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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職)/책 만드는 일

고비원주(高飛遠走, 높이 날고 멀리 뛰어라), 동학의 초기 출판 활동


"혁명가는 침상에서 돌아가는 법이 없다. 나도 서울 한복판에서 죽을 것이다. 아버지가 길바닥에서 쓰러질지라도 얘들아 너희들은 울지 마라, 울지 마라, 일어나 싸워라 싸워라!"

몽양 여운형이 자녀에게 남긴 말이다.

그는 1945년 8월 15일 광복 이후, 사흘 만에 첫 피습을 당하고, 이후 열두 번에 걸친 테러 끝에 1947년 7월 19일 오후에 총에 맞아 목숨을 잃었다.

김용옥의 <새 시대의 새 지도자 몽양 여운형>(통나무, 2025)에서 접했다. 이 책은 여운형의 평전이라기보다는 몽양이 남긴 문장들에 기대어 현 시대에 대한 격분과 함께 미래를 향한 길을 열어보려는 정신적 애씀이 담겨 있다.

그래서 도올 책 특유의 산만함과 비약이 눈에 거슬리지만, 곳곳에 예리하고 영감 넘치는 문장들이 담겨 있다. 가령, 이런 문장들은 무척이나 아름답다.

"진리는 고통스러울 때만이 경이로운 것으로 나타난다. 두드림은 행복한 결실을 목표로 사는 것이 아니라 존재함의 경이로움을 발견하는 것이다."

이 책엔 동학의 두 근본 경전 <동경대전>과 <용담유사>의 최초 출간에 관한 일화가 나온다. 흥미로운 이야기다. 여기에 옮겨 둔다. 

논어, 성경, 불경 등 다른 여러 종교 경전과 달리, 동학 경전은 독특함은 그 창시자인 수운 최제우가 1864년 3월 이를 직접 저술했다는 데 있다.

도올에 따르면, 최제우는 2대 교조 최시형에게 이를 넘기면서 무엇보다 두 책을 출간하는 대업을 맡겼다. 그 과업이 바로 고비원주(高飛遠走, 높이 날고 멀리 뛰어라)라는 말에 집약되어 있다. 편집자들이 마음에 새길 만한 표현이다. 진실을 드러내 고양하고 널리 전하라.

최시형은 경북 영해를 거쳐서 단양에 숨어든 후, 1880년 강원도 인제 산골짜기에서 비로소 이 사명을 완수할 수 있었다. "5월 9일 김현수의 집에 각판소를 설치하고, 11일 개간한 후, 6월 14일에 <동경대전> 총 100부를 인출했다." 인출에 사용한 활자는 목활자였다.

<용담유사>는 <동경대전>에 담긴 내용을 4.4조 가사조 노래로 풀이한 책이다. 용담가, 안심가, 권학가 등 모두 8편의 노래가 실려 있다. 흔히, 최시형이 저술한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도올은 <천도교회사초고>에 근거하여 이 역시 최제우의 저술로 본다.

이 노래집을 최초로 인출한 곳은 최시형이 오랫동안 숨어 있던 충북 단양이다. 정확히 말하면, 1881년 6월 샘골의 여규덕 집에서 최초로 수백 권이 간행되었다. 여규덕은 여운형의 작은할아버지다. 아직 그 실물이 발견되지 않아서 어떤 활자로 찍었는지는 알 수 없다.(아마도 한글 소설에서 사용되던 활자가 아니었을까?)

이후, 동학의 경전 간행은 대담해진다. 1883년에 목천군 김은경의 집에 인간소를 설치해 <동경대전> 천여 부를 다시 간행하여 각 포에 반포했다. 이때에 참여한 사람 중에 여규신이라는 이름이 등장한다. 여운형의 할아버지다. 이는 여운형의 사상적 뿌리에 동학이 있음을 알려준다. 몽양은 <용담유사>가 최초로 간행된 단양 샘골에서 태어났고, "양주 땅에서 소년 시대를 순전히 조부의 사상적 감화를 받으면서 자라났다." 자라서는 비록 서양식 학문을 배우고, 기독교에 영향을 받았지만 말이다. 

몽양 여운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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