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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덕적 진보의 깃발을 들 때 슬프게도, 뻔뻔함의 시대다. 잘못을 저지르고도 부끄러움을 모르는 게 정치의 원리가 됐다. 두꺼운 얼굴로 되려 ‘어쩌라고’라고 외치고, 시커먼 마음으로 ‘그래서 뭐?’라고 소리친다. 후안무치에 인면수심이 횡행한다. 군대를 동원해서 국회를 무력화하려고 했던 자가 가벼운 경고행위라고 우긴다. 이에 동조해 나라를 군사독재 시절로 되돌리는 데 끼어들려 했던 자가 고개를 뻣뻣이 들자고 선동한다. 아이들 눈을 가리고 귀를 씻어주고 싶다. 이런 때에 어른으로 산다는 게 창피할 뿐이다. 잘못은 더러운 자들이 저질렀는데, 부끄러움은 착한 사람들 몫이 됐다. 2025년 첫 책으로 ‘어두운 시대에도 도덕은 진보한다’(열린책들)를 꺼내 읽었다. 저자인 마르쿠스 가브리엘 독일 본 대학 교수는 우리 시대가 심각한 가치 위기에 시달..
참된 행복은 무위(無爲) 속에 있다 한 해가 저물어 간다. ‘어느새’란 말이 선뜻 피부에 느껴진다. 마치 초겨울 바람 같다. 아리고 쓰라리다. 물론 하루하루 바삐 보내지 않은 적도 없고, 열심히 살지 않은 날도 없는 듯하다. 그러나 문득 돌아보면 시간이 쌓이지 못한 채 스르르 흩어져 남김없이 사라진 기분이다. 인생 한 해를 빼앗긴 듯 그저 허망할 뿐이다. 열렬히, 정신없이 살았다고 해서 반드시 괜찮다고 할 수 없다. 뿌듯한 보람으로 이어지지 못하는 삶, 단단한 기억을 남기지 못하는 삶은 인간의 얼굴을 하지 못한 채 단순 생존으로, 벌거벗은 동물적 삶으로 쪼그라든다. 먹고살기 위한 몸부림은 마땅히 존중받아야 하나, 거기에만 집념할 때 삶은 아무것도 아니게 된다. 맹목으로, 공허로, 무로 전락한다. ‘관조하는 삶’(김영사)에서 철학자 한병철은..
보르헤스와 탐정 소설 1. 보르헤스와 비오이 카사레스는 1930년대 초부터 반세기 넘게 우정을 쌓으며 작품 활동을 함께 한 생의 동료이자 문학적 동반자였다. 2. 두 사람은 남미 최초의 탐정 소설인 『이시드로 파로디에게 주어진 여섯 가지 사건』(1942)을 공동으로 집필해서 오노리오 부스토스 도메크(Honorio Bustos Domecq)라는 이름으로 발표했다. “어쩌다 보니 우리 두 사람은 오노리오 부스토스 도메크라는 제3의 인물을 창조했지요. 도메크는 비오이의 증조부의 성에서, 부스토스는 코르도바주에 살던 내 증조부의 성에서 따왔습니다.” 이후에도 두 사람은 같은 필명으로, 『죽음의 모범』(1946), 『부스토스 도메크 연대기』(1967), 『부스토스 도메크의 새로운 단편들』(1977)을 출판했다. 이 외에도 두 사람은 ..
학술 출판에 대하여 2 - 학술서란 무엇인가? 대학이나 연구소에서 이룬 학문적 성과를 책으로 펴내는 방법에 대해선 아직 정밀한 연구가 진행된 적이 없다. 그저 막연히 학술서라고 부르고 있을 뿐이다.학술서란 도대체 무엇일까? 주체의 자격을 기준으로 따져봐야, 교수나 학위 달고 엉터리 책을 써내는 사람도 많으니, 그게 학술서라고 할 수 없다. 동료 검토를 받는 학술지 등에서 꾸준히 연구 성과를 발표하면서 평판을 얻은 사람이 쓰면 학술서일까. 반드시 그런 것 같지도 않다. 들뢰즈/가타리 같은 사람은 그런 걸 하지 않고, 학문적으로 대단한 책을 냈다. 니체는 대학을 떠나고 난 후 불후의 저작을 남겼다. 독자를 중심으로 정의하려 해도, 교수, 강사, 학생 등을 누구를 대상 삼느냐에 따라서 그 내용과 체제는 천차만별이다. 표준국어대사전엔 올라 있지 않고, 우리..
학술 출판에 대하여 1 “저희 편집부 직원들은 필자 관리와 책 제작에만 관여합니다. 책 교정은 특정 학문을 전공한 비상근 아르바이트에게 철저하게 책임을 맡겨서 상근자의 인건비를 아끼고 있습니다. 이런 구조이기 때문에 필자의 책임을 강화시키는 동시에 전공자의 꼼꼼한 검토를 받아 더 확실하게 출판할 수 있지요.”일본 호세대학 출판국 기획부장의 말이다. 2002년 황해문화에 실린 김응교 선생님의 「일본 대학 학술서적의 인프라」에 나와 있다. 오래전 글이지만 깊이 음미할 만한 데가 있다.알다시피 호세대 출판부는 일본을 대표하는 학술 출판사로 우니베르시타트 총서로 유명하다. 해외 사상에 관심 있고 일본어를 읽을 줄 아는 사람 중 이 총서에 영향을 받지 않은 사람은 드물다.2010년까지는 한 해 70권 정도 책을 11명의 편집자가 진행한..
퍼블리싱 마케팅 트렌드 한국출판마케팅연구소의 신간 『퍼블리싱 마케팅 트렌드』(북바이북, 2024)에 여는 글을 썼다.이 책은 《기획회의》 600호 마케팅 특집에 나왔던 여러 마케팅 사례를 묶고, 몇몇 글을 보태서 펴낸 책이다. 일인 출판사부터 대형 출판사까지, 홍보나 마케팅 대행사까지 출판사 규모와 역할은 다르지만,팬데믹 이후 한국 출판계에서 시도되었던 다양한 마케팅 사례가 실려 있다.이러한 시도들을 개괄하면서 그 의미를 생각하는 글을 부탁받아 짧게 써서 덧붙였다.아래는 그 글 중 일부를 재편집한 것이다.  “갈수록 마케팅을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뭐를 해도 안 팔린다.” 출판 현장에서 흔히 듣는 말이다. 출판 마케팅을 말할 때, 우리는 흔히 자잘한 팁(Tip)에 집중한다. 모 출판사가 카드뉴스로, 유튜브 광고로, 온라..
공유 서재 요즘 공유서재란 게 유행인 모양이다. 개념이 정확지 않은데, 한 기자에 따르면, 이렇다. “누군가의 취향이 묻어난 서재가 나만의 공간이 될 수 있다. 대여한 시간 동안 그곳의 온전한 주인이 되는 특별함. 바야흐로 공유 서재 시대다.”북카페 또는 작은 도서관의 진화형이라고 할 수 있다. 북카페라면 음료나 책의 판매가 주여야 하니까 카페라고 볼 순 없을 듯하다. 일반 음식점 면허나 서점 면허로 운영하긴 힘들 것 같다.책을 두고 공간을 대여하는 게 특징이니, 일종의 작은 도서관에 가깝다. 그중에서도 외부 대출이 안 되는, 폐쇄형 유료 도서관이다. 오래전부터 이런 유의 도서관은 있어 왔고, 해외에는 아직도 흔하다. 사실, 작은 도서관 중에도 회원을 모집해서 월 회비를 받고 있는 곳도 있으니, 공유 서재도 이 변..
세책, 도서 대여, 기간제 구독, 도서관 1흔히 세책(도서 대여)과 기간제 구독과 도서관을 구분해서 생각하나, 독자 입장에서 보면 셋은 본질적으로 크게 다르지 않다. 책을 빌려서 읽는 일, 즉 ‘세책 독서’를 촉발하는 기관이기 때문이다. 셋 모두 “책을 한곳에 모아놓고 일정 기간 사용료를 낸 이들이 마음껏 빌려 읽도록 한 유통 시스템”에 속한다. 공공도서관은 그 사용료가 무료일 뿐이다. 2내가 번역에 참여한 『도서관의 역사』가 올해 안에 나올 텐데, 이 책에선 도서관과 서재, 공공과 사설, 무료와 유료를 구분하지 않는다. 『18세기의 세책사』(문학동네, 2024)에서도 세책점(도서대여점)을 유료 대출 도서관으로 본다. 세책점이 일반적으로 권당 대여 가격을 책정하는 반면, 밀리의서재나 네이버프리미엄 같은 기간제 구독 서비스는 기간에 따라 대여 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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