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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론과 서평/책 읽기

생산과 소비의 새로운 윤리를 찾다

낭비 사회를 넘어서낭비 사회를 넘어서 - 10점
세르주 라투슈 지음, 정기헌 옮김/민음사


세르주 라투슈의 낭비 사회를 넘어서(정기헌 옮김, 민음사, 2014)계획적 진부화라는, 경영 전문가들 사이에서는 익히 알려졌으나 일반인에게는 거의 알려지지 않은 상품 생산과 소비 양식을 다룬다계획적 진부화는 소비를 촉진하고 생산을 지속하기 위해 제품에 인위적으로 수명을 부여하여 강제로 폐기를 유발하고 재구매를 유도하는 것을 말한다. 처음에는 자동차, 스타킹, 면도날, 전구 등 공산품에 적용된 이 개념은 일회용품의 출현에 따라 상품 전반으로 퍼져 나갔고, 유통기한 개념이 도입되면서 농산물로 확대되었다. 더 나아가 연봉 계약직, 비정규직 노동자 등 인간 자체를 일시적으로 고용하고 폐기하는 인간적 진부화에까지 이르게 되었다.

현재 우리가 흔히 겪고 있는 다음과 같은 현상이 바로 계획적 진부화의 예들이다.


― 컴퓨터 하드 디스크는 3년 정도의 수명을 염두에 두고 만들어진다.

― 안경다리는 수명이 2년 정도면 약해져 부러진다.

― 프린터에는 인쇄 매수가 18000장이 넘으면 자동으로 작동을 멈추게 하는 칩이 삽입된다.

― 몇몇 기업은 마모되지 않는 면도날에 대한 특허를 소유했지만 생산을 포기했다.

― 1940년 듀폰사는 올이 풀리지 않는 스타킹을 생산했지만 제품 생산을 중단했다.

― 아이팟의 배터리는 수명이 18개월로 제한되어 있으며 수리조차 불가능하다.

― 몇몇 기업은 반영구적일 수도 있는 전구의 수명을 1000시간으로 제한하는 데 담합했다.

― 다기능 라디오는 송수신 장치가 아니라 다른 기능을 하는 섬세한 부품 탓에 1년 만에 망가진다.

― 토스터나 커피 머신이 온도 조절 장치의 잦은 결함 때문에 작동을 멈춘다.

― 우유, , 채소 등 멀쩡한 식품들이 지나치게 짧은 유통 기한 때문에 폐기된다.

― 시민의 대량 수송을 책임지는 경전철이 사라지고 자동차, 버스 등이 도입되어 체증을 유발한다.

― 주택이 감가상각 기간에 맞추어 지어지고, 불과 수십 년도 되지 않아 재건축된다.

― 제품이 보증 기간이 끝나자마자 고장을 일으킨다.


이 책을 쓴 세르주 라투슈는 반성장에 기반을 둔 새로운 삶의 양식을 탐구하고 있는 프랑스의 경제 철학자이다. 과잉 생산과 소비를 찬양하는 자본주의 경제체제를 비판하고 새로운 사회 경제 시스템을 구축하려는 그의 작업은 1960년대 이래로 일관되게 지속되어 왔지만, 성장이 한계에 이르고 환경이 소비를 떠안지 못한 채 연속적인 재앙을 불러일으키고 있는 오늘날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크게 주목을 받고 있다. 2008년 세계 경제 위기 이후, 자본의 탐욕과 그를 촉진하는 신자유주의 시스템이 전 세계를 파멸로 이끌어 가리라는 사회적 합의가 점차 커져 가고 있기 때문이다.

자본주의는 소비에 행복이 달려 있다고 끊임없이 역설하지만, 라투슈에 따르면, “현대의 터보 소비자들이 과잉 소비를 통해 얻는 것은 기껏해야 상처와 역설로 가득한 행복일 뿐이다.”(20) 이는 불과 수십 년 전만 해도 상상할 수 없는 삶의 태도였다.

“20세기 중반까지만 해도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경제란 무엇보다 절약하는 행위를 의미했다. , 자연 자원을 아껴 쓰고 물건을 조심스럽게 다루고 되도록 버리지 않는 것이었다.”(49) 자본주의는 이러한 삶의 태도에서는 더 이상 자신의 영토를 확장할 수 없으므로, 각종 신용제도의 도입과 광고를 통한 유혹 등을 통해 이를 파괴해 버린다. 현재의 쾌락에 집중하도록 함으로써 과거의 삶을 망각하게 만들 뿐만 아니라 미래 자체에 대한 의식까지도 파괴하는 것이다. 그 대신 자본주의가 약속하는 것은 무한 성장과 대량 소비이다.

그러나 이렇게 계속 성장하는 사회는 오히려 쇠퇴를 대량 생산한다. “일회용 제품이 갈수록 빠른 속도로 확산되면서 상품은 쓰레기로 버려지고, 인간은 소외되거나 사용 후 해고된다.”(86) 이 끔찍한 지옥은 결코 가능할 수 없다. 왜냐하면 현실이 견디지 못하고 위기 또는 재앙의 형태로 회귀”(90)하기 때문이다. 그중에는 지구가 더 이상 생산의 한계를 견딜 수 없어서 붕괴하는 극단적인 상황도 상상할 수 있다. 점차 증가하는 이상 기후와 자연 자원의 고갈 등은 그 중요한 증거이다.

이러한 소비 사회의 한계를 넘어서기 위해 라투슈는 탈성장 사회를 대안으로 내세운다. “환경을 파괴하는 상품을 보이콧하고, 기술적 금욕을 실천”(107)함으로써 생산과 소비 과정을 자연의 순환과 비슷한 선순환으로 만드는 것, 다시 말해 순환 경제를 발명하는 것”(102)이다.

오늘날 라투슈와 마찬가지로, 자본주의가 강요하는 생활양식을 넘어서 새로운 삶의 태도를 형성하려는 시도가 전 세계 곳곳에서 일어나고 있다. 이는 오랫동안 자본에 의해 식민화된 우리의 의식을 깨워서 자연과 인간에 대한 새로운 관계들을 구축해 가려는 일이기도 하다.

이 책은 짧지만 강렬하다. 자본주의 경제의 핵심적 작동 원리가 얼마나 우리 삶을 파괴하는지를 생생하게 보여 주기 때문이다. 새로운 삶의 윤리를 찾아가려는 모든 이에게 일독을 권한다.

http://bookedit.tistory.com2014-05-04T10:55:280.310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