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사상사에는 ‘고전(classic)’이라 불리는 일련의 텍스트들이 존재한다. 이 경우에 ‘고전’이란 단순히 ‘오래된 책’이라는 의미가 아니다. ‘시대를 초월해 부단히 읽히며, 줄곧 참조의 대상이 되어온 텍스트’야말로 진정한 의미의 ‘고전’이다.
정치사상사란 ‘고전’을 끊임없이 읽어온 역사라 하겠다. 사상가들은 모두 자기만의 기준에 따라 ‘고전’을 선택했고, 그것을 깊이 읽어가는 과정에서 자기 나름의 사상을 형성했다. 다시 말해 ‘고전’을 읽고 거기에서 얻은 관점이나 사고법을 바탕으로 자기 눈앞에 있는 현실과 겨루고자 했다. 그리고 그들의 저작은 새로운 ‘고전’의 대열에 합류했다.
‘인문주의(humanism)’란 본래 이처럼 ‘고전’을 독해하는 지적 영위의 전통을 가리키는데, ‘정치적 인문주의(civic humanism)’란 특히 정치에 초점을 두는 것이다. 거기에서는 고대 그리스나 로마가 극히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자유’나 ‘민주주의’ 같은 개념을 낳은 고대 그리스를 당연히 중시하지만, (중략) 로마에서 강조된 ‘공공의 이익’이라는 이념을 계승하는 지적 조류, 즉 ‘공화주의’가 지닌 중요성도 그리스 못지 않다.
― 우노 시게키, 『서양 정치사상사 산책』, 신정원 옮김(교유서가, 2017) 중에서
인문주의란, 결국 책이라는 거울, 즉 읽기를 통해 단련된 눈으로 현실을 이해하고, 그 문제를 돌파하려는 지적 전통을 뜻한다. 이때 인문 사상가들이 책에서 얻은 것이 무엇일까. 개념(concept)이다. 세상은 그냥 보면 아무것도 안 보인다. 개념을 통해서 비추어 볼 때, 비로소 그 실체가 드러난다. 개념으로 현실을 범주 짓고, 현실을 통해 개념을 진화시켜 가는 것, 그것이 인문학이다.
본문에서 ‘정치적 인문주의(civic humanism)’라고 번역한 것은 흔히 ‘시민적 인문주의’라고 옮겨왔다. 이때의 정치는 사적 언어, 즉 경제적 이해관계를 따지거나 감정적 격동을 드러내는 게 아니라 공동체를 위해 무엇이 최선인가를 묻고 따지는 코뮌의 언어로 말하는 행위이다.
정치를 정치답게 만드는 일, 즉 자유나 민주 같은 이념이 실현되는 건 이런 공화의 언어가 전제되지 않으면 불가능하다. 소크라테스를 살해한 건 아테네 민주주의 아래의 정치였다.
시민적 인문주의는 금욕적 자기 수행, 즉 명상적 삶을 찬미했던 페트라르카의 개인적 인문주의와 대비된다. 콜루초 살루다티, 레오나르도 브루니, 니콜로 마키아벨리 등 르네상스 시대 피렌체 인문주의자들이 그 길을 개척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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