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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론과 서평/소설 / 희곡 읽기

“빌어먹을 놈들한테 절대 짓밟히지 말라.”

작품을 처음 접한 것은 서른 해 전이다. 먼저 영화를 접했고, 다음에 소설을 읽었다. SF 소설을 읽기는 하지만 일부러 찾아 읽지 않는 나 같은 이들한테 흔한 경로다. 국내 개봉 영화 제목은 ‘핸드메이드’. 처음에는 handmade인 줄 알았는데, 자세히 보니 handmaid였다. ‘시녀’라는 뜻이다. 지금은 영화를 보지 않지만, 당시엔 영화광이었다. 영화 <양철북>의 폴커 슐렌도르프가 감독을, 노벨문학상을 나중에 수상한 해럴드 핀터가 각색을, 사카모토 류이치가 음악을 맡았다. 안 볼 수 없는 작품이다. 영화를 보고 난 후 원작 소설을 읽고 싶어졌다. 이건 습관이다. 영화를 보고 좋았는데, 원작이 있으면 거의 찾아 읽는다. (솔직히 반대 방향은 잘 안 그런다. 주로 실망하니까.)

작가 이름은 마거릿 애트우드. 흔치 않는 캐나다 작가였다. 처음 접하는 작가인데, 활기찬 상상력, 진중한 주제 의식, 세련된 문장의 삼박자를 모두 갖춘 작품의 매력에 흠뻑 빠졌다. 편집자 후배가 이 작품을 재출간하자고 했을 때, 기꺼이 동의한 것은 이때의 좋은 기억 때문이었다. 아울러 <눈먼 암살자>, <도둑 신부>, <그레이스>, <고양이 눈>, <오릭스와 크레이그> 등 애트우드의 작품을 국내에 빠짐없이 소개하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후속작인 <증언들>이 전자책으로 출간된 것을 계기로 페미니즘 디스토피아 소설 <시녀 이야기>를 다시 읽었다.

마거릿 애트우드, <시녀 이야기>, 김선형 옮김(황금가지, 2002)



빼앗기고, 박탈당하고, 제거된
“다리 둘 달린 자궁”의 디스토피아

두 작품의 공간적 배경은 길리어드. 전에는 미국으로 불린 곳이다. 이곳에서는 전쟁, 오염, 성병 등 온갖 원인이 작용해 여성 대부분이 불임 상태에 빠져 출산율이 급감한다. 인구 없는 사회는 불가능. 혼란을 틈타 기독교 근본주의자들이 정권을 탈취해서 신정국가 길리어드를 수립한다. 구약에 근거를 두고 사회 전체를 신분에 따라 철저히 위계화하고 시민들을 옴짝달싹못하게 통제하며 책을 빼앗고 말을 제한하는 전체주의 국가다. 특히 여성의 이름을 빼앗고, 직업을 박탈하며, 강제로 기능을 부여하고, 성(sex)을 전면적으로 관리한다.

따라서 길리어드의 진짜 종교는 기독교 가부장제, 시쳇말로 ‘개독교’다. 여성의 자율성과 주체성을 세뇌를 통해 소거하고, 폭력과 억압을 통해 스스로 앞날을 선택할 자유를 제거한다. 여성들은 기능에 따라 사회 곳곳에 ‘배급’된 채, ‘아내’, ‘아주머니’, ‘시녀’ 같은 정해진 역할을 수행할 뿐이다. 이때의 시녀는 ‘하녀’가 아니다. 허드렛일을 하는 하녀는 따로 있다. 시녀는 길리어드 지배 계급인 ‘천사’의 가정에 배치되어 그들의 아이를 낳아 주는 씨받이 여성을 가리킨다. 한마디로 “다리 둘 달린 자궁”으로 살아가는 존재인 것이다.

<시녀 이야기>의 주인공은 시녀인 오브프레드(Offred). 발목에 족쇄처럼 문신된 이 부호는 ‘프레드의 것(Of Fred)’이라는 뜻이다. 배속된 남자의 이름에 따라 오브글렌과 같이 달라진다. 오브프레드는 길리어드 정권이 들어서기 전에는 도서관 직원으로 전산 작업을 하던 여성이었다. 길리어드 정권이 들어선 직후, 그녀는 위조 여권을 만들어 이웃 나라로 탈출을 시도하다 국경에서 붙잡힌다. 아이를 낳을 수 있는 몸이기에 그녀는 시녀로 훈육된 채 사령관 프레드의 집에 배속되어 오직 아이를 임신하기 위한 모욕적 섹스만을 강요당한다.

철저한 억압과 빈틈없는 통제, 반복적 세뇌와 잔혹한 처벌 등에 모두 굴복하고 순응할 법하지만, ‘젠더 파시즘’ 국가인 길리어드에도 ‘메이데이’ 같은 저항 조직은 있다. 모이라, 닉, 오브글렌 등은 길리어드의 전복을 노리면서 투쟁을 멈추지 않는다. 이들처럼 공공연한 저항에 나서지는 않지만, 오브프레드 역시 희망을 포기하지 않고 은밀한 저항을 계속한다.


오브프레드에서 준으로
이야기를 통해 나를 이어간다

오브프레드의 투쟁 수단은 이야기다. ‘밤’이라는 장막을 이용해 그녀는 상상의 날개를 편다. 어딘가에 존재할 ‘당신’을 향해 속으로 온갖 이야기를 건넨다. 때로는 현실을 사실 그대로, 때로는 상상의 힘으로 변형해 가면서. 이는 마룻바닥에 핀이나 손톱 같은 것으로 긁어서 몰래 “빌어먹을 놈들한테 절대 짓밟히지 말라”는 암호를 남긴 전임 오브프레드의 저항 행위를 계승하는 것이기도 하다. 수용소에 갇힌 유대인들이 오줌으로 자기 이야기를 쓴 후 깡통에 담아 땅에 묻었듯, 오브프레드는 낮에 빼앗긴 자기 정체성을 밤의 상상 속 이야기를 통해 복구한다. 밤은 “내 시간, 나만의 시간, 입만 다물면 뭐든지 내 맘대로 할 수 있는 시간”이기 때문이다. 그녀는 말한다.

“내 이름은 오브프레드가 아닌 다른 이름이다. 지금은 금지된 이름이라 아무도 불러주지 않지만. 나는 상관없다고 스스로를 타이른다. 이름이란 건 전화번호와 같아서 다른 사람들에게나 쓸모 있는 거라고. 하지만 스스로를 위로하는 말일 뿐 사실이 아니다. 이름은 중요한 문제다. 나는 그 이름의 기억을 숨겨놓은 보물처럼, 언젠가 다시 돌아와 파낼 나만의 보물처럼 간직하고 있다. 그 이름이 묻혀 있다고 여기고 있다. 나의 진짜 이름에는 마력이 있다. 상상할 수도 없이 아득한 과거로부터 지금까지 살아남은 부적 같은 마력이.”

상상력을 발휘해 자유롭게 구성하는 기억이 투쟁의 진지라면, 길리아드에서 임신을 목적으로 하지 않는 사랑은 해방의 탱크다. 오프브레드는 이야기를 통해 ‘준’이라는 자기 이름을 보존하고, 사령관 프레드와 비밀 스크래블 게임을 통해 언어를 되찾으며, 닉과 육체관계에 몰두함으로써 성적 자기 결정권을 되찾는다. 심지어 길리어드 지배계급인 사령관 프레드조차 마음의 공허를 이기지 못하고, 아기를 얻기 위한 섹스가 아니라 ‘진짜 애인 같은 사랑’을 갈구한다. 이로써 오브프레드를 복속시켜 ‘출산 기계’로 만들려던 길리어드의 기획에 균열이 가기 시작하고, 오브프레드는 마침내 닉의 도움으로 프레드의 집을 탈출한다.



마거릿 애트우드, <증언들>, 김선형 옮김(황금가지, 2020).

 

34년이라는 시대를 뚫고 나온
<시녀 이야기>의 후속작 <증언들>

<증언들>은 <시녀 이야기>가 발표된 지 서른네 해 만에 나온 후속작이다. <시녀 이야기>의 부록에 따르면, 준의 이야기는 일종의 메타픽션이다. 사령관 집을 탈출한 준이 은신처에 숨어 몰래 녹음한 자료를 되살려 재구성한 것이다. 이 자료는 길리어드가 사라진 지 약 200년 후인 2195년, 길리어드 연구학회에서 ‘남성’ 역사학자 파익소토 교수의 입을 빌려 발표된다. 두 가지 질문이 이로부터 생겨난다.

첫째, 길리어드는 1990년대 말 멸망했는데, 우리는 이 시기를 이미 소설 속에서, 또 현실에서 살아 버렸다. “빌어먹을 놈들한테 절대 짓밟히지 말라”는 전임 오브프레드의 유언이자 명령은 실현되었는가. 현실의 우리는 이미 답을 안다. 인류는 ‘백래시’를 충분히 극복하지 못했고, 여전히 ‘미투’와 ‘n번방’의 시대를 살고 있다.

소설 역시 마찬가지다. 학회에서 이 자료를 발표한 케임브리지 대학의 권위 있는 역사학자 파익소토는 출산율 감소의 원인을 “낙태 등 손쉽게 이용 가능한 산아제한 방법” 탓으로 돌리면서 “불임은 고의적인 것”이었다고 주장한다. 또 오브프레드가 시녀가 된 이유 역시 불륜을 저질렀다는 점, 즉 도덕적 부적절성 때문으로 해석한다. 길리어드는 멸망했지만, 가부장제 체제는 200년 후에도 여전히 지속 중인 것이다.

둘째, <시녀 이야기>의 마지막 장면은 오브프레드가 밴에 올라 어디론가 떠나는 장면으로 끝난다. 오브프레드 자신도 그것이 “끝일지, 새로운 시작일지”, 차량의 도착지가 “암흑”일지, “빛”일지는 알 수 없다. 그러고는 갑자기 길리어드가 멸망한 지 200년 후로 사건이 이어지는 것이다. 오브프레드의 운명은 어떻게 되었을까. 길리어드는 어떻게 해체된 것일까. 자연스레 독자들의 마음속에 떠오른 질문이다.

그러나 후속작을 기대하는 독자들 요구에 작가는 응하지 않았다. 1939년생으로 작가가 이미 80대에 접어들었기에, 독자들은 이에 대한 답을 영영 듣지 못할 줄 알았다. 그런데 TV 시리즈 방영을 계기로 <시녀 이야기>가 다시 대중들 사이에서 인기를 끌자, <증언들>이 기적처럼 출간된 것이다.

<증언들>은 오브프레드 이야기에서 15년 후에 벌어지는 사건들을 다룬다. 2019년 맨부커상을 수상했다. 애트우드는 <눈먼 암살자>에 이어 두 번째로 수상의 영예를 얻었다. <시녀 이야기>가 오브프레드 한 사람의 목소리에 기대어 희망을 일군다면, <증언들>은 리디아 아주머니, 아그네스, 데이지 등 여성 세 사람의 목소리를 교차시키면서 길리어드 체제의 붕괴 과정을 보여 준다. 여성의 목소리가 셋으로 늘어난 만큼, 겉으로 절정에 달해 있는 전체주의적 폭력과 달리 길리어드의 가부장제 신정체제는 오히려 약화되어 있다고 볼 수도 있겠다.

리디아의 비밀스러운 기록은 오브프레드의 내적인 독백만큼 충분히 매력적이다. 하지만 어린 두 소녀의 증언에는 우발적 힘이 느껴져 균형이 살짝 무너진 것이 아쉽다. 그 대신 작품은 스릴러 소설 같은 긴장감이 넘친다. 발각될 위험을 수차례 무릅쓰면서, 이들은 역사상 최악의 가부장제 국가를 무너뜨릴 비밀을 수집하고 폭로에 나선다. (아직 보지 않았고, 앞으로도 보지 않겠지만) 시즌 2까지 방영된 ‘미드’ <시녀 이야기>가 비슷한 느낌일지 모르겠다.


“내게는 제3의 눈이 있었다 (…)
그 눈은 울지 않았다. 보았다.”

<시녀 이야기>에서 오브프레드가 밤마다 자기 이야기를 써 나갔듯, <증언들>의 리디아 아주머니 역시 “글쓰기는 위험할 수 있다”는 것을 알지만 몰래 자기 이야기를 기록한다. 이른바 ‘아르두아 홀 홀로그래프’다. 정권 수립 초기부터 길리어드의 상층 계급에 속해 있었고, ‘아주머니’ 조직의 일인자로 군림하고 있기에, 그녀는 길리어드의 실체를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리디아는 말한다.

“미지의 독자여, 지금 당신이 읽고 있다면 이 원고는 적어도 살아남았을 것이다.”

아르두아 홀은 “아주머니들을 위해 특별히 마련된 장소”로, “아주머니 허락 없이 어떤 남자도 안으로 들어올 수 없”는 곳이다. 그녀가 남긴 비밀 기록에 따르면, 옛 미국 시절에 판사로 일했던 리디아는 감금과 고문, 협박과 폭력 등을 이기지 못하고 길리어드 정권에 협력하기로 한다. 그녀는 길리어드의 여성 차별적 규범을 제정하는 한편 시녀를 세뇌하고 훈육하는 아주머니 조직을 설립한다. <증언들>이 그녀의 업적을 기념하는 동상의 제막식으로 시작하는 이유다.

길리어드 정권이 집권 초기에 여성한테 가한 폭력은 ‘고문 포르노’처럼 처참하고 끔찍하다. 이성을 무너뜨리고 정체성을 박멸해 여성을 “동물적 본성에 걸맞은 동물로 환원”시킨다. 그러나 고문에 무너지는 자신을 느끼는 동시에, 리디아는 자신 안에 또 다른 눈을 마련하면서 복수를 결심한다.

“내게는 제3의 눈이 있었다, 이마 한가운데. 나는 그 눈을 느낄 수 있었다. 차가웠다, 돌처럼. 그 눈은 울지 않았다. 보았다. 그리고 그 너머에서 누군가 생각하고 있었다. 이 일은 반드시 갚아 주겠어. 아무리 오래 걸려도, 그 사이에 아무리 많은 똥을 처먹어야 해도 상관없어, 반드시 복수하겠어.”

오브프레드의 눈에 사악하게 느껴질 정도로 길리어드에 철저하게 협력하는 척하면서 리디아는 길리어드를 전복시킬 계획에 몰래 참여한다. ‘지하 여성도’를 통해 시녀의 도주를 돕는 등 길리어드에 대한 저항 조직인 메이데이의 비밀 정보원으로 활약하는 것이다.

‘아르두아 홀 홀로그래프’는 길리어드의 수립 과정에 대한 자세한 기록을 제공함으로써 진실을 보존하고 길리어드 최상층부에 만연한 음모, 위선, 부패 등을 보여 줌으로써 가부장제 체제의 허위성을 폭로한다. 전체주의 체제는 실제로는 아주 취약하기 때문에 사소한 균열만으로도 쉽게 분열되어 무너진다. 우리는 지난 정권의 몰락에서 그것을 경험한 적이 있다. 대통령을 탄핵하는 데에는 태블릿PC 한 대면 충분했던 것이다.

나머지 두 화자인 아그네스와 데이지는 오브프레드의 두 딸이다. 아그네스는 길리어드 안에서, 데이지는 길리어드 바깥에서 성장했다.(데이지의 존재는 오브프레드가 길리어드를 무사히 탈출했음을 은근히 암시한다.) 이 때문에 두 소녀는 서로 전혀 다른 가치관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두 소녀는 일련의 사건들을 계기로 길리어드 체제를 무너뜨리는 과감한 저항 행동에 나선다.

길리어드로 잠입한 데이지는 자매인 아그네스를 만난다. 그리고 소녀들 앞에서 정체를 드러낸 리디아의 도움을 받아 “거짓이 예외가 아니라 통상적 관행”이 된 길리어드 지배계급의 위선과 타락을 담은 자료를 숨긴 채 아슬아슬한 모험 끝에 캐나다로 도망친다. 어머니가 도망쳤던 루트인 ‘여성 지하도’를 따라 또다시 딸들이 탈출하는 것이다. 두 사람이 빼내온 마이크로닷 속의 정보가 캐나다 언론에 보도되면서 길리어드는 쿠데타가 일어나는 등 혼란에 빠진다. 이 틈을 타서 주변 국가들의 공세가 거세지고, 마침내 길리어드는 짧은 역사를 마감하고 무너져 버린다.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감각은
어떻게 혁명의 원천이 되는가

그러나 이 소설의 감동은 두 소녀의 활극에서 오지 않는다. 가부장제 체제에서 여성들이 겪는 참혹한 고통과 끔찍한 모멸, 반복된 세뇌로 인한 인식과 신념의 왜곡 등에 대한 냉혹한 고발은 그 자체로 가치가 있으나 소설적 핵심은 아니다. 내 생각에 소설의 중심에 있는 것은 지독한 폭력 앞에서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무력이 어떻게 변화의 씨앗이자 혁명의 원천이 되는가에 대한 집요한 탐구다.

“달리 내가 어떻게 했어야 한단 말인가.”

리디아는 자문한다. 거울에 비친 자기 얼굴이 낯설게 느껴질 정도로 자아가 무너져 있는 상태다. 이러한 운명론적 언어는 길리어드에서 여성들이 가장 많이 내뱉는 말이다. 마치 부적의 주문처럼 들린다. 세계의 무참한 폭력 앞에서 무력해지지 않는 인간은 없다. 모든 것을 어쩔 수 없는 일로 여길 수밖에 없는 상황을 견디게 하는 힘은 일차적으로 체념일 수밖에 없다. <시녀 이야기>의 오브프레드 역시 완전히 무력하지 않았는가.

무력(無力)이야말로 어쩌면 무력(武力)일지 모른다. 오브글렌이나 닉처럼, 모든 주체가 기꺼이 정의를 위해 투쟁에 나서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러나 순응하는 것처럼 보일지라도, 살아 있는 모든 인간은 흔적을 남긴다. 아무것도 할 수 없기에 더욱 선명해지는 기억이야말로 우리의 진정한 무기가 된다. 오브프레드와 리디아가 어떤 식으로든 기록을 남기려 하는 이유다. 죽어 가는 아내 타비사 역시 아그네스한테 동화 같은 이야기를 남긴다. 그리고 이 이야기를 통해 아그네스는 친어머니를 둘러싼 진실을 알아차리고 용기를 발휘해 행동에 나선다. 기억이 있고, 이야기가 있는 한 인간은 언제든지 다시 일어설 수 있다.

“서글프고 굶주리고 황폐하고 절뚝거리고 사지가 절단된 이야기”일지라도, 후미진 곳에 아주 작은 글씨로 암호로 남긴 기록일지라도, 이야기가 있으면 어딘가에 ‘당신’도 반드시 있다. ‘당신’이 있다면, 물론 연대도 있고 사랑도 존재한다. 오브프레드는 말한다. “나는 이야기한다. 고로 당신은 존재한다. 그래서 나는 이야기를 계속할 생각이다. 그래서 스스로 견뎌낼 작정이다.” 이것은 작지만 커다란 목소리이고, 동시에 이 아름다운 소설을 읽는 우리의 희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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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디아티클에 연재 중인 글입니다. 여기에 옮겨 둡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