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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에 겐자부로와 재현의 윤리 [여]동생은 자신과, 또 다른 두 사람[아내와 딸]이 내 소설에서 일방적으로 묘사되어 온 사실에 불만을 품고 있다고 말하곤 했다.우리는 ‘세 여자’라는 그룹을 만들어 각자 오빠의 소설에 대한 반론격 글을 써서 돌려보고 있어요. 지금까지는 그저 쓰기만 하고 확실한 독자가 두 명 있다는 걸로 만족해 왔지만, 오빠가 ‘마지막 소설’이라느니 하는 말을 다시 하고 있기도 하니, 오빠가 정말로 그 소설을 쓸 거라면 다 쓰기 전에 우리가 쓴 글을 읽어줬으면 좋겠다. 그러니 오빠에게 보내자, 라고 이야기가 되었어요. 어떻게 생각해요?한번 어떤 착상을 하면 곧장 행동으로 옮겨야 직성이 풀리는 게 동생 성격이어서 초고를 넣은 서류 봉투는 이미 나한테 도착해 있었다. 나는 그 원고를 어느 정도 읽어보긴 했지만, 동생과 동생..
베토벤 피아노 소나타 32번(파우스트 박사) 베토벤의 비서가 피아노 소나타 32번의 3악장을 쓰지 않은 연유를 물었다. 작곡가는 시간 여유가 없어 아예 2악장을 좀 길게 늘여 작곡했다고 태연하게 답했다. 시간 여유가 없다니! 게다가 ‘태연하게’라는 말까지! 그런 식의 답변은 거의 경멸에 해당하는 게 아닐까……. 강사는 1820년경 작곡가 처지를 일러주었다. 당시 베토벤의 청력은 손쓸 수 없는 소모성 질환 탓에 이미 제 기능을 상실했고, 자기 곡을 지휘하는 것조차 불가능해졌다는 게 정설이라 말했다. 32번 소나타는 갖가지 리듬이 대비되며 펼쳐지는 온갖 운명과 고된 세계를 헤치고 나아가, 2악장 주제가 점차 확대되어 마침내 경지를 벗어나 서 종국엔 피안 혹은 추상 세계라 할 만한 아득한 높이로 소멸되어 간다고 간주했다. 소나타를 직접 들어 보면 어떤 ..
출판사의 첫 책 『출판사의 첫 책』(출판사 핌, 2024)은 작가 송현정이 만난 열 군데 출판사 이야기를 다룬다. 대부분 일인 출판에 가까운 출판사이지만, 이야기장수처럼 대형 출판사의 임프린트인 곳도 있고, 골든래빗처럼 처음부터 주식회사 형태를 갖춘 곳도 있다. 창업 후 꾸준히 성장을 이룩한 곳도 있고, 좋아하는 책을 내는 데 만족하는 곳도 있다. 출판 창업 관련 책은 크게 세 갈래로 나누어진다. 첫째, 이승훈의 『내 작은 출판사 시작하기』(북스페이스, 2017)나 신동익의 『독립출판 제작자를 위한 대형서점 유통 가이드』(프랭크유통연구소, 2019) 같은 창업 실무 안내서. 둘째, 이현화의 『작은 출판사 차리는 법』(유유, 2020)이나 박지혜의 『날마다, 출판』(싱긋, 2021) 같은 일인 출판사 대표가 쓴 체험적 창..
옥스퍼드 출판의 미래 아직도 출판에는 낭만이 가득하다. “신사적 분위기, 책 가득한 사무실, 고루함과 느긋함, 전통과 예술성 선호 등”은 출판을 생각할 때 가장 먼저 떠오르는 이미지다. 불멸의 작품을 남기기 위해 고뇌하는 작가들, 매력적 작품을 발굴하려 분투하는 편집자들, 아름다운 책을 만들려 노력하는 디자이너, 고상하고 우아한 이야기를 주고받으며 독자에게 책을 권하는 사서나 서점 직원 등은 출판의 인간적, 문화적 가치를 상징한다. 더 나아가 좋은 책이라고 믿으면 경제적인 손해를 기꺼이 감수할 수 있는 마음, 먼 훗날을 생각해 미지의 신인 작품에 투자할 수 있는 마음, “사상과 문화의 미개척 지대에서 일하는 흥분감, 꾸준히 세상 변화에 일조하는 능력”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 이것이 출판의 자부다. 그러나 아무리 훌륭한 출..
인문주의란 무엇인가 정치사상사에는 ‘고전(classic)’이라 불리는 일련의 텍스트들이 존재한다. 이 경우에 ‘고전’이란 단순히 ‘오래된 책’이라는 의미가 아니다. ‘시대를 초월해 부단히 읽히며, 줄곧 참조의 대상이 되어온 텍스트’야말로 진정한 의미의 ‘고전’이다.정치사상사란 ‘고전’을 끊임없이 읽어온 역사라 하겠다. 사상가들은 모두 자기만의 기준에 따라 ‘고전’을 선택했고, 그것을 깊이 읽어가는 과정에서 자기 나름의 사상을 형성했다. 다시 말해 ‘고전’을 읽고 거기에서 얻은 관점이나 사고법을 바탕으로 자기 눈앞에 있는 현실과 겨루고자 했다. 그리고 그들의 저작은 새로운 ‘고전’의 대열에 합류했다.‘인문주의(humanism)’란 본래 이처럼 ‘고전’을 독해하는 지적 영위의 전통을 가리키는데, ‘정치적 인문주의(civic h..
이합체에 대하여 2024년 현대문학상 평론 부문 수상작은 양윤의의 「이합체(異合體)」(《현대문학》 2024년 5월호)이다. 이 작품은 현호정 단편소설 「청룡이 나르샤」(《문학동네》 2023년 겨울호)를 대상으로 삼아서 ‘이합체’라는 개념의 가능성을 탐색한다.  양윤의는 올해 초 발표한 「마녀, 광녀 그리고 병원체로서의 여성」(《한국문학이론과 비평》 102집)에서 같은 개념을 다룬 적이 있다. 이 글은 도나 해러웨이, 애나 칭, 로베르토 에스포지토, 실비아 페데리치 등의 논의를 빌려서 이서수의 「엉킨 소매」(『젊은 근희의 행진』, 은행나무, 2023), 안보윤의 「어떤 진심」(『밤은 내가 가질게』, 문학동네, 2023), 구병모의 「있을 법한 모든 것」(『있을 법한 모든 것』, 문학동네, 2023)에 나타난 가부장제 공동..
피부 감각 ※ 피부평균 넓이 약 2제곱미터, 평균 무게 약 4킬로그램에 달하는 인체에서 가장 두 번째로 큰 기관(첫 번째는 허파꽈리)신체가 환경과 접촉할 때 일어나는 기계적 변화를 측정하는 수많은 기계 수용기로 덮여 있기에, 지각 능력이 뛰어난 하나의 커다란 껍질로 기능기계 수용기 외에도 아픔을 감지하는 통각 수용기, 열기와 냉기를 감지하는 온도 수용기, 가려움을 감지하는 히스타민 수용체 등이 있음 → 각 수용기는 서로 영향을 주면서 복합적으로 작용하고, 이 모든 것을 종합한 패턴이 우리 감각이 실제로 느끼는 것임 (예) 딱딱함 = 피부가 땅기는 느낌 + 약간의 열기, 축축함 = 가벼운 촉감 + 온도자극을 받은 수용기는 뇌로 전달되는 전기 신호 생성 → 신경섬유를 타고 척수를 거치면서 하나로 뭉쳐서 뇌까지 흐름 →..
음악, 인간 감성의 아카이브 음악은 우리를 일상생활에서 벗어날 수 있게 합니다. 다시 꿈을 꿀 수 있게 합니다. 음악은 다른 시대에 다른 삶을 살았던 이들의 생각, 그들이 추구했던 이상과 철학을 담은 예술입니다. 음악을 듣다 보면, 작곡가와 연주자가 어떤 어려움, 어떤 고통, 어떤 슬픔을 이겨내려 했는지가 들려오고, 그런 인간 감성의 아카이브가 바로 음악이라고 생각합니다.또한 음악은 인간 내면의 가장 깊은 곳의 울림입니다. 또한 작곡가와 연주자의 울림과 우리의 울림이 만날 수 있는 ‘공간’이라고도 믿습니다. (중략)악보 자체만 보면 아무것도 없어요. 그저 백지에 먹으로 쓰인, 추상적인 기호들뿐이죠. 연주자는 작곡가의 의도를 분석해야 하는 숙제를 떠안습니다.저는 악보의 화성을 이해하고 나서 이 화성의 강약과 타이밍을 찾습니다. 음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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