을 거라고. 선이 없을 때 편리한 점도 없지는 않겠지만, 공중장소에서 ..
수다 중독 수다란 무엇인가. 미국의 언론학자 피터 펜베스에 따르면, “어떤 가치 있는 것도, 중요한 것도, 흥미로운 것도 포함되지 않는 이야기”를 말한다. 말 자체는 한없이 계속될 수 있다. 한가한 주말 오후 별로 안 친한 지인과 일없이 만났을 때처럼, 친목 모임에서 자리에 없는 사람들 뒷담화로 시간을 죽일 때처럼, 페이스북이나 트위터나 카카오톡 단톡방에서 문장이 흘러갈 때처럼, 시간이 닿는 한 말은 영원히 이어질 수 있다. 하지만 체력이 다할 때까지 이야기를 나누어도, 수다는 아무것도 남지 않는다. 의미 있는 말은 사실상 한마디도 주고받지 않기 때문이다. 아무것도 말하지 않으려고 모든 것을 이야기하는 아이러니가 이로부터 생겨난다. 상대방이 자기 인생에서 그다지 중요하지 않음을 표시하려고 한시도 쉬지 않고 입을 떼..
이번에는 독서를 진흥할 수 있을까 2017년 ‘국민 독서실태 조사’에 따르면 한국의 성인 독서율은 59.9%다. 독서 여부 기준은 놀랍게도 한 해에 한 권이다. 사실상 한 해에 한 차례, 한 번이라도 책을 읽었느냐고 묻는 셈이다. 그런데도 성인 열 사람 중 네 사람은 책을 한 권도 안 읽는다고 답한다. 현실이 이처럼 지옥이니까, 당연히 독서 진흥이 필요하다. 하지만 독서 진흥과 관련해 아직도 낡은 사고를 하는 이들이 있다. 도서관·박물관 같은 책 관련 공간을 늘리면 독서 인구도 ‘저절로’ 증가할 것으로 생각한다. 이를 ‘도서관 숫자 가설’이라 하자.2013년 공공도서관 숫자는 813곳, 방문자 수는 2억 8702만명, 대출 도서 수는 1억 3089만권이었다. 같은 해 성인 독서율은 74.4%였다. 많은 요소들을 고려해야 하겠지만, 이 숫..
인공지능의 대가가 삶의 마지막에서 깨달은 것 “언제나 계산하고 모든 것을 숫자로 보는 태도는 우리 내부에 진실로 존재하는 것을 좀먹어요. 우리한테 진정한 삶을 살게 해 주는 사랑을 질식사시켜요.”조용한 산사에서 타이완의 싱윤 큰스님이 말한다. 눈물을 흘리며 듣는 사람은 구글차이나 설립자이자 창신그룹 회장인 리카이푸. 『AI 슈퍼파워』(이콘)의 한 장면이다. 세계적인 인공지능 전문가인 리카이푸는 ‘잘 나가는’ 사람이었다. 카네기멜론 대학에서 공부해 인공지능 연구의 첨단에 있었고, 인공지능 경제가 새로운 발견의 시대에서 빠른 실행의 시대로 전환되었음을 통찰함으로써 글로벌비즈니스의 정점에 섰다. 《타임》 선정 ‘세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100대 인물’에도 들었다. 날개를 단 채 하늘로 오를 것만 같았다. 그러나 모든 것이 한 순간 멈추었다. 2013년..
“벚꽃의 목소리를 들으려면” 나중까지 간직되는 건 깊이 음미된 순간 뿐, 그래서 꽃에는 시가 필요하다 금요일 저녁 퇴근할 때 본 양재천 풍경은 아직 황량하더니, 월요일 아침 출근길에 벚나무가 일제히 꽃을 열었다. 뻗어나간 나뭇가지 사이로 군데군데 검은 흙이 드러난 공원 풍경이, 주말 사흘 만에 붉고 흰 물감을 공중에 흩뿌린 것 같다. 안개가 일어선 듯 는개가 내리는 듯 눈을 감아도 어두워지지 않고 여전히 사물거린다. 헤어져 사흘이면 선비를 눈을 크게 뜨고 보아야 한다고 들었는데, 자연 또한 며칠이면 눈을 떼지 못할 변화를 일으킨다. 하기야 인간에게 있을 법한 일이 어찌 자연에 없겠는가. 습관적 인식을 무너뜨리고 정해진 경로를 이탈한 현실의 도래가 기적이라면, 비루한 일상 탓에 모르는 체 잊고 지낼 뿐 신은 어디서나 목소리를 내고 기..
강의와 강연 봄에는 얼어붙은 입들도 풀리는 것일까. 사나흘에 한 번쯤 도서관 등에서 강연 요청을 받는다. '말하기'와 '듣기' 시즌이 바야흐로 시작된 것이다. 고정으로 하는 일이 있기에 강연을 많이 할 수는 없지만, 강연을 하러 다니다 보면 당황스러운 일이 하나 있다. 이 강연에서 만났던 청중을 저 강연에서 보는 일이다. 강연은 일종의 리듬을 타는데, 비슷한 주제를 이야기하다 보면 분명히 겹치는 부분이 생긴다. 관련한 일화 정도라면 괜찮겠지만, 때때로 분위기 환기에 필요한 농담마저도 같을 수 있다. 한데 강연을 한 차례 들었던 사람이 눈에 띄면, 어떻게 이야기를 풀어야 할까 싶어 시작부터 말이 꼬이는 것이다. 강의와 강연은 다르다. 일반적으로 강의가 똑같은 사람을 대상으로 특정 분야의 지식이나 학문의 방법을 일정 기..
[내 인생의 노래] 조앤 바에즈의 「솔밭 사이로 흐르는 강물(the river in the pines)」 인생에서 내 돈으로 첫 번째로 산 기계는 오디오였다. 인켈 캐논. 가격은 두 달치 과외비인 40만 원쯤이었던 것 같다. 앰프, 턴테이블, 테이프 플레이어, 라디오, 스피커 등이 각각 분리되는 기계였다. 대학에 들어가자마자 친구한테 선물로 받은 LP 레코드 앨범 때문이었다. 조앤 바에즈의 「솔밭 사이로 흐르는 강물(the river in the pines)」. 나의 상처이자 추억이자 자부심. 턴테이블에 올려 수천 번 들었지만, 이 앨범은 지금도 애지중지 가지고 있다. 선물한 친구가 자꾸 들었느냐고 묻는데, 턴테이블이 없어 들을 수 없었다는 말을 차마 하지 못했다. 몇 번을 얼버무렸지만, 어느 순간 더 이상 견딜 수 없었다. 열 달 할부로 기계를 들여 조립한 후, 처음 소리가 집안을 울렸을 때의 감동은……...
독서공동체는 어떤 의미가 있는가 ― 같이 읽고 함께 사는 삶을 찾아서 독자를 만나고 싶다 독자들을 실감하고 싶다는 생각은 오래전부터였다. 편집자들은 솔직히 말하면 독자를 잘 모른다. 편집자로 일한 시간이 오래될수록 이 격절, 독자로부터의 소외는 심해진다. 때때로 저자 강연회, 사인회, 애독자 모임 등에서 독자를 만나기도 하지만, 관계자 입장이니 선뜻 속마음을 듣기가 어렵다. 독자들은 늘 저 너머에 있다. 책은 분명히 독자들한테 가 닿지만, 독자들은 항상 모니터 건너편이나 판매부수 이면에 흔적으로 존재한다. 편집자는 스스로 자기 분야 책들의 독자가 됨으로써 소외를 극복하려 애쓰지만, 어느 순간 가상과 실재 사이의 격차가 섬뜩할 정도로 벌어지곤 한다. 자신이 읽고 싶은 책과 독자가 읽으려는 책이 천만리 멀어지는 것이다. 나가던 책이 안 나가고, 팔리던 책들이 줄어든다. 초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