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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에 대한 책들

옥스퍼드 출판의 미래

아직도 출판에는 낭만이 가득하다. “신사적 분위기, 책 가득한 사무실, 고루함과 느긋함, 전통과 예술성 선호 등”은 출판을 생각할 때 가장 먼저 떠오르는 이미지다. 불멸의 작품을 남기기 위해 고뇌하는 작가들, 매력적 작품을 발굴하려 분투하는 편집자들, 아름다운 책을 만들려 노력하는 디자이너, 고상하고 우아한 이야기를 주고받으며 독자에게 책을 권하는 사서나 서점 직원 등은 출판의 인간적, 문화적 가치를 상징한다. 더 나아가 좋은 책이라고 믿으면 경제적인 손해를 기꺼이 감수할 수 있는 마음, 먼 훗날을 생각해 미지의 신인 작품에 투자할 수 있는 마음, “사상과 문화의 미개척 지대에서 일하는 흥분감, 꾸준히 세상 변화에 일조하는 능력”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 이것이 출판의 자부다.

그러나 아무리 훌륭한 출판도 책의 생산과 유통을 지배하는 경제적 법칙을 외면하면 서서히 약해져 사라진다. 앨버트 N. 그레코는 말했다. “일반적으로 미국에서 출판되는 성인서 하드커버 10권 중 7권이 적자이고 2권이 본전을 건지고 1권이 흑자를 거둔다. 출판의 경제학은 가혹하기만 하다.” 특히, 스마트폰과 소셜 미디어로 집약되는 웹 2.0, 인공 지능과 블록체인과 몰입 기계가 결합해 콘텐츠를 생산하고 소비할 웹 3.0 시대를 생각하지 않는 출판은 뿌리 잃은 풀처럼 표류할 것이다.

앵거스 필립스, 마이클 바스카 엮음, 『옥스퍼드 출판의 미래』, 정지현 옮김(교유서가, 2024).

『옥스퍼드 출판의 미래』는 지금까지 나온 출판 관련 서적 중에서 가장 최신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지난 30년 동안 출판 산업이 축적해 온 경험과 연구의 정수를 온전히 담아냈다. 덕분에 우리는 정보 혁명 이후의 현실을 명확히 이해하고, 출판산업이 이에 발맞추어 어떻게 적응하고 있는가 또는 적응해야 하는가를 알 수 있게 되었다. 출판 조직은 어떻게 달라져야 하며, 편집, 디자인, 마케팅, 저작권 등 출판 각 분야에서 어떤 혁신이 필요한가를 높은 수준에서 이야기할 수 있게 되었다.

이 책의 가장 큰 특징은 이론과 현실의 결합이다. 여러 자리에서 자주 이야기하지만, 현재와 같은 전환기 출판에선 단지 성공 사례를 모으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물론, 그런 책들이 약간의 영감과 용기를 불어넣을 수는 있다. 그러나 어떤 논의가 이론적 이해에 도달해 능동적 자기의식을 촉발하는 데까지 이르지 못하면, 흐르는 물에 반짝이는 햇살에 불과할 뿐이다. 아름답지만 곧장 거품처럼 흩어진다. 이런 점에서 『옥스퍼드 출판의 미래』는 특별하다. 이 책에 참여한 학자들과 출판인들은 출판 각 분야의 연구와 현장에서 눈부신 성취를 이룩한 최상급 전문가들이다. 이 책은 출판 현장의 장인들과 학교에서 이론적 도구를 단련한 학자들의 논의가 단단히 결합한 글들로 가득하다.

특히, 이 책은 ‘책의 질서’가 아니라 ‘출판의 질서’를 이야기한다. 문화적 가치가 있는 좋은 책을 내는 건 우리의 영원한 자부이지만, 매체 환경 변화라는 큰 흐름을 고려하지 않으면 모두 도서관 서고 속에 비운의 명작으로 남을 뿐이다. 그래서 이 책은 현재 출판산업이 맞이한 “시장 세계화, 전략의 진화, 기술 변화 등을 배경으로 출판산업이 어떻게 발전하고 있는지”에 집중한다. “인쇄를 토대로 하는 사고방식과 디지털로 가능해진 새로운 프로세스”가 어떻게 타협하고 공존하는지를 알려주고, “빠르게 변화하는 시장, 진화하는 기술, 불안정한 소통 구조 안에서 출판이 무엇이고 무엇을 하며 무슨 의미가 있는지를 이해”하도록 우리를 채찍질한다.

이런 점에서 이 책은 출판의 역사를 책의 역사, 특히 물리적 책(종이책)의 역사에 내접시키는 대신에 정보의 특정한 처리방식과 결합한다. 출판사는 이제 책이나 텍스트 매체의 제작자나 판매자, 또는 저자와 독자를 위한 서비스 제공자로 정의되지 않는다. 그보다 출판사를 더 잘 정의하는 것은 “지식재산의 거래자 또는 ‘콘텐츠의 대가’”이다. 이 책은 출판을 “다양한 정보 구조를 설계하고 유지하는 사업”으로 재정의하자고 제안한다. “출판은 저작권 없이 존재할 수 없고, 기본적으로 저작권에 의존해 가동된다.”

출판사는 콘텐츠(저작권)를 사들이거나 직접 개발한 후, 이를 종이책, 잡지나 신문, 전자책이나 디지털 콘텐츠 등 당대 미디어 환경에 맞추어 이를 적절히 제작하고 판매함으로써 이익을 남긴다. 이 일을 잘하느냐 못하느냐는 결국 지적 재산(저작권, 브랜드, 판매권 등)을 어떻게 활용할 것인지에 달려 있다. 저작권을 사들여 단지 책만 만들 수도 있고, 다른 나라에 출판권을 판매할 수도 있으며, 영화나 드라마 제작사에 판권을 넘길 수도 있고, 직접 다른 문화상품 판매에 뛰어들 수도 있다. 따라서 출판의 핵심은 책의 제조가 아니라 지적 재산의 효율적 관리다. 이런 관점은 출판을 제조에서 해방해 디지털 시대의 콘텐츠 비즈니스에 적합한 형태로 다시 상상하게 한다. 출판은 이러한 변화를 피할 수 없다.

디지털 문화의 진전에 따라 출판 행위에는 구조적 변화가 일어난다. 작품을 완결 짓고 나서 독자를 찾아 나서는 관행은 서서히 사라진다. “새로운 미디어생태계에서 콘텐츠는 단일한 법칙을 바탕으로 출판되고 배포된다. 선 출판, 후 필터링이라는 법칙이다.” 그 결과, 글쓰기는 하나의 ‘퍼포먼스’로 바뀐다. 먼저, 독자에게 내용을 공개하고, 함께 지켜보면서 참여하고 즐기며, 대화를 통해 수정하고 다시 쓰고 편집하는 방식이 일반화한다.

이제 저자는 글을 팔아 돈을 버는 대신 글을 이용해 ‘명성’이라는 화폐를 얻는다. 음악가들이 음원을 무료로 뿌리고 공연으로 돈을 벌듯, 저자들 역시 무단 복제를 막는 대신 콘텐츠를 먼저 공개해서 사람들이 자유롭게 읽고 추종하며 마음껏 이용하게 함으로써 명성을 쌓고, 명성을 활용해서 새로운 형태의 수익을 창출하는 쪽으로 행동 양태가 바뀐다. 이는 필연적이다. 굳이 돈을 내지 않아도 즐길 수 있는 콘텐츠가 무한정으로 늘어난 시대에 종래처럼 “콘텐츠 희소성에 의존”하는 전략은 파산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디지털 시대에 접어들면서 전 세계 출판계가 확연히 알게 된 사실이 있다. 흔한 착각과 달리, “인류 사회에서 읽기의 역할이 확고히 자리 잡지 못했다는 점”이다. “읽기는 문화와 지식에 접근하기 위해 꼭 필요한 기술”이고, “정규교육을 통한 책 읽기의 사회화”가 꾸준히 진행되고 있으나, 인터넷이 등장한 이후 사람들은 확실히 책을 예전보다 덜 읽는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다. “독자를 계속 책 산업의 굳건한 소비자로 만들 수 있”을지도 불확실하다. 이에 따라서 괜찮은 책을 내면 ‘어딘가’ 독자가 존재하리라는 출판계의 오랜 믿음도 약해지는 중이다.

읽기 자체가 약해진 건 아니다. “다양한 화면 기기로 접근할 수 있는 인터넷은 이용자의 읽기 시간을 크게 늘린다. 사람들이 온라인에 사용하는 시간에서 읽기에 할애하는 시간은 상당하다.” 다만, 웹 사이트, 전자우편, 소셜 미디어 등 화면에서 사람들이 읽고 쓰는 “새로운 텍스트들은 디지털 네트워크에 완벽하게 적응된, 길이와 수명이 모두 짧은 콘텐츠이다. 트위터, 트레일러, 요약, 미리보기, 마이크로 픽션(microfiction), 정보 캡슐, 뉴스 속보, 웹 드라마 등은 모두 스낵컬처에서 생겨났다.” 이 ‘짧고 조각난 텍스트’들은 출판산업과 아무 관련 없다. 사람들이 책, 잡지, 신문을 읽는 시간은 전 세계에서 감소 중이다. 오늘날 출판에서 “소비자로서의 독자는 더욱 규정하기 힘든 존재”로 변해가고 있다. 특히, 한국은 전 세계에서 비독자 비율이 가장 높은 나라에 속한다.

독자가 줄어드는 상황에선 독자를 가능한 한 정확히 파악하는 게 중요하다. 규모가 커지는 시장에선 모든 출판사가 이익을 창출할 수 있지만, 줄어드는 시장에선 경쟁 강도가 심해지면서 지금까지 잘해왔던 출판사도 헛된 시도를 거듭하다 무너질 수 있다. 독자층 축소는 출판산업에 새로운 과제를 던진다. 독자 구축이다. 독서로부터 빠르게 이탈하는 젊은 층을 붙잡아 독자층을 단단히 하고, 긴 글 읽기를 장려하는 사회문화적 실천을 조직해서 독자가 “출판산업의 의미 있는 소비자로 남아 있을 수 있도록” 노력을 다해야 하는 것이다.

물론, 앞으로 어떤 상황이 오더라도 책은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따라서 출판의 사회적, 문화적 역할도 없어지지 않는다. 엄혹한 경제적 질서가 관통하는 가운데에서도 편집자들은 시장이 미처 알지 못하는 어떤 여분과 틈새를 이용해 창조적 성과들을 끝없이 쏟아낼 것이다. “끊임없이 변화하는 흥미진진한 출판 시장에서 편집인과 출판인, 판매 및 마케팅 담당자가 무작위성과 혼돈, 불확실성을 마주했을 때 자신의 판단을 활용할 수 있는 여지는 언제나 있다.”

책은 상품 이상의 존재이다. 그것은 인류 정신의 정화이고, 지혜의 정수이다. “출판은 사업이지만, 우리 상품은 폭넓은 사회적 의미를 지닌다. 미래의 성공에 대한 우리의 사고방식에서도 중요한 부분을 차지한다.” 잘 팔리는 책을 출간해 이익률을 높이는 게 출판을 규정할 순 없다. 편집과 기획이 시장과 마케팅을 이기는 순간이 존재하지 않는 출판사는 출판사라고 부를 수 없다. 책의 문화적 특성과 경제적 특성 사이에서 끝없이 줄타기하면서도, 출판은 독재와 싸우고, 권위에 저항하며, 기득권을 무너뜨리는 싸움을 멈춘 적이 없다.

출판엔 생각을 혁신하고, 문화를 진화시키며, 공동체 관습을 재조직하는 역능이 존재한다. 인류의 미래를 위해 이 힘을 어떻게 사용할 것인가를 숙고하지 않는다면, 결국 출판의 존재 이유는 허물어진다. 신자유주의가 기록적 불평등을 가져오고, 인류세가 파멸적 위기를 가져오는 이 시대에 출판은 정치적, 사회적, 환경적 책임을 다해야 한다. “믿을 수 있는 출판사는 콘텐츠를 신뢰하고 책임지며 저자를 지지한다. 이것이 단순히 콘텐츠를 유통하는 중개자와 출판사의 차이다.” 기억할 만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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