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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론과 서평/소설과 희곡 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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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험과 긍정의 인간, 돈키호테(한겨레 기고) 《한겨레》 출판면에 ‘편집자가 고른 스테디셀러’라는 코너가 있다. 이곳에 글을 맡아서 세 번 쓰게 되었다. 첫 번째로 고른 책은 최근에 다시 완독한 세르반테스의 『돈키호테』(박철 옮김, 시공사, 2004)였다. 아래에 옮겨 둔다. 지난해 5월, 편집자로 일한 지 스무 해째 된 것을 기념해 아내와 함께 스페인을 여행했다. 지중해의 뜨거운 태양이 세속의 번뇌를 증발시키고, 늦도록 들지 않는 밤과 온화한 바람이 산책을 한없이 부추기는 가운데, 나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같은 질문에서 ‘편집이란 무엇인가’ 같은 질문까지 온갖 의문을 떠오르는 대로 풀어 놓고 마음껏 생각을 즐겼다.가르시아 마르케스는 자신의 인생을 “이야기하기 위해 살다”라는 말로 정리했는데, 내 인생은 어떤 말로 요약할 수 있을까. 그러다 한..
드니 디드로의 『운명론자 자크와 그의 주인』(김희영 옮김, 민음사, 2013)을 읽다 1마흔이 넘어서야 작품을 비로소 즐길 수 있는 작품이 있다면, 드니 디드로의 『운명론자 자크와 그의 주인』(김희영 옮김, 민음사, 2013)을 첫손에 꼽고 싶다. 사실 이 작품은 예전에도 읽은 적이 있지만, 그때는 지루하기만 하고 어찌 읽어야 할지 전혀 알 수 없었는데, 이번에 다시 읽으니 그렇게 좋을 수가 없었다. 신비로웠다. 몸속의 시계가 작품의 리듬을 새롭게 일깨우는 기분이랄까, 한 방향으로 계속해서 흐르지 않고 군데군데에서 허리가 부러지고 샛길로 새어 나가면서, 독자와 끊임없이 게임을 벌이는 이 안쓰러운 화자, 그러니까 작가의 이야기 솜씨는 신이 빚은 듯 매끄럽고, 흥미로우며, 풍미가 넘쳤다. 때때로 날카로운 잠언이 깊은 생각을 더해 주고, 때때로 박진감 넘치는 이야기가 마음을 끌어당긴다. 2대화..
백가흠 장편소설 『향』(문학과지성사, 2013)을 읽다 1이번주 지하철을 오가면서 백가흠 장편소설 『향』(문학과지성사, 2013)을 읽었다. 그동안 죽음 너머를 사유하는 것이 주로 신화나 종교의 일이었다면, 이 작품과 함께 비로소 21세기 한국문학도 그 영역을 넘보게 되었다. 이런 의미에서 권혁웅이 작품 해설에서 이 작품을 박상륭의 『죽음의 한 연구』에 빗대어 “죽음의 또 다른 한 연구”(253쪽)이라고 부른 것은 아주 적절하다. 죽음은 이 소설의 처음과 끝을 순환하면서 모든 언어들을 감싸고 있으며, 인물들을 행위로 이끌고 있다. 힘들게 쓴 소설이고 그런 만큼 쉽게 읽히지 않지만, 이 소설로부터 우리 문학은 심오한 형이상학 하나를 21세기에도 형상화할 수 있게 되었다. 2그러나 『향』에서 죽음은 그냥 죽음이 아니다. 대개 그 죽음은, 백가흠 소설의 오랜 탐구..
김경욱의 『야구란 무엇인가』(문학동네, 2013)를 읽다 1지난주 지하철 퇴근 시간을 이용해 김경욱의 『야구란 무엇인가』(문학동네, 2013)을 모두 읽었다. 적절한 주변의 소음이 아니었다면 이 끔찍하고 처연하며 아릿아릿한 이야기를 끝내 참을 수 없어서 울어 버렸을지도 모른다. 누가 봐도 이것은 김경욱 소설의 새로운 전개다. ‘광주’라는 소재의 심각함에서도 그렇고, 복수와 화해라는 주제의 묵직함에서도 그렇고, 분열증과 편집증이라는 심리의 전개에서도 그렇고, 말더듬과 초단문이라는 발화의 특이함에서도 그렇다. 마흔이 넘은 나이에 김경욱은 갑자기 젊음의 꼬리표를 떼고 역사와 윤리가 교차하는 낯선 영역 속으로 투신해 버린 것이다. 읽으면서 여백에 메모해 둔 것들을 여기에 기록해 둔다. 2그 누구도 복수로서의 광주란 무엇인가를 그다지 열심히 묻거나 탐구하지 않았다. 서..
모파상 외, 『선생님과 함께 읽는 세계고전소설 1』(숨비소리, 2006)을 읽다 지난 한 달 동안 모파상 외, 『선생님과 함께 읽는 세계고전소설 1』(곽상환, 신선미, 전혜정, 최낙준 옮김, 숨비소리, 2006)을 읽었다. 이 책은 호손, 모파상, 푸슈킨, 로렌스, 고리키 등이 쓴 전 세계 고전 단편들을 모아서 엮은 것으로 작품마다 청소년을 위해 선생님들이 쓴 간략한 해설이 덧붙인 책이다. 어른이 읽기에는 다소 싱거운 감이 있지만, 이런 소설에 처음 입문하는 학생들이 읽기에는 괜찮은 책이다.이 책은 2002년 모두 여섯 권으로 나왔던 같은 제목의 책을 두 권으로 묶어서 다시 펴낸 책의 첫 권이다. 청소년 책답게 이 책에 실린 단편들은 자아에서 세계로 관심이 점차 확장되어 가는 과정을 체험할 수 있도록 주제별로 분류해 작품들을 싣고 있다. 각 장의 주제는 나 ―― 세상을 향해 나아가는..
피츠제럴드의 『아가씨와 철학자』(박찬원 옮김, 펭귄클래식코리아, 2009)를 읽다 벼르던 일을 하고 나니 마음이 한결 가볍다. 두 주 전쯤 무라카미 하루키의 『노르웨이의 숲』(양억관 옮김, 민음사, 2013) 교정을 끝마치고 난 후, 기왕에 읽었던 『위대한 개츠비』(김욱동 옮김, 민음사, 2003) 말고 피츠제럴드의 다른 작품들도 읽어 봐야겠다고 결심했다. 처음에는 회사에서 나온 『피츠제럴드 단편선 1』(김욱동 옮김, 민음사, 2005)와 『피츠제럴드 단편선 2』(한은경 옮김, 민음사, 2009)를 읽으려고 꺼내 놓았다가, 곧 마음을 바꾸어서 피츠제럴드의 첫 번째 단편집으로 예전에 편집 참고용으로 사 두었던 『아가씨와 철학자』(박찬원 옮김, 펭귄클래식코리아, 2009)를 이번 주 내내 읽었다. 가장 거칠고 미숙했던 시절의 피츠제럴드가 궁금했기 때문이다. 이 소설집이 나온 것은 1920..
나쓰메 소세키의 『태풍』(박현석 옮김, 현인, 2012)를 읽다. 1며칠 동안 틈을 내어 나쓰메 소세키의 『태풍(野分)』(박현석 옮김, 현인, 2012)를 읽었다. 여름 무렵부터 국내에 출간된 소세키 작품을 하나씩 챙겨 읽기 시작했는데, 『도련님』(양윤옥 옮김, 좋은생각, 2007)과 『나는 고양이로소이다』(진영화 옮김, 책만드는집, 2011)에 이어서 세 번째이다. 소세키 소설들은 어느 작품이든 깊은 사유의 힘과 반짝이는 위트를 동시에 갖추고 있다. 『태풍』은 나쓰메 소세키가 아사히신문사에 입사하여 전업 작가로서 살아가기 직전인 1907년에 쓴 작품으로, 이전 작품인 『도련님』이나 『나는 고양이로소이다』에 비하면 다소 직설적이고 관념적으로 작가의 문학에 대한 속마음을 고스란히 드러내고 있다. 이 때문에 이 작품은 생동감은 다소 떨어지는 편에 속한다. 그러나 이 작품이..
발자크의 『골짜기의 백합』(정예영 옮김, 을유문화사, 2008)을 읽다 삼류 작가의 시시한 작품보다 거장의 걸작을 오해하기는 얼마나 쉬운가. 어린 시절, 루카치의 ‘리얼리즘의 승리’라는 마르크스주의 문예 미학의 깃발 아래 읽었던 발자크의 작품들은 얼마나 재미없었던가. 그때는 소설 속 인물들의 인생은 보이지 않고, 작가의 사상이 왕당파에 가까운 데도 불구하고 그 핍진한 묘사 때문에 소설 내용이 ‘부르주아의 승리’라는 역사적 법칙의 엄중함에 따른다는 것만을 눈에 불을 켜고 확인하려 들었다. 작품마다 독자를 압도하는 거대한 관념들의 전개, 귀족 세력을 서서히 압박해 들어가는 상인 세력의 발흥, 그 갈피에서 오로직 역사 법칙에만 복무하는 듯한 인물의 행위들, 이런 독서는 결국 나의 발자크 읽기를 극도로 피로하게 만들었으며, 결국 나는 발자크 작품들을 제대로 읽지도 않은 채 극도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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