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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르헤스와 탐정 소설 1. 보르헤스와 비오이 카사레스는 1930년대 초부터 반세기 넘게 우정을 쌓으며 작품 활동을 함께 한 생의 동료이자 문학적 동반자였다. 2. 두 사람은 남미 최초의 탐정 소설인 『이시드로 파로디에게 주어진 여섯 가지 사건』(1942)을 공동으로 집필해서 오노리오 부스토스 도메크(Honorio Bustos Domecq)라는 이름으로 발표했다. “어쩌다 보니 우리 두 사람은 오노리오 부스토스 도메크라는 제3의 인물을 창조했지요. 도메크는 비오이의 증조부의 성에서, 부스토스는 코르도바주에 살던 내 증조부의 성에서 따왔습니다.” 이후에도 두 사람은 같은 필명으로, 『죽음의 모범』(1946), 『부스토스 도메크 연대기』(1967), 『부스토스 도메크의 새로운 단편들』(1977)을 출판했다. 이 외에도 두 사람은 ..
학술 출판에 대하여 2 - 학술서란 무엇인가? 대학이나 연구소에서 이룬 학문적 성과를 책으로 펴내는 방법에 대해선 아직 정밀한 연구가 진행된 적이 없다. 그저 막연히 학술서라고 부르고 있을 뿐이다.학술서란 도대체 무엇일까? 주체의 자격을 기준으로 따져봐야, 교수나 학위 달고 엉터리 책을 써내는 사람도 많으니, 그게 학술서라고 할 수 없다. 동료 검토를 받는 학술지 등에서 꾸준히 연구 성과를 발표하면서 평판을 얻은 사람이 쓰면 학술서일까. 반드시 그런 것 같지도 않다. 들뢰즈/가타리 같은 사람은 그런 걸 하지 않고, 학문적으로 대단한 책을 냈다. 니체는 대학을 떠나고 난 후 불후의 저작을 남겼다. 독자를 중심으로 정의하려 해도, 교수, 강사, 학생 등을 누구를 대상 삼느냐에 따라서 그 내용과 체제는 천차만별이다. 표준국어대사전엔 올라 있지 않고, 우리..
학술 출판에 대하여 1 “저희 편집부 직원들은 필자 관리와 책 제작에만 관여합니다. 책 교정은 특정 학문을 전공한 비상근 아르바이트에게 철저하게 책임을 맡겨서 상근자의 인건비를 아끼고 있습니다. 이런 구조이기 때문에 필자의 책임을 강화시키는 동시에 전공자의 꼼꼼한 검토를 받아 더 확실하게 출판할 수 있지요.”일본 호세대학 출판국 기획부장의 말이다. 2002년 황해문화에 실린 김응교 선생님의 「일본 대학 학술서적의 인프라」에 나와 있다. 오래전 글이지만 깊이 음미할 만한 데가 있다.알다시피 호세대 출판부는 일본을 대표하는 학술 출판사로 우니베르시타트 총서로 유명하다. 해외 사상에 관심 있고 일본어를 읽을 줄 아는 사람 중 이 총서에 영향을 받지 않은 사람은 드물다.2010년까지는 한 해 70권 정도 책을 11명의 편집자가 진행한..
퍼블리싱 마케팅 트렌드 한국출판마케팅연구소의 신간 『퍼블리싱 마케팅 트렌드』(북바이북, 2024)에 여는 글을 썼다.이 책은 《기획회의》 600호 마케팅 특집에 나왔던 여러 마케팅 사례를 묶고, 몇몇 글을 보태서 펴낸 책이다. 일인 출판사부터 대형 출판사까지, 홍보나 마케팅 대행사까지 출판사 규모와 역할은 다르지만,팬데믹 이후 한국 출판계에서 시도되었던 다양한 마케팅 사례가 실려 있다.이러한 시도들을 개괄하면서 그 의미를 생각하는 글을 부탁받아 짧게 써서 덧붙였다.아래는 그 글 중 일부를 재편집한 것이다.  “갈수록 마케팅을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뭐를 해도 안 팔린다.” 출판 현장에서 흔히 듣는 말이다. 출판 마케팅을 말할 때, 우리는 흔히 자잘한 팁(Tip)에 집중한다. 모 출판사가 카드뉴스로, 유튜브 광고로, 온라..
공유 서재 요즘 공유서재란 게 유행인 모양이다. 개념이 정확지 않은데, 한 기자에 따르면, 이렇다. “누군가의 취향이 묻어난 서재가 나만의 공간이 될 수 있다. 대여한 시간 동안 그곳의 온전한 주인이 되는 특별함. 바야흐로 공유 서재 시대다.”북카페 또는 작은 도서관의 진화형이라고 할 수 있다. 북카페라면 음료나 책의 판매가 주여야 하니까 카페라고 볼 순 없을 듯하다. 일반 음식점 면허나 서점 면허로 운영하긴 힘들 것 같다.책을 두고 공간을 대여하는 게 특징이니, 일종의 작은 도서관에 가깝다. 그중에서도 외부 대출이 안 되는, 폐쇄형 유료 도서관이다. 오래전부터 이런 유의 도서관은 있어 왔고, 해외에는 아직도 흔하다. 사실, 작은 도서관 중에도 회원을 모집해서 월 회비를 받고 있는 곳도 있으니, 공유 서재도 이 변..
세책, 도서 대여, 기간제 구독, 도서관 1흔히 세책(도서 대여)과 기간제 구독과 도서관을 구분해서 생각하나, 독자 입장에서 보면 셋은 본질적으로 크게 다르지 않다. 책을 빌려서 읽는 일, 즉 ‘세책 독서’를 촉발하는 기관이기 때문이다. 셋 모두 “책을 한곳에 모아놓고 일정 기간 사용료를 낸 이들이 마음껏 빌려 읽도록 한 유통 시스템”에 속한다. 공공도서관은 그 사용료가 무료일 뿐이다. 2내가 번역에 참여한 『도서관의 역사』가 올해 안에 나올 텐데, 이 책에선 도서관과 서재, 공공과 사설, 무료와 유료를 구분하지 않는다. 『18세기의 세책사』(문학동네, 2024)에서도 세책점(도서대여점)을 유료 대출 도서관으로 본다. 세책점이 일반적으로 권당 대여 가격을 책정하는 반면, 밀리의서재나 네이버프리미엄 같은 기간제 구독 서비스는 기간에 따라 대여 가..
오에 겐자부로와 재현의 윤리 [여]동생은 자신과, 또 다른 두 사람[아내와 딸]이 내 소설에서 일방적으로 묘사되어 온 사실에 불만을 품고 있다고 말하곤 했다.우리는 ‘세 여자’라는 그룹을 만들어 각자 오빠의 소설에 대한 반론격 글을 써서 돌려보고 있어요. 지금까지는 그저 쓰기만 하고 확실한 독자가 두 명 있다는 걸로 만족해 왔지만, 오빠가 ‘마지막 소설’이라느니 하는 말을 다시 하고 있기도 하니, 오빠가 정말로 그 소설을 쓸 거라면 다 쓰기 전에 우리가 쓴 글을 읽어줬으면 좋겠다. 그러니 오빠에게 보내자, 라고 이야기가 되었어요. 어떻게 생각해요?한번 어떤 착상을 하면 곧장 행동으로 옮겨야 직성이 풀리는 게 동생 성격이어서 초고를 넣은 서류 봉투는 이미 나한테 도착해 있었다. 나는 그 원고를 어느 정도 읽어보긴 했지만, 동생과 동생..
베토벤 피아노 소나타 32번(파우스트 박사) 베토벤의 비서가 피아노 소나타 32번의 3악장을 쓰지 않은 연유를 물었다. 작곡가는 시간 여유가 없어 아예 2악장을 좀 길게 늘여 작곡했다고 태연하게 답했다. 시간 여유가 없다니! 게다가 ‘태연하게’라는 말까지! 그런 식의 답변은 거의 경멸에 해당하는 게 아닐까……. 강사는 1820년경 작곡가 처지를 일러주었다. 당시 베토벤의 청력은 손쓸 수 없는 소모성 질환 탓에 이미 제 기능을 상실했고, 자기 곡을 지휘하는 것조차 불가능해졌다는 게 정설이라 말했다. 32번 소나타는 갖가지 리듬이 대비되며 펼쳐지는 온갖 운명과 고된 세계를 헤치고 나아가, 2악장 주제가 점차 확대되어 마침내 경지를 벗어나 서 종국엔 피안 혹은 추상 세계라 할 만한 아득한 높이로 소멸되어 간다고 간주했다. 소나타를 직접 들어 보면 어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