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잡문(雜文)/공감과 성찰

대학 가지 않아도 행복한 나라

정부 정책을 집행하는 공무원들은 이상하게도 중대한 문제일수록 잘 해결하지 못하는 특성이 있다. 오랫동안 특정한 정책을 정해진 틀 안에서만 다룬 습벽이 장벽이 돼 혁신적 해결책을 좀처럼 떠올리지 못하는 까닭이다. 입시 공정성의 해결 방법으로 정시 비중을 높이겠다는 최근 정부 방안은 아무래도 미봉책일 뿐 좋은 해결책이라는 생각이 전혀 들지 않는다

한 모임에서 교사들을 만났는데, 정시 비중이 높아질수록 학교수업 전체가 문제풀이 학원이 될 수밖에 없다고 토로했다. 현재의 수능 시험은 현대사회가 요구하는 창의성과 관련이 적으므로 미래 가치가 낮은 데다 현행 학교 교육 과정이 감당하기 어려워 사교육을 부채질할 게 빤하다. 따라서 아무리 따져도 정시 강화는 게으르고 정형화된 사고의 결과일 뿐이다.

2019년 노벨경제학상 수상자인 마이클 크레이머 하버드대 교수는 케냐에서 원조 활동을 할 때 주어진 문제를 해결하는 방법에 대한 커다란 학문적 깨달음을 얻는다. 학교에 오지 않는 빈곤층 아이들의 출석률을 높이려고 그는 여러 가지 시도를 한다. 교과서를 무료로 나눠 주고, 시청각 자료를 배포하며, 교사를 지원하는 등 온갖 활동을 차례로 벌였으나 출석률은 높아지지 않았다.

고민하는 그한테 한 친구가 구충제를 나누어 주면 어떠냐고 조언한다. 혹여나 하는 마음에 그 말대로 아이들한테 구충제를 먹이자 생각지도 못했던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아이들 결석률이 25% 감소했을 뿐만 아니라, 구충제를 먹은 학생들의 10년 후 소득이 그렇지 않은 학생들보다 평균 20%나 높아진 것이다.

교육 문제라고 해서 문제의 원인이 항상 교육 안에 있는 것은 아니다. 원인이 교육 바깥에 있으면 그 문제를 해결해야지, 교육제도 안에서 아무리 대책을 세워 봐야 별무소용이다. 또 다른 문제를 낳을 뿐이다.

한국 입시 문제 역시 교육 안에서는 해결책이 없다. 누구나 알듯 편법이 난무하는 과도한 대입 경쟁은 스무 살 때 학벌이 죽는 날까지 좋은 직업과 안정된 생활로 이어지는 사회로부터 왔다. 정부 정책을 동원해 고등학교만 졸업해도 좋은 삶을 살 수 있는 사회를 만드는 데 집중해야지, 정시 비중을 높여봐야 조만간 다른 편법이 범람할 게 틀림없다. 교육 바깥에 있는 진짜 문제를 해결함으로써 입시 공정성에 신경 쓰지 않는 사회를 만드는 것이 입시 문제를 해결하는 가장 좋은 방법이다.

2014년 직업능력개발원에 자료에 따르면, 한국은 고졸 일자리에 대졸자가 일하는 하향취업률이 24%에 달한다. 고등학교를 졸업하는 것으로는 좋은 삶이 보장되지 않기에 어쩔 수 없이 대학에 들어가려 하는, 불필요한 학력 투자가 무척 심하다는 뜻이다. 따라서 정부가 솔선수범해서 이 문제를 얼마큼만 해결하면 입시경쟁을 상당히 완화할 수 있다. 이와 관련해 좋은 사례를 보이는 곳이 있다.

현재 서울시교육청 하위 공무원에 고졸을 일정 비율 채용 중인데, 그 덕분에 일부 특성화고의 교육 정상화 효과가 있다는 말을 들었다. 이처럼 서울시교육청을 본받아 정부, 공공기관, 공기업 등이 하위직 신규 직원 50% 이상을 고졸로 채용하면 어떨까 싶다. 이는 정부 의지로 단계적 시행이 가능한 데다 안정적 고졸 일자리를 대량 창출해 입시 경쟁을 줄일 수 있다. 최근 우석훈 박사도 비슷한 제안을 한 바 있으니 충분히 사회적으로 논의해 볼 만하다

올해 노벨경제학상의 또 다른 수상자들인 에스테르 뒤플로와 아브히지트 바네르지 매사추세츠공대(MIT) 교수는 가난한 사람이 더 합리적이다(생각연구소, 2012)에서 사람들이 올바른행동을 할 수 있는 여지를 최대한 열어주는 방향으로 정책을 개발해야 한다.”라고 말한다. 입시와 관련해 사람들이 올바른 행동을 하도록 정부가 먼저 길을 열었으면 좋겠다. 이것이 공정 사회로 가는 길이 아닐까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