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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진(毛晉, 1599~1659)은 원래 이름은 봉포(鳳苞), 자는 자구(子久) 또는 자진(子晉)이다. 호는 잠재(潛在), 별호는 급고주인(汲古主人)이다. 강소성(江蘇省) 상숙현(常熟縣) 출신으로, 부호의 아들로 태어났다.
어려서 동림당(東林黨, 개혁파)의 핵심 인물로 동향의 대학자인 전겸익(錢謙益)을 스승으로 모셨다. 박학하고 기억력이 좋았으나, 과거 공부에는 별 재능이 없었다. 여러 차례 낙방한 후 부잣집 아들답게 시험공부 대신 취미 생활에 탐닉했는데, ‘책 모으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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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나라와 원나라 때 간행된 선본(善本, 보존 상태가 좋고 판본이 희귀한 책)을 아버지 돈을 쏟아부어 닥치는 대로 사들였고, 급고각(汲古閣)과 녹군정(綠君亭)이라는 도서관을 지어 이를 분류해 보관했다.
“장서에 뜻을 두고, 모진은 선본, 희귀 도서[秘籍], 유실된 책[遺書]을 모았다. 특히, 그는 비싼 값에 책 사는 걸 아끼지 않았다. 다른 사람이 1,000금을 부르면 그는 1,200금을 불렀다. 덕분에 강남 서적상들이 배에 가득 책을 싣고 그의 집 앞으로 구름처럼 모여들었다. 세간에 ‘360가지 세상 장사가 모씨(毛氏)에게 책 파는 것만 못하다(三百六十行生意, 不如鬻書於毛氏)’라는 말이 떠돌 정도였다. 전후로 모은 책이 8만 4000책에 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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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모진의 진짜 재능은 편집과 출판에 있었다. 명나라가 기울어 거의 멸망으로 치닫는 약 서른 살 무렵에 출판을 시작해서 청나라 초에 세상을 떠날 때까지 이어졌다. 그의 출판 작업은 현대 출판사들보다 어떤 면에서 더 철저했다.
먼저, 그는 타고난 감식안으로 모아들인 옛 서적 중 가치 높은 책을 쏙쏙 골라냈다. 이후, 관련 학자를 초빙해 급고각에 방을 주어 머무르게 한 다음, 다른 판본들과 비교해서 철저히 교정하고 교감하는 과정을 거쳤다. 때로는 모진 본인이나 아들 모의(毛扆)가 이 작업을 담당하기도 했다. 이때, 자신에게 없는 판본은 사들이거나 빌려와 베껴 쓰게 했다.
여러 차례 교감을 거쳐 정본을 완성한 후엔 목경루에서 판각(板刻), 인쇄, 장정 등의 작업을 진행했다. 뛰어난 장인들 약 200명을 고용해 옛 판본의 서체, 체제 등을 그림자처럼 정교하게 베껴 쓰고 세밀하게 판각한 다음, 질 좋은 종이와 먹으로 출판한 후 우미하게 장정해서 내보냈다.
청나라 이후 민간 출판 서책 중 으뜸으로 꼽는 모초(毛抄) 또는 모본(毛本)은 이렇게 만들어졌다. 자신이 찍은 책을 보관하기 위해서 집 안에 따로 목경루(目耕樓)라는 전각도 지었다.
모진과 그 아들 모의는 무려 587종의 책, 10만여 쪽의 판목을 남겼다. 경전과 역사서, 소설과 노래책, 희곡과 사전 등 다방면에 걸쳐 출판한 책들은 급고각본(汲古閣本)이라는 이름으로 사람들이 서로 구하려는 책이 되었다. “모 씨의 책이 천하에 퍼졌다”라는 말이 생길 정도였고, 오늘날에도 널리 유통된다.
진체비서(津逮秘書), 십삼경주소(十三經註疏), 십칠사(十七史), 육십종곡(六十種曲, 명나라 희곡집), 문선이주(文選李注), 한위육조백삼명가집(漢魏六朝百三名家集), 진체비서(津逮秘書), 송본(宋本) 설문해자(說文解字, 번각본) 등이 유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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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장한 책엔 모진사인(毛晉私印), 급고각세보(汲古閣世寶), 급고장서기(汲古藏書記) 등 장서인(藏書印)들을 찍었는데, 장서가 특유의 염려가 담긴 긴 장서인도 하나 남겼다.
“우리 집안은 유학을 업으로 삼아 고생해서 힘들게 책을 마련하여 자손에게 남기니 그 뜻이 어떠한가. 후손이 읽지 않아서 돈 받고 팔 지경에 이르면, 집안 이름을 무너뜨린 셈이니 짐승만도 못하리라. 만약 다른 집에서 가져간다면, 마땅히 이 말부터 생각해라. ‘내 것이 아닌 책을 취하느니 차라리 책을 포기하리라.’”
후손들한테는 책 팔아먹지 말고, 잘 간수하라는 부탁은 당연하다. 그리고 한마디 덧붙였다. 혹여 내 책을 가져가는 사람이 있다면, 빼앗거나 훔치지 말고, 꼭 제값 치르고 사라는 뜻이다. 합당한 대가를 치르고 얻은 책만이 소중히 여겨지는 법이니까.
그러나 출판의 역사는 보여준다. 아버지의 책을 삼대 넘어 보관한 집은 거의 없다는 걸. 그가 세상을 떠난 후 오래지 않아 그의 장서는 뭉텅이로 팔려서 여기저기 흩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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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엔 모진의 잘못도 크다. 고작 200~300부에 지나지 않는 부수를 엄청난 돈을 들여 찍어선 손해 보는 게 정상이다. 책을 좋아할 뿐 경제관념은 없었던 그 탓에 모씨 집안은 그의 손자 때에 이르러 이미 회복할 수 없을 정도로 기운다. 돈은 흩어져 없어졌으나, 그 이름은 출판의 역사에 영원히 남았다.
『서림청화(書林淸話)에서 섭덕휘는 찬양했다. “천하를 샅샅이 뒤져 손으로 베끼고 필사하기를 책벌레처럼 했다. 소가 땀 흘릴 만큼 많은 십만 권의 책을 천하에 유포하니 예부터 지금까지 이런 일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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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답니다.
이런 건 금세 쓰는데.....
왜 쓰고 싶은 글은 그렇게 힘들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