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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론과 서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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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이의, 종이를 위한, 종이에 의한 애도와 비탄과 애처로움. 시의 한 종류인 엘레지의 특징들이다. 위키디피아에 따르면, 사자를 위한 송가(送歌)나 애가(哀歌)로 쓰인다.종이가 죽었단 말인가. 언제, 어디서, 어떻게, 왜. 종이와 같은 불멸의 물체가 죽을 수 있단 말인가? 맙소사, 말도 안 돼! 종이가 죽었다면 당연히 무척이나 슬프겠지만, 이런 일은 도저히 일어날 수가 없다. 그런데 『페이퍼 엘레지』(홍한별 옮김, 반비, 2014)에서 영국의 작가 이언 샌섬은 ‘엘레지’라는 제목을 붙이고는 이미 사망 통지를 받아 버린 종이의 파란만장한 생애를 기록해 나간다. 종이가 죽고 인간이 살아남았다면(정녕 그럴 수 있기만 하다면), 어둡고 우울한 제목이 붙은 이 책은 아마도 ‘살아남은 자의 변명’에 해당할 것이다. 그러나 제목의 어두움, 그러니까 애도..
도쿄대학 철학과 수업은 이렇게 대단한가 사회생활을 경험한 뒤 지적 욕구에 불타고 있던 터라 일주일에 한 번 또는 두 번 나가는 세미나 수업을 많이 신청했습니다. 그리스어로 플라톤을 읽고, 라틴어로 토마스 아퀴나스를 읽고, 프랑스어로 베르그송을 읽고, 독일어로 비트겐슈타인을 읽었습니다. 그리고 학과 외 수업으로, 히브리어로 진행되는 구약성서 강독을 읽었습니다. 또한 한문 강독인 『장자 집주(莊子集註)』 강의도 들었습니다. 그리고 아라비아어 수업, 페르시아어 수업도 들었습니다. 모두가 소수 학생만이 듣는 수업이어서 결석을 불가능하였습니다. 매일 아침부터 밤까지 공부만 했던 셈입니다. 당시 철학과 수업에서 한 구절 한 구절 소홀함 없이 철저하게 읽어 나가던 수업 방식, 더욱이 교수님의 엄격한 지도 아래 땀을 흘리며 정독을 하던 시간은 매우 소중한 ..
쿤데라, 참을 수 없는 관능의 가벼움 끝없이, 끝없이 계속되는 투덜거림, 새로운 작품이 나올 때마다 반복되는 질문들. 네이버 지식iN 등에 넘쳐 나는 기이한, 정말 기이한 회귀들. 가령, 연어 떼처럼 쿤데라의 새로운 작품 앞으로 돌아왔다가 흩어질 때가 되면 어김없이 쏟아지는 말들, 말들, 말들.“밀란 쿤데라의 소설을 읽었습니다. 그런데 몇 번을 다시 봐도 무슨 얘긴지, 주제라든가 말하려는 바를 알 수가 없었습니다. 도대체 쿤데라 소설에서 말하는 게 무엇입니까?” “밀란 쿤데라의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이 슬픈 내용인가요? 저는 소설이 너무 어려워서 잘 이해가 안 돼서 모르겠는데, 지인 중에 펑펑 울었다는 분도 있어서. 솔직히 저는 봐도 슬픈 건지 아닌지 모르겠네요.”쿤데라의 작품에는 분명히 읽기를 촉발하는 동시에 골치를 퍼뜨리는 힘이..
『무의미의 축제』를 읽고 편집을 생각하다 “내린다는 느낌보다는 공기 중에 가득한 느낌의 가랑비.”새벽에 일어나 이케자와 나쓰키의 『문명의 산책자』(노재명 옮김, 산책자, 2009)를 읽다가 밑줄을 그어 두었는데, 예감일까, 하루 종일 이런 비가 홍동에 내렸다. 도서관 창밖으로 보이는 공기는 맑았던 어제와는 달리 무겁고 축축하지만, 힘껏 집중하지 않으면 비가 내린다는 것을 알아채기 어렵다. 이곳의 소리는 풍부하다. 멀리에서 끊임없이 산비둘기가 운다. 바람이 나뭇가지를 어루만지는 소리, 엄마를 따라 온 아이들 웃음소리, 건너편 도서관 회의실에서 중학생들이 토론하는 소리도 가끔씩 창턱을 넘어온다. 길 건너 논에서는 벼들이 낟알을 실어 고개가 휘어지기 시작했다. 초록에서 노랑으로 들의 색깔이 막 바뀌려는 참이다. 음력으로 표시하는 자연의 절기는 정확하..
기억과 망각의 이중주 당신의 그림자는 월요일 - 김중혁 지음/문학과지성사 김중혁의 세 번째 장편소설 『당신의 그림자는 월요일』(문학과지성사, 2014)는 최근 한국 소설에서 기이한 열정을 불러일으키고 있는 테마인 기억과 망각의 문제를 다루고 있다. 프라이버시의 자발적 유포에 의해 지탱되는 포스트 프라이버시 사회를 향해 무반성적으로 달려들고 있는 한국 사회의 광적 열풍이 작가들의 예민한 무의식을 위협하기 때문일 것이다. 김영하의 『살인자의 기억법』(문학동네, 2013)과 마찬가지로 이 소설 역시 범죄소설의 외피를 쓰고 있지만, 범죄의 극적인 해결보다는 포스트프라이버시 사회의 기억과 망각이라는 사회철학적 문제를 사유하는 데 힘을 쏟고 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탐정물 특유의 지적 재미와 말초적 자극이 약한 것만은 아니다. 그것은..
권력의 말과 문학의 말 말의 정의 - 오에 겐자부로 지음, 송태욱 옮김/뮤진트리 오에 겐자부로의 『말의 정의』(송태욱 옮김, 뮤진트리, 2014)는 오키나와, 히로시마와 나가사키, 그리고 후쿠시마를 문학적 에세이의 형태로 사유한다. 이 세 장소는 “인간의 교만 위에서 성립한 지금의 삶”의 뿌리와 귀결을 드러내는 중요한 공간적 상징이다. 태평양 전쟁 말, 오키나와에서는 강요된 자결이 있었다. 기울어져 가는 전세 속에서 일본군은 도카시키지마 섬 주민에게 ‘집단 자결’을 강요하고, 군대가 건넨 수류탄으로 300명 이상이 자결하고 그러지 못했던 주민들은 한낱 어린아이까지도 가족이 도끼나 낫, 또는 손으로 죽인 사건이 있었다.(오에는 이 사건을 고발해 쓴 『오키나와 노트』 때문에 소송을 당했고, 결국 무혐의로 승소했는데 이 책에서는 그..
생산과 소비의 새로운 윤리를 찾다 낭비 사회를 넘어서 - 세르주 라투슈 지음, 정기헌 옮김/민음사 세르주 라투슈의 『낭비 사회를 넘어서』(정기헌 옮김, 민음사, 2014)는 ‘계획적 진부화’라는, 경영 전문가들 사이에서는 익히 알려졌으나 일반인에게는 거의 알려지지 않은 상품 생산과 소비 양식을 다룬다. 계획적 진부화는 소비를 촉진하고 생산을 지속하기 위해 제품에 인위적으로 수명을 부여하여 강제로 폐기를 유발하고 재구매를 유도하는 것을 말한다. 처음에는 자동차, 스타킹, 면도날, 전구 등 공산품에 적용된 이 개념은 일회용품의 출현에 따라 상품 전반으로 퍼져 나갔고, 유통기한 개념이 도입되면서 농산물로 확대되었다. 더 나아가 연봉 계약직, 비정규직 노동자 등 인간 자체를 일시적으로 고용하고 폐기하는 인간적 진부화에까지 이르게 되었다.현재 우..
박진영의 『책의 탄생과 이야기의 운명』(소명출판, 2013)을 읽다 책의 탄생과 이야기의 운명 박진영 지음/소명출판 오랫동안 블로그에 글을 쓰지 못했다. 글은 대개 번민의 산물이지만 또 여가의 결과이기도 해서, 시절이 작은 겨를조차 앗아 갈 때에는 이곳은 좀처럼 채워지지 못하고 텅 비게 된다. 그사이 이런저런 글도 몇 편 쓰고, 책도 십여 권 읽었지만 마음이 전혀 따르지 못해서 여기에 옮겨 두지 못했다. 입시를 앞둔 아이들 탓에 여행을 떠나기 힘든 긴 연휴를 틈타 서재를 정리한 후에야 마음을 다잡을 수 있었다. 꾸준한 마음이 계속될지 모르나, 일단 내키는 대로 계속 적어 볼 요량이다. 근대 자본주의와 책의 불멸성과 편집자의 운명에 대해 고민하는 이라면, 박진영의 『책의 탄생과 이야기의 운명』(소명출판, 2013)을 한 번쯤은 읽어야 할 것이다. 대한제국의 소멸과 일제강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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