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쓰기는 언제나 읽기에서 시작한다 글쓰기 전성시대다. 이처럼 많은 이가 온갖 곳에 다양한 글을 쏟아내는 시대는 역사상 없었다. 그러나 정작 좋은 글을 쓰는 일은 쉽지 않은 듯하다. 글쓰기 강좌는 호황을 누리고, 관련 책의 판매 부수도 늘지만, 사람들은 자꾸 묻는다. ‘어떻게 하면 좋은 글을 쓸 수 있을까요?’ 좋은 글을 쓰려면 단순한 요령을 넘어서는 더 큰 배움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글쓰기 사다리의 세 칸』(신혜경 옮김, 밤의책, 2022)에서 프랑스 페미니스트 철학자 엘렌 식수는 글쓰기가 H를 닮았다고 말한다. H는 “글이 오르내리는 사다리”를 말한다. 왼쪽 기둥(I)이 한 언어이고, 오른쪽 기둥(I)은 다른 언어이며, 둘을 이어주는 선이 있다. “글쓰기는 두 해안을 잇는 통로를 만든다.” 글쓰기는 널리 알려진 것과 아직 알려지지 않..
좋은 물건을 만드는 일은 영혼을 단련하는 것과 같다 누구나 자기 일을 통해 자기 자신이 누구인지 배울 수 있다. 집은 짓든, 가구를 만들든, 음식을 요리하든, 경지에 오른 장인은 모두 깊은 영성의 탐구자이기도 하다. 그들의 손길이 닿으면, 일상의 제품은 영혼의 작품이 된다. 물건 만드는 일은 영혼을 불어넣는 일이요, 영적 깨달음을 누적하는 일이다. 좋은 물건을 만나면 경건하고 거룩한 마음이 먼저 일어서는 이유다. 『울림』(니케북스, 2022)에서 독일의 바이올린 장인 마틴 슐레스케는 말한다. “악기를 만들다 보면 특별한 순간들이 찾아온다. 작업실에서 경험하는 거룩한 순간. 그 순간에 나는 삶의 외적·내적 일들을 새롭게, 다르게 지각한다. 단순히 습득된 지식을 넘어서는 경험이다. 나는 모든 사람의 일상에도 이같이 계시의 순간들이 주어질 거라고 확신한다. 우..
비독서 시대 오늘날 글은 읽지만 책은 읽지 않는 현상이 심화하고 있다. 글 읽기와 책 읽기는 다르다. 비독서는 우리 정신에서 많은 것을 소실시킨다. 책은 관조(theoria) 미디어다. 책은 종합적 분석, 비판적 통찰, 느린 지혜, 섬세한 감각을 주고받으려고 진화한 기계다. 독서는 독특한 읽기 양식을 요구한다. 천천히 읽기(Slow Reading), 능동적 읽기(Active Reading), 꼼꼼히 읽기(Close Reading), 다시 읽기(Re-reading) 등을 충분히 훈련하고, 지속적으로 반복 학습하며, 다양한 상황에 꾸준히 적용해 보지 않으면 우리는 ‘읽을’ 수 없다. 독서는 무척 힘들기 때문에, 일단 비독자가 된 사람 중에 스스로 독자가 된[독자로 되돌아온] 사람은 거의 없다. 인간은 (훈련되기 전에는)..
풍경과 인간 풍경은 인간보다 오래 지속될 것이다. 이제 풍경은 종으로서의 자신의 미래 따윈 아랑곳하지 않고 풍경을 파괴하는 인간의 소멸을 기다리고 있다. _하이너 뮐러 ===== 이렇답니다.
와인 우리가 하는 식사에 와인을 곁들입니다. 와인에는 많은 것이 포함되지요. 우선 향미가 있습니다. 요리를 보완해주는 풍성한 맛이 있습니다. 또 알코올이 있습니다. 우리의 정신이 살아 있도록 해주는 알코올 말입니다. 와인은 우리가 가진 모든 감각을 풍부하게 해줍니다. 그리고 식사 마지막에는 그라파(포도로 만드는 독한 술)를 마실 겁니다. 그런데 그라파는 한 가지뿐입니다. 알코올뿐이죠. 그라파는 와인을 증류한 것입니다. 인간성에는 많은 것이 포함됩니다. 열정, 호기심, 이성, 이타주의, 창의성, 이기심… 그러나 시장에는 단 하나, 이기심만 있습니다. 시장은 인간성을 증류한 것이지요. 여러분이 할 일은 그라파를 다시 와인으로 돌리는 것, 시장을 다시 인간성으로 돌려놓는 것입니다. 이건 신학의 문제가 아닙니다. 현..
여성은 왜 출세하지 못하는가 노동을 통해 스스로 생계를 책임지고 자신이 꿈꾸는 바를 사회 속에 구현할 힘을 갖추는 일은 한 인간의 자유를 보장하고 자아를 실현하는 근본적 수단이다. 한 사람이 노년에 이르러 은퇴할 때까지 역량과 성과 이외의 이유로 차이 나지 않게 경력을 유지하면서 사회적 성공을 이룩할 수 있는가는 행복한 삶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이다. ​2021년 한국사회학회에서 엄유식 연세대 사회학과 교수 등이 발표한 연구에 따르면, 한국 사회의 성별 격차는 최근 들어 더 나빠지고 있다. 관리직과 비관리직을 가리지 않고 지난 10년 동안 격차가 꾸준히 증가했다. 직급이 올라갈수록 격차는 더 심해졌다. 연령, 학력, 근속 연수의 성별 분포가 동등해지는 상황에서도 성별 관리직 비율 차이는 설명되지 않는 이유로 심화했다. 여성이 남성만큼..
부(富)와 저축의 진화 인간은 부(富)와 덕(德)이라는 독특한 형질을 가지고 있다. 여유가 있을 때 자원을 체외에 저장한 후, 나중에 활용하는 행동 전략이 부이고, 자신의 여유 자원을 주변과 나눈 후 나중에 돌려받는 행동 전략이 덕이다. (1-204쪽) ​부와 덕은 약한 수준의 공변성(한 변수가 변하면 다른 변수도 변하는 성질)이 있다. 둘 다 적합도를 높이는 형질이기 때문이다. (1-203쪽) 동물은 대개 덕이 없다. 여유가 있을 때 동종 내 비친족에게 도움을 주고 나중에 그 대가를 돌려받는 ‘시간 지연 상리 공생’ 행위를 동물은 하지 않는다. 동물은 또한 체외 식량 저장 행위, 즉 저축도 대부분 하지 않는다. 하루 벌어 하루 먹는 식으로 살아간다. 동물은 대개 빈털터리다. (1-204쪽) 진화생태학적으로 볼 때, 부는 적합..
셀라(selah) ​셀라(selah)는 히브리 성서에서 74번 발견된다. 학자들은 그 말이 본문에 등장할 때마다 독자는 읽기를 멈추고 잠시 동안 가만히 있으라는 지시라고 생각했다. 왜냐하면 이전 문장이 깊이 되새길 만큼 중요하기 때문이다. 경전 속의 시는 필연적으로 변화를 의도하며, 옮겨 적은 이는 그 변화가 읽기를 통해 시작되고 동시에 고요한 명상 속에서만 완성될 수 있음을 알았다. 셀라는 히브리 음악에도 나타난다. 합창단 지휘자가 한동안 합창단을 침묵시키는 표시라고 알려져 있다. 악곡 사이에 여백을 두는 것이다. 물론 침묵은 음악이 잦아들 때 존재한다. 셀라는 성스러운 침묵이다. 변혁을 일으키는 말, 음악, 그리고 산부인과 접수원으로부터 대략적인 정보를 얻은 이들이 영원한 변화를 앞두고 겪는 잠깐의 정지 상태이다. 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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