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평론과 서평

(312)
밑줄과 반응 2012년 5월 29일 (화) 1 기술적 후진성에 대해 이야기해 보자. 미디어 비즈니스는 기술 비즈니스가 아니다. 그러나 미디어 비즈니스는 특히 기술적 변동에 따라 영향을 받을 수 있다. 나는 이른바 유서 깊은 출판사인 파버 앤드 파버(Faber & Faber)를 경영하고 있다. 우리 비즈니스는 대부분 저자로부터 저작권을 사들이고 독자들을 발견하며 저자들을 위한 가치를 창조하는 일에 기반을 두고 있다. 그런데 지금 우리는 이 일을 하는 방법에 대해서 잘 알지 못한다. 창업한 이래 80년 동안 우리는 인쇄본(책)을 통해서만 그 일을 할 수 있다. 그런데 지금 우리는 책, 전자책, 온라인 학습(우리가 직접 구축한 강좌들), 「황무지」 애플리케이션 같은 디지털 출판, 그리고 웹을 통해서 그 일을 할 수 있다. 기술적 변동은 기회를 박탈하는..
밑줄과 반응 2012년 5월 27일(일) 1 삶에 찌들려 정신적 압박을 받고 있는 사람들은 축제를 몰라요. 일하고 먹고 자는 게 그네들의 삶이죠. 사람은 그저 생존 경쟁에서 살아 남아야 하는 존재로만 생각해요. 태어난 것도 축제, 결혼하고 사랑하고 죽는 것도 축제인데 그런 생각을 못해요. 교육이 자연스러움을 제지하고 있어요. 자연스러운 행동을 버릇없다고 하고 예의 없다고 해요. 그래서 부자연스러움이 자연스러움이 되어 버리죠. 마찬가지로 자유롭지 못할 때 부자연스러워지는 거예요. 교보문고에서 발행하는 책 잡지 《사람과 책》 2010년 6월호에 실린(16쪽) 홍신자의 인터뷰를 읽다가 마음에 담아 둔 글이다. 살다 보면 이렇게 오래전 잡지를 청소 등을 하다가 발견해 쭈그려앉아 읽다가 무릎을 치는 경우가 있다. 선(禪)의 화법들을 한없이 동경하면서 동..
밑줄과 반응 2012년 5월 26일( 토) 1 "롤-리-타. 세 번 입천장에서 이빨을 톡톡 치며 세 단계의 여행을 하는 혀끝. 롤. 리. 타." (『롤리타』(블라디미르 나보코프 지음, 권택영 옮김, 민음사 펴냄), 15쪽) 활자 유랑자 금정연 씨가 프레시안에 쓴 글 「김수영의 독설 "'목마와 숙녀' 박인환은 양아치!"」에서 마주친 구절. 나보코프는 감각의 천재다. 한 사람의 마음속에 사는 영원한 거주자를 이토록 감각적 표현으로 보여 준 이는 많지 않다. 눈을 감고 가만히 굴려 본다. 내 마음속 그늘에서 분주히 움직이는 그 수많은 이들의 이름을. 혀끝에 올려서 한 자씩 튀겨 가면서 입술과 혀의 움직임을 생각해 본다. 내 혀끝은 어떤 모양을 그리면서 움직이고 있는가? 문장은 체험과 관찰과 사유를 통해서만 비로소 단련된다. 멋진 구절이다. 롤리타 블라..
수학, 문학적 영향의 비밀을 파헤치다 이번주 월요일 《가디언》에 제법 흥미로운 기사가 실렸다. 다트머스 대한 수학과 대니얼 록모어 교수를 중심으로 한 미국의 수학자들이 1550년부터 1952년까지 약 500년 동안 씌어진 작품 7,733권을 대상으로 통계학적 연구를 진행한 것이다. 작가 수로는 537명이며, 대상 텍스트는 프로젝트 구텐베르크(www.gutenberg.org/)에서 디지털화한 퍼블릭 도메인 작품을 이용했다. 프로젝트 구텐베르크는 1971년 마이클 하트가 기획해 시작한 사업으로 인류의 문자 유산을 디지털화한다는 목표 아래 매주 50여 권의 전자책을 새로 만들어 무료 배포하는 곳이다. 여기서 꾸준히 만들어 온 전자책이 쌓여서 빅데이터화하자 수학자들이 달려들어 이를 분석해 보겠다고 나선 것이다. 연구 책임자인 미국 다트머스 대학 수..
이원 시집 [그들이 지구를 지배했을 때] / 한겨레 게재 칼럼 지하철 옆자리의 한 여학생이 번개처럼 손을 놀린다. 손바닥의 반만한 휴대폰을 들고, 다닥다닥 붙어 있는 문자판을 번개같이 훑어가면서 어딘가로 끊임없이 메시지를 보낸다. 그 모습이 신통방통하여 한참을 쳐다보고 있자니, 고개를 홱 돌려 외면해 버린다. 그렇다. 그들에게도 소통이 필요하다. 어딘가에 있는 누군가와 마음을 털어놓고 비밀스러운 이야기를 하고 싶어한다. 그들은 전자 소통 도구와 연결된 새로운 신체를 갖고 있다. 그래서인가? 스크린 위에서 쏜살같이 스쳐가는 그들의 내면은 가만히 들여다보는 것조차 꽤 힘들다. 아니, 거부당한다. 그 여학생의 고개 돌리기, 완강한 부정과 몸을 섞어 소통하기 위해 젊은 시인 이원은 자신의 자아를 전자 신체로 개조하고 그들의 언어로 시를 쓴다. 소통을 위해 몸을 바꾸고 언어..
시여, 사랑이여, 비극이여 _ 이응준 시집 [애인]의 발문 이응준 시집 [애인](민음사)이 출간되다. 그와의 우정을 표시하기 위해 오랜만에 짤막한 글을 발문의 형태로 한 편 쓰다. 시여, 사랑이여, 비극이여 이응준 시집 [애인] 발문 하나가 둘을, 이별이 사랑을, 고독이 공존을, 고요가 환호를 침식한다. 사랑의 소멸, 이것은 낭만적 환영의 결과가 아니다. 희망의 끝자리, 좌절의 절벽 앞에 선 자의 절망이 아니다. 거기에 숙명적 체념이나 운명적 슬픔 같은 것은 없다. 생계와 생명을, 고여 썩어 가는 삶과 약동하는 죽음을 맞바꾼 자의 분투가 있을 뿐이다. 그 분투는 모든 것을 대가로 치른다. 한없이 사랑을 갈망하지만 오로지 혼자로서만 살아 있을 수 있는 짐승이 모든 곳에서 출현한다. 연애하는 짐승의 무정함과 무정한 짐승의 연애가 빚어내는 기이한 변증이 빛을 어둠으로..
더글러스 러시코프, [통제하거나 통제되거나] 미래는 미디어를 부리는 자의 것 페이스북·트위터...그 노예가 되지 마라숨은 책 찾기 1 더글러스 러시코프의 『통제하거나 통제되거나』장은수 민음사 대표 편집인, 사진 민음사 | 제267호 | 20120421 입력 20년 전 내가 편집자 생활을 시작할 때부터 우리는 ‘디지털 충격’에 시달려 왔다. 타자기 대신 컴퓨터가 등장하고, PC 통신과 인터넷이 등장하고, 블로그가 등장하고, 카페가 등장하고, 모바일이 등장하고, 소셜미디어가 등장하고…. 꾸던 악몽이 그치기도 전에 다시 꾸는 악몽 속에서 차례로 출몰하는 유령처럼 디지털은 연신 우리 삶을 위협하고 있다. 최후의 원고지 세대 편집자이자 최초의 컴퓨터 세대 편집자인 나는 충격과 공포로 점철된 지난 20년을 헤드폰 쓰듯 양쪽 귀를 필자 둘의 목소리로 감싼 채 ..
조지프 요아컴, 일흔 살부터 그림을 그린 화가 큐레이션의 시대](사사키 도시나오, 한석주 옮김, 민음사, 2012)에는 평생 방랑자로 살다가 일흔 살에 비로소 그림을 그리기 시작해 이름을 날린 한 미국 화가의 이야기가 나온다. 그의 이름은 조지프 요아컴(Joseph Yoakum, 1890년 2월~1972년 12월)이다. 국내에는 전혀 소개되어 있지 않은 이 화가는 (심지어 네이버 등에서 한글 포스트가 검색이 되지 않을 정도다.) 일흔 살이 넘은 나이로 젊어서 전 세계를 떠돌았던 자신의 기억을 고정해 두고 싶어서 처음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그의 그림에는 아메리칸 네이티브들의 원시적 강렬함이 고스란히 살아 있다. 아래 사사키 도시나오의 글을 요약해 소개하고 토속성과 몽환성이 한데 어우러진 그의 그림을 몇 장 덧붙여 둔다. 조지프 요아컴은 1890년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