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잡문(雜文)/걷는 생각

책을 떠나보내면서

매년 연말이 되면, 책을 정리해 동생이 일하는 시골 도서관으로 보낸다. 한 해 동안, 이런저런 이유로 사고 얻고 받은 책이 수백 권. 침실을 작은 방으로 옮겨 안방을 서재로 쓰고 거실 한쪽 벽까지 모두 책장을 세웠지만 더 이상 감당할 수 없다. 책을 겹쳐 꽂을 서가는 이미 없고, 바닥에 쌓고 늘어놓는 바람에 손발 둘 곳이 더 이상 없을 지경이다. 어쩔 수 없이 몇 해 전부터 연말에 한두 달 틈나는 대로 시간을 들여 책을 처분해 왔다.

세 해 이상 들추지 않은 책을 버리라고 하는 이도 있다. 동의하지 못한다. 책은 읽으려고 사는 게 아니다. 어느 날 갑자기 서가의 책 중에서 눈에 띄는 것을 읽는 경우가 더 많다. 요즈음 도서관에선 출간된 지 다섯 해 이상 지난 책은 기증 자체를 받지 않는 경우도 있다고 한다. 책을 내보내는 한 기준이 될 수는 있겠으나, 역시 고개를 끄덕이기 힘들다. 고작 다섯 해 만에 손을 떠날 책이라면 아예 집에 들여놓지 않는 것만 못하다.

새로운 지식과 정보를 얻으려고 책을 읽는다는 말도 사실은 아닌 듯싶다. 학교나 도서관 등에서 이미 읽은 책을, 간직하려고 사는 경우는 너무나 흔하다. 아이들을 보면 잘 알 수 있다. 수없이 읽은 책을 곁에 두었다 읽고 또 읽는 걸 더 좋아한다. 내용이 낡지 않았다면, 책은 언제든 다시 읽을 수 있다.

처음에 책이 어떻게 집으로 오던가. 서점에 나가 독자들 움직임을 지켜보면 때로는 신기하기까지 하다. 수없이 책을 들었다 놨다 하면서 군데군데 세심히 읽고 난 후에야, 그것도 여러 책을 놓고 한참을 망설이다가 결심한 듯 하나를 골라서 집으로 데려간다. 책은 살아 있는 영혼에 가깝다. 사람들은 영혼의 주파수가 들어맞은 책만을 서가에 들여놓으려 한다.

서가에 꽂힌 책들은 영혼의 목록이기도 하다. 인생의 어느 순간 자신이 가졌던 정체성이고, 한때 자신이 품었던 욕망이며, 언젠가 이루어 보려 했던 꿈이기도 하다. 알베르토 망겔에 따르면, “책은 일종의 다층적 자서전”이다. 우리는 다양한 ‘한 사람’으로 살려고 서가의 책들에다 영혼을 분배해 둔 것이다. 필요할 때마다 확인할 수 있도록 이정표를 가져다 둔 것이다. 삶에서 길을 잃었을 때, 책에서 길을 찾을 수 있는 것은 이 때문이다.

한 해 더 데리고 살기로 한 책들

더 이상 읽지 못할 책, 필요하면 다시 살 책, 도서관에 있으면 더 좋을 책 등 나름의 이유를 붙여 상자에 책을 집어넣는 순간 책은 불현듯 말을 걸어온다. 표지를 보면 책을 얻었을 때의 추억이 떠오르고, 접힌 곳을 펴면 기억이 되살아나며, 밑줄이나 낙서를 살피면 짙은 회한과 함께 마음이 뭉클해진다. 어느새 빼든 책을 한참 동안 읽는 나, 부지불식중 손에 든 책을 서가에 되돌려 놓는 나를 발견할 적도 많다.

책은 데리고 살 때보다 버리는 동안, 나에 대해 더 많이 이야기한다. 홍차에 적신 마들렌이 입 안에서 부서진 순간 프루스트가 “진정한 삶, 마침내 발견되고 밝혀진 삶”과 마주쳤듯, 버려질 책들이 손에 닿는 순간 시간의 지층 속에 감춰져 있던 우리 자신의 진짜 모습이 일어선다. 하루하루 허덕이며 살아가는 동안에는 우리 자신이 누구인지 모르고 살지만, 책에 묻어 있던 우리 영혼의 한 조각이 내버려질 때가 되면 우리 자신의 진짜 얼굴, 즉 시간이 우리 몸에 남긴 영광과 고통의 흉터가 쏟아진다. 사랑과 우정, 용기와 비겁, 갈등과 고뇌, 환희와 우울의 순간들……, ‘비의지적 기억’이라 불리는, 이 억압된 기억이야말로 우리 삶의 참모습이다.

열심히 사는 것만으로 좋은 삶을 살 수는 없다. 하루하루 생존을 위해, 어떻게든 먹고살고 출세하려고 ‘열심히 산 죄’ 때문에 유한한 인생에서 정말로 소중한 순간들은 통째로 망각의 늪에 묻힌다. 이별하려 손에 든 책들이 이 사실을 끝없이 환기한다. 책과 함께 이 진정성이 완전히 나를 떠날 것만 같다. 책을 버리기 힘든 이유다.

산문시집 『파리의 우울』에 실린 작품 「가난뱅이를 때려라」에서 보들레르는 자신의 ‘불량 독서’를 고발한다. “24시간 동안 사람들을 행복하고 현명하고 부유하게 만드는 기술을 다루는 책들”을 읽은 것이다. 이 책들은 정신을 마비시키고 또 혼미하게 한다. “상투적 표현들”로 이루어진 “막연한 어떤 것”을 담아서 인간을 권력과 자본의 노예로 만든다. 책을 읽고 불편한 마음에 거리에 나선 보들레르는 식당 앞에서 구걸하는 노인의 멱살을 잡고 따귀를 때려 버린다. 빤한 소리에 위안을 얻으면서 자신을 기만하고 엎드려 자비를 구걸하는 대신 행동에 나서도록 만든다. 현세의 질서에 굴종하는 영혼의 따귀를 올려붙인다. 독자를 화나게 하고 불편하게 함으로써 제자리에 붙박여 있지 못하게 이끈다.

그러고 보면 우선해 이별할 책은 정해져 있다. 뺨을 얻어맞은 듯한 느낌을 불러일으키지 못하는 책들이다. 이런 책들은 손에 닿아도 기억의 마법을 부리지 못한다. 떠나보내는 책이 모두 이런 책들은 당연히 아니다. 눈을 질끈 감고 상자에 넣어 작별 인사를 하는 책도 있다. 기형도 시의 한 구절 같은 책들도 있다. “안녕, ‘더 이상 내 것이 아닌 열망들’아!”

책과 이별하면서 나를 떠올리고, ‘어떻게 살고 있는가’를 생각하고, ‘어떻게 살 것인가’를 고민한다. 잘 가라, 인생의 한 갈피여! 잘 있어라, 2019년이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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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민일보》 칼럼입니다. 조금 보충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