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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론과 서평/책 읽기

도쿄대학 철학과 수업은 이렇게 대단한가

사회생활을 경험한 뒤 지적 욕구에 불타고 있던 터라 일주일에 한 번 또는 두 번 나가는 세미나 수업을 많이 신청했습니다. 그리스어로 플라톤을 읽고, 라틴어로 토마스 아퀴나스를 읽고, 프랑스어로 베르그송을 읽고, 독일어로 비트겐슈타인을 읽었습니다. 그리고 학과 외 수업으로, 히브리어로 진행되는 구약성서 강독을 읽었습니다. 또한 한문 강독인 『장자 집주(莊子集註)』 강의도 들었습니다. 그리고 아라비아어 수업, 페르시아어 수업도 들었습니다. 모두가 소수 학생만이 듣는 수업이어서 결석을 불가능하였습니다. 매일 아침부터 밤까지 공부만 했던 셈입니다. 

당시 철학과 수업에서 한 구절 한 구절 소홀함 없이 철저하게 읽어 나가던 수업 방식, 더욱이 교수님의 엄격한 지도 아래 땀을 흘리며 정독을 하던 시간은 매우 소중한 경험이 되었습니다.



다치바나 다카시의 『나는 이런 책을 읽어 왔다』(이언숙 옮김, 청어람미디어, 2001)를 우연히 읽기 시작했다. 독서 에세이로 정평 나서 스테디셀러로 있는 책인데, 본래 이런 책은 그다지 즐기지 않으므로 미루어 두었다가 우연히 눈에 들어와 읽어 버렸다. 

읽는 내내 다치바나 특유의 솔직하고 직설적인 독서론이 펼쳐져 전혀 지루하지 않았다. 이 책은 한 인간이 어떻게 책과 공생해 왔는가를 반세기 가까이 추적해 온 기록인 동시에 읽기가 어떻게 쓰기를 만들어 냈는가를 드라마틱하게 보여 준다. 전혀 에두르지 않고 자신이 믿는 바를 담백하게 써 온 그의 글쓰기 공력은 과연 대단했다.

탐사 전문 작가답게 다치바나는 자신의 독서를 거의 실천적으로 정의한다. 그는 전적으로 쓰기 위해 읽는다. 즐거움을 위한 독서보다는 지식의 최첨단을 확인하고 관련 전문가를 만나 이를 독자들이 이해하기 쉬운 언어로 전달하는 어려운 임무를 수행하기 위해서 주로 책을 읽는다. 그 양은 정녕 엄청나서 주제 하나에 서가 하나를 채우는 게 다반사이다.

독서에 대해서라면 내 생각과 다른 부분이 많지만 이 책에서 나를 가장 놀라게 한 것은 스물일곱 살에 다시 도쿄 대학 철학과에 입학한 다치바나의 공부 기록이었다. 도쿄 대학 불문과를 졸업하고 잡지사 기자 생활을 하다가 다시 입학했기 때문에 본인의 고백대로 학구열에 불타올라서였겠지만, 도쿄대학은 이렇게 대단한 곳이었던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런 공부를 할 수 있는 대학이 있고, 실제로 이런 공부를 하는 학생이 있는 것은 정말 부러운 일이다. 일본어를 익혀서 도쿄 대학에 가서 공부하고 싶어졌다. 정말 다치바나가 죽도록 부러웠다. 20대에 이런 공부를 전혀 하지 못했던 내가 분했다. 지금이라도 이런 분함을 풀 길은 없을까. 어디 대안 공부 모임이라도 나가 봐야겠다.


PS. 이 책에 실려 있는 다치바나 다카시의 글 「퇴사의 변」은 사회인들에게 읽히고 싶은 명문이다. 전체를 여기에 옮기고도 싶지만, 일단 내가 밑줄을 두 번 그어 두었던 곳만 여기에 소개한다.


진정으로 본다는 것은 자기 자신을 봄으로써 자기 자신과 다른 사람의 관계를 보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관점을 잃어버린 채, 다른 사람과 다른 사람의 관계만 보려고 한다면, 보았다고 여기지만 결국은 아무것도 보지 못한 결과만 남게 되는 것은 아닐까? 

이런 의문들이 나를 엄습해 오고, 점점 물리적으로 보는 것에만 열중하다가는 얼마 지나지 않아 물리적으로 보는 것에 완전히 길들여져 버릴 거라는 생각이 들었을 때, 나는 보다 많은 것을 보기 위해 지금은 조금 덜 보기로 결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