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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론과 서평/소설 / 희곡 읽기

“난 어쨌거나 좀 더 살아야 해요.” ― 루쉰의 『고독자』를 읽다

루쉰의 『고독자』(이욱연 옮김, 문학동네, 2020)루쉰, 『고독자』(이욱연 옮김, 문학동네, 2020).



루쉰의 소설은 이미 모두 여러 번 읽었지만, 손에 새로운 번역본이 들어올 때마다 어떻게든 다시 읽는다. 이번에 읽은 책은 『고독자』(이욱연 옮김, 문학동네, 2020)다. 이 판본은 2002년 인민출판사에서 특별 간행되었던 것으로 중국 현대 판화의 거장 자오옌넨이 새긴 목각 판화가 삽화로 실린 것이 특징이다. 『아Q정전』(2011), 『들풀』(2011), 『광인일기』(2014)에 이어 네 권째 나왔으며, 번역은 이번에도 이욱연 교수가 맡았다. 차후에 『옛이야기, 다시 쓰다』로 완간될 예정이다. 

이 책에 실린 루쉰의 작품은 「복을 비는 제사」, 「비누」, 「장명등」, 「가오 선생」, 「고독자」, 「애도」, 「이혼」 등 일곱 편이다. 역자에 따르면, 루쉰의 두 번째 소설집 『방황』에 실린 작품 중에서 고른 것으로, 1924년부터 1926년 사이에 쓰였다. 민중, 특히 여성의 비극적 삶에 대한 연민(「복을 비는 제사」, 「애도」, 「이혼」), 지식인의 위선에 대한 통렬한 풍자와 가혹한 비판(「비누」, 「가오 선생」, 「장명등」), 개혁의 꿈을 꾸지만 현실의 두꺼운 벽에 부딪혀 절망하는 지식인의 방황(「고독자」) 등을 다룬 작품들이다.

루쉰의 소설들은 읽을 때마다 다른 세부가 머리에 남고, 새로운 느낌이 가슴에서 일어선다. 치밀한 인간 통찰, 뛰어난 풍속 묘사, 빼어난 윤리적 감수성 등이 불처럼 활활, 또다시 머릿속을 태우는 듯한 기분을 느낀다. 읽을 때마다 어떻게 이런 기분이 들게 하는지 놀라울 뿐이다. 『고독자』 속의 작품들도 마찬가지다. 모두 예전에 읽었는데, 전부 새로 읽은 기분이다.


「고독자」의 중심 인물 웨이롄수「고독자」의 중심 인물 웨이롄수


“난 어쨌거나 좀 더 살아야 해요.”

표제작인 「고독자」의 중심 인물인 웨이롄수의 말이다. 거짓으로 가득한 무정한 현실 속에선 한 조각 인간다운 삶도 어렵다. 직장을 잃고 굶어죽을 위기에 빠진 웨이롄수는 화자인 나를 찾아와 어렵게 부탁의 말을 건넨다. 그러나 하루하루 근근이 살아가는 나의 처지도 비슷해 애를 써도 아무 도움도 줄 수 없다.

루쉰의 말처럼, 타락한 현실은 “다수의 힘으로 천하를 지배하고 특별한 사람을 억압하는 것”을 당연시한다. 이러한 현실에서 개혁을 꿈꾸는 청년들은 이해받지 못한 채 주변 사람들로부터 소외되어 극도의 고독에 시달린다. 할머니 장례식에서 터트린 웨이례수의 울음은 “고독을 입에 넣고 씹어 삼키”면서 “일생”을 살아갈 수밖에 없는 이들의 격렬한 비통함을 표현한다. 그 울음은 “상처 입은 이리가 깊은 밤 광야에서 울부짖는 것 같았다. 참혹한 슬픔에 분노와 비애가 섞여 있었다.” 유정한 자는 이 무정한 세상에서 울 수밖에 없다. 

사회 여러 모순에 대해 “거리낌 없이 자기주장을 내세우는 이”인 웨이롄수는 결국 음모와 모함에 빠져 중학교 교사 자리에서 쫓겨나고, 석 달이 못 가 아끼던 책을 내다 팔아야 하는 처참한 생활의 위기에 내몰린다. 웨이롄수는 심지어 “구걸을 하고, 추위와 굶주림에 시달리고, 고독하게 지내”는 등 고생을 감내하지만, 결국 모든 것을 포기한 채 은화 80위안을 월급으로 받고 군벌의 군사 고문으로 들어간다. 이것은 타락일까. 아니다. 웨이롄수가 화자인 나한테 보낸 편지에서 드러나듯, 이후 폐병 치료를 거부한 채 방탕 속에서 자신을 죽음으로 몰아가는 웨이롄수의 삶은 일방적 굴복이라기보다는 자기파멸을 통해 타락한 세상에 일종의 정신적 흠집을 내려는 최후의 저항 형태를 띤다. 이 사회에서 여성 고독자들은 더욱더 힘겹다. 

“나는 나 자신의 것이에요. 다른 누구도 나를 간섭할 권리가 없어!”

「애도」의 여주인공 쯔쥔의 말이다. 「복을 비는 제사」의 샹린댁, 「이혼」의 아이구 등은 모두 쯔쥔과 마찬가지로 자기 삶을 주체적으로 살아가려고 애쓰지만, 모래시계에 올라선 듯 봉건 사회질서의 억압 속에서 비극적 결말을 맞이한다. 이들은 개화된 사회 속에서도 여전히 주체적 인생을 살아갈 수밖에 없는 여성의 현실을 폭로하는 작품들이다. 여성 해방을 향한 루쉰의 페미니즘적 열정을 보여 주는 작품들이자, 루쉰 문학의 가장 빛나는 성취를 담아낸 대표작에 해당한다. 이 작품들 속의 여성들은 지옥 같은 현실 속에서 아무리 열심히 살려고 애써도, 자신의 의지나 역량에 상관없이 철저히 타의에 의해 파멸을 맞이한다. 건강한 샹린댁은 얼이 빠진 채 가난에 절어 죽고, 쯔쥔은 사랑하던 남성과 동거가 끝나자 극단적 선택을 한다. 봉건 질서와 가부장제 등 이중의 질곡에 시달린다는 점에서 이들의 고독은 남성들보다 처참하다. 

“공허의 무거운 짐을 지고 위엄과 차가운 눈초리 속에서 인생의 길을 간다는 건 얼마나 무서운 일인가! 더구나 그 길 끝에는 묘비도 없는 무덤뿐이지 않은가.”

이 작품들에서 루쉰은 이해받지 못한 채 고립 속에서 죽어가는 고독자들을 이렇게 연민하는 한편, 여전히 봉건사상에 젖어 비틀린 삶을 살아가는 인간들을 고발한다. 「비누」의 쓰밍, 「가오 선생」의 가오얼추 등 위선적 지식인을 통렬히 풍자하고, 「장명등」의 인습에 사로잡힌 마을 사람들 역시 철저히 비판한다. 이러한 인간들이 가득한 세상이기에, 더 나은 삶을 꿈꾸는 이들은 ‘고독자’가 되어 아무 꿈도 펴지 못하고 파멸해 버린다. 가슴이 뜯기는 것 같은 슬픈 일이다.

마지막까지 자신의 인물한테 가혹한 사람만이 좋은 작가가 될 수 있다. 작가가 인물을 끝까지 밀어붙여서 파멸시키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을 때 비로소 세계의 실체를 독자들 눈앞에 보여 줄 수 있다. 이 점에서 루쉰은 정말 재능을 타고난 듯하다. 사태가 자신의 인물들을 어느 너머까지 끌고 갈 수 있는지 안다. 우리의 상상보다 더 비열하고, 생각보다 더 끔찍하며, 현실보다 더 비통한 삶이 있다. 

그러나 자신의 인물을 극한까지 밀어붙이는 가운데에서도 루쉰은 독자를 슬프게 하지만 절망하게 하지 않고, 답답하게 하지만 좌절하게 하지 않는다. 오히려 파멸한 인물에 공감하고, 현실의 비극에 분노하며, 또 다른 삶을 꿈꾸게 만든다. 가령, 다음과 같은 구절들은 얼마나 유쾌한가. 

“빠득빠득이라고, 뻔뻔해. 정말 뻔뻔해…….”

쓰밍의 어린 딸 슈얼이 등 뒤에서 조그맣게 속삭인다. 늙은 할머니를 거지 처녀한테 적선을 하기는커녕 비누로 씻으면 어떨지를 설왕설래하는 성인 남성들의 위선을 꿰뚫는 말이다. 다음 세대는 이렇게 기성세대의 허위에 대한 인식 위에서 일어선다. 사소하나마 희망이 있는데, 심장이 두근거리는 걸 포기할 리 없다. 이것이 루쉰 소설의 매력이다. 


「비누」의 한 장면「비누」의 한 장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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