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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 (임경섭) 종 우는 종을 생각하고 있었다 울지 않는 종은 종이 아닐 거라 생각하고 있었다 종종 우는 종은 종종 종이 되는 것이라 생각하고 있었다 종종 울리는 종은 종종 학교 종이 되었다가 교회 종이 되기도 하였다가 어떤 낮 텅 빈 아파트 단지 안에서 드문드문 울리는 고물상 주인의 목청과 섞이었다가도 어느 밤 낮게 깔리어 퍼지는 찹쌀떡 수레의 녹슨 바큇살에 감겨 엉기었다가도 종국에는 종종거리며 제집으로 돌아와 몸에 남아 있는 여린 울음 그칠 때까지 고요히 숨 참고 있는 그런 종을 생각하고 있었다 그렇게 울고 있는 종을 생각하고 있었다 자신의 몸을 때린 타인의 힘으로 종은 살아가고 있는 거라 생각하고 있었다 아무도 나를 건드리지 않은 날들이 종종 지나가고 있었다 =====아름다운 마음이 담긴 시다. 우리가 의존적 존재..
마구스(Magus)에 대하여 마구스(Magus)는 15∼16세기 르네상스 시대에 과학과 미신 사이에 존재했던 학구적인 마술사들을 가리키는 말이다. 이들은 기묘한 마술을 펼쳐서 대중들을 매혹하는 데 그치지 않고, 그에 관한 지식과 원리를 탐구해 책으로 펴냈다. 『15~16세기 유럽의 마술사들』(조행복 옮김, 책과함께, 2025)에서 미국 과학사학자 앤서니 그래프턴 프린스턴대 교수는 마구스들의 기예와 경험을 다룬다. 마구스들이 행했던 마술은 점성술, 사랑의 묘약에서 질병 치료, 암호 기술, 유압장치와 자동장치 제작 등에 이르기까지 그 범위가 무척 넓었다. 마술이라고 하지만, 의학, 심리학, 과학, 공학도 일부 포함되어 있었던 것이다. 마구스들은 자연의 원리를 탐구하고 이를 이용한 재주를 부렸다. 비판자들은 그들의 기예를 악마의 도움을 ..
위태로운 삶과 살 만한 삶 누구나 삶에 실망할 때가 있다. 배고파도 먹을 게 없고, 쉬어야 하는데 누울 곳 없는 극단적 결핍은 우리를 좌절시킨다. 아픈데 돌봐줄 사람이 없고, 외로운데 대화할 사람이 없는 고립은 우리를 무너뜨린다. 거짓이 진실을 억누르고, 폭압이 자유를 위협하고, 권력이 제 입맛대로 법을 농단하는 세상은 우리를 실망에 빠뜨린다. 이럴 때 사람들 입에선 한탄이 저절로 쏟아진다. “이건 사는 게 아니에요.” 『살 만한 삶과 살 만하지 않은 삶』(문학과지성사, 2024)에서 주디스 버틀러와 프레데리크 보름스는 갈수록 우리를 절망으로 몰아넣는 세계에서 위태로운 삶에서 벗어나 살 만한 삶을 이룩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이약한다. 사는 것 같지 않은데 목숨만 이어가는 듯한 느낌이 만연한 세상, “살 만하지 않은 삶에 붙잡..
고립과 단절 대신 이웃을 연결하는 새로운 건축 언어 “1가구 1주택이라는 주택 형식은 20세기에 발명된, 20세기란 시대에 어울리는 주택이다.” 『탈주택』(안그라픽스, 2025)에서 일본 건축가이자 사회운동가인 야마모토 리켄과 나카 도시하루는 말한다. ‘1가구 1주택’이란 근대 산업혁명에 최적화한 주거 모델이다. 도시로 몰려든 노동자들을 위해 좁은 공간에 최대한 많은 사람을 몰아넣는 대신, 서로 교류하면서 단결하지 못하게 핵가족별로 고립되도록 설계되어 있다. 핵심은 남자는 출근해서 일하고 여자는 집안일과 양육을 맡은 남녀 분업 체제를 통해서 쓸데없는 일(가령, 마을일, 동네 축제 등)에 에너지를 낭비하지 않고, 평온한 공간에서 노동력을 견실히 재생산하도록 유도하는 것이다. 저자들은 1955년부터 지어진 일본 공공 주택을 예로 들지만, 책을 읽고 있으면 그..
신문 책 소개에서 가져온 말들(2025년 3월 16일) 4줄 공식 “당신의 글이 재미없는 이유는 바로 당신이 알고 있는 그 ‘기승전결’ 때문이다.” 사람들의 흥미를 돋우는 이야기의 핵심은 외부 사건 변화가 아니라 주인공이 겪는 심리적 변화이며, 이를 효과적으로 표현하는 것이 4줄 공식이다. ‘주인공이 욕망을 품는 순간’, ‘주인공이 결심하고 행동을 시작하는 과정’, ‘방해 요소와 갈등이 주인공을 시험하는 순간’, ‘주인공이 변화하고 결심을 해소하는 과정’의 순서로 4줄의 글을 쓰면 된다. ‘4줄 공식’을 세우기 전에 먼저 질문을 던지는 것이 중요하다. ‘학교 폭력 피해자가 가해자들에게 완벽한 복수를 하면 원점으로 돌아갈 수 있을까?’ 같은 질문은 단순한 선악 구도의 이야기를 복합적인 감정을 불러일으키는 참신한 이야기로 바꾸어 준다. 요컨대, 주인공의 내적 자..
'읽다, 일하다, 사랑하다' 출간 기념 독자 만남 후기 내가 쓰는 글들은 거의 두 번째로 쓰는 사람의 글이다. 당사자로 쓰는 게 아니라 읽는 사람으로서 쓰는 게 첫 번째로 쓰는 사람에 대한 도리라고 생각한다. 나는 서평이든 칼럼이든 거의 나를 드러내지 않는 형식으로만 쓴다. 솔직히 사건이 되지 못하고 감상으로 가득한 일상이 책일 수 없다고 생각하는 옛날 사람이기도 하고. 자기 안에서 커먼스를 이룩하지 못하는 언어는 일기에만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이기도 하다.그러나 (풍월당)가 단순히 책 소개나 비평이 되지 않도록 하려고도 애썼다. 정보는 목재위키가 나보다 낫고, 비평은 전문 연구자를 따라갈 수 없다.작품을 읽고, 논문을 읽고, 자료를 찾고 그때그때 메모를 하지만, 실제 쓸 때는 자료나 메모 없이 떠오르는 대로 한 문장, 한 문장 쌓아서 적층하는 식으로 ..
몸은 어떻게 내가 할 수 없다고 생각하는 걸 해버리는가 이번 학기부터 매주 학생들한테 신간 하나를 소개하고, 도서관에 신청해서 읽어 보라고 권하고 있다. 별도 숙제는 아니고, 출판에 관심 있는 학생들이니 신간 목록이라도 자주 살폈으면 하는 마음에서다. (실제로 편집자들은 매주 신간을 살펴서 흥미로운 책을 사거나 장바구니에 넣어둔다.)이번 주에 소개한 책은 일본 미학자 이토 아사의 『몸은, 내 멋대로 한다』(다다서재, 2025)이다. 내 생각에, 이 책은 자유에 관한 책이다. 우리가 어디까지 할 수 있을까를 묻는다. 사실 이는 자기 증강 기술인 미학의 궁극적 목표이긴 하다. 이 책은 우리 몸 안에 잠재한 어떤 가능성, 우리가 할 수 있다고 의식하고 있지도 않으나 실제로 우리 몸이 할 수 있는 것들을 바깥으로 끌어내서 펼치려면 어떻게 할 것인가를 다룬다. 이는 ..
따옴표 없이 대화를 표기하는 이유 요즘 소설에선 큰따옴표 없이 대화를 주고받는 식으로 쓰는 걸 흔히 본다. 강아지?사례금 오십만 원.뭐라고?거기 그렇게 적혀 있었어. 전단에.이런 식이다.이런 문장에서 큰따옴표가 있는 것하고, 없는 것의 차이는 뭘까. 작가와 편집자의 자의식이 어느 정도 담겨 있을까 궁금하다.물론, 작가는 감각적으로 이런 일을 하곤 한다. 그렇다 하더라도 편집자 쪽은 어떤 자의식이 있어야 하지 않을까.영국에서도 관련한 논의가 있어서, 에 짤막한 기사가 실린 적 있다. 이 대담한 시도에 대한 작가의 대답은 "더 직접적이고 현실감 있어 보이게 하려고"였다. 신문에까지 나온 건 예외적이고 혁신적인 실험으로 느껴졌기 때문일 테다.따옴표의 역사는 1세기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기독교 사본 작성자들이 중요한 텍스트(성경 구절)가 들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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