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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론과 서평/소설 / 희곡 읽기

김경욱의 『야구란 무엇인가』(문학동네, 2013)를 읽다



1

지난주 지하철 퇴근 시간을 이용해 김경욱의 『야구란 무엇인가』(문학동네, 2013)을 모두 읽었다. 적절한 주변의 소음이 아니었다면 이 끔찍하고 처연하며 아릿아릿한 이야기를 끝내 참을 수 없어서 울어 버렸을지도 모른다. 누가 봐도 이것은 김경욱 소설의 새로운 전개다. ‘광주’라는 소재의 심각함에서도 그렇고, 복수와 화해라는 주제의 묵직함에서도 그렇고, 분열증과 편집증이라는 심리의 전개에서도 그렇고, 말더듬과 초단문이라는 발화의 특이함에서도 그렇다. 마흔이 넘은 나이에 김경욱은 갑자기 젊음의 꼬리표를 떼고 역사와 윤리가 교차하는 낯선 영역 속으로 투신해 버린 것이다. 읽으면서 여백에 메모해 둔 것들을 여기에 기록해 둔다.


2

그 누구도 복수로서의 광주란 무엇인가를 그다지 열심히 묻거나 탐구하지 않았다. 서른네 해 전에 남도 땅 한쪽에서 벌어진 끔찍한 비극을 이야기했고, 처참한 비극과 준엄한 심판과 인간적 화해를 열변했을 뿐, 가해자에 대한 피해자의 직접적인 응징, 즉 복수를 입에 담은 적은 없다. 그 말을 혀끝에 올리면 희생자들의 대의, 민주주의에 대한 헌신, 이 땅에 잠시 도래했던 코뮌적 세계의 전면적 후퇴가 곧바로 연상되어서였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생각해 보면, 왜 그에 대한 발화 자체 또는 생각 자체가 정말로 불가능하다는 말인가? 이 소설의 주인공처럼, 억울하게 가족 중 하나 또는 그 이상을 현장에서 잃고 울화로 나머지 가족들이 파탄나고 생애의 행복을 억지로 반납당한 이들이 이 땅에 있지 않은가? 그는 밤마다 악몽에 짓눌리고 군화 소리의 환청에 시달리면서 하루를 근근이 버텨 살지 않던가? 아내는 집을 나가고 어머니는 돌아갔으며, 어떤 희망도 품을 수 없을 정도로 집안은 가난과 좌절에 풍비박산나고, 그의 곁에는 고작 아이 하나만 달랑 남지 않았는가? 그가 주사위로 희롱한 끝에 개머리판으로 동생을 무참히 살해한 사내 염소를 다시 추적해 복수하지 말아야 할 이유 따위가 있단 말인가? 


3

인간은 금지 없이 살아갈 수 없다. 욕망의 폭주는 정신적, 신체적 파멸로 곧장 떨어진다. 그러나 그 금지가 논리적 금지가 아니라 폭력적 금지일 때, 불만에 찬 욕망은 승화해 문화를 만들지 못하고 자아의 외피, 그러니까 사회적 둔덕을 무너뜨린다. 그때 안으로 파열하면 공황이, 밖으로 파열하면 분노가 나타난다. 

『야구란 무엇인가』의 화자는 어느 쪽일까. 그는 안쪽으로 파열한 인간이다. 어머니의 금지, 그러니까 사랑의 금지가 소설의 처음부터 끝까지 감시한다. “누군가를 훔쳐 보는 것은 나쁜 짓이다. 어머니가 말하지 않았던가. 다른 사람을 빤히 쳐다보지 마라. 눈에는 눈이라 안 하든. 눈은 눈을 부른당께.” 

어머니가 돌아가고, 그는 자신과 가족의 인생을 망쳐 버린 살인자를 찾아서 복수의 여정에 오르지만, 그의 곁에는 어머니의 뼈가, 육체가, 눈이 끝까지 따라다닌다. 게다가 다른 사람을 쳐다보지 말라는 어머니의 금지를 어겼을 때, 과거에 단 한 차례 공수 부대원을 쳐다봄으로써 그는 과거와 현재와 미래를, 그에게 주어진 모든 시간을 박탈당하지 않았던가. 그러니 죽음까지 넘어서 그를 계속 따라붙는 사랑의 금지를 넘어서는 것은 얼마나 어려운가. 사랑에 결박된 처참한 육체에게도 복수가 가능한가. 깊고 끈질긴 상처를 안고 산다는 것은, 살아 있다는 것은 정말로 무엇인가. 어쩌면 이 작품을 통해 김경욱은 이런 질문들을 자신에게, 우리에게 던지는 것일까.


4

두 가지 유랑. 가해자의 유랑과 피해자의 유랑. 

한 사내가 있다. 1980년 5월 광주에서 그는 군인이었다. 그는 상부의 지시에 따라 폭도들을 진압하러 광주 지역으로 투입되었다. 진입 직전 지급된 술에 취한 채, 그는 처음 보는 피가 만들어 낸 광기에 사로잡혀, 한 사내의 목숨을 주사위 놀이로 결정하는 극도의 모욕 끝에 개머리판으로 죽여 버린다. 그 후 그는 한 곳에 정착 못 한 채, 교회를 전전하며 수없이 회개하면서, 빚을 진 채 추심 폭력배들한테 시달리면서, 피해자 가족이 보복하러 찾아올까 봐 두려워하면서 한없이 도망다닌다. 그가 마지막에 도망친 곳은 병원 중환자실이고, 그는 의식 없이 누워 있다.

그곳으로 피해자가 찾아온다. 그는 눈앞에서 동생이 맞아 죽는 것을 본다. 똑똑한 동생이고 집안의 희망이었다. 차마 국가를 상대로 싸울 수 없었던 아버지는 모든 죄를 그에게 덮어 씌우다 홧병으로 죽었는데, 관을 눕히지 말고 세워서 묻어 달라는 유언을 남겼으며, 어머니는 가난에 시달리면서 살다가 고향에서 이제 막 죽었다. 위층에서 군홧발 소리가 나는 것 같아 그는 평생 잠을 제대로 이루지 못하고, 불행한 결말로 이어질까 봐 야구는 9회 마지막 회를 차마 보지 못한다. 아내는 애저녁에 도망쳤다. 

그는 아이를 어머니에게 맡긴 채 공사판을 전전하면서 떠돌아다닌다. 그에게는 일종의 속죄일 터인데, 사실 죄를 저지른 바가 없기에 어떻게 용서받아야 할지를 알 수 없다. 어쩔 수 없어서 덮어쓴 죄책감은 조금씩 그의 뇌리를 침습해, 그의 모든 발화와 행동에 영향을 미친다. 그는 환각과 환청에 둘러싸인 채 마침내 직접 복수에 나선다. 죄책의 근원을 제거하기로 한다. 동생과 마찬가지로 그에게 주사위를 쥐어 주고 어느 쪽을 선택하든 죽음이라는 판결을 내릴 생각으로 집을 나섰던 것이다.

“사내도 떠날 차비를 한다. 아주 먼 길이 될 것이지만 준비할 게 많지는 않다. 하나뿐인 양복을 장롱에서 꺼내 입고 상의 안주머니에 칼과 주사위와 청산가리를 챙겨 넣는다. 칼은 염소를, 주사위는 동생을, 청산가리는 자신을 위한 것이다.”

한반도의 남쪽에서 일어난 폭력적 역사가 가해자와 피해자 양쪽 모두의 삶에서 안락을 빼앗고 집 없는 삶을 강요한다. 어느 날 그들은 배트를 휘둘러 홈플레이트를 떠났지만 베이스 라인 어딘가에서 길을 잃은 채 꼼짝 없이 갇혀 버리고 말았다. 그렇다. 그들은 베이스에 머물러 있거나 베이스 라인 위를 영원히 달리는 중이다. 

그렇기에 화자는 결코 야구 경기를 끝까지 보지 못한다. 그의 집은 동생의 죽음과 함께 애초에 파괴되었고 그에게는 돌아갈 홈이 없기 때문이다. 사내 염소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그는 한곳에 고정되지 못한 채 영원히 떠돌 뿐이다. 한편, 화자의 아내 역시 비슷한 삶을 살아가는 등 이 소설에 나오는 거의 모든 등장 인물들은 결코 홈을 갖지 못한다.(이런 의미에서 거미처럼 집을 싸들고 다니는 아들 진구는 대단히 상징적이다.)

어쨌든 화자가 며칠째 의식을 잃고 있는 사내 염소에게 주사위를 쥐어 준 다음 날, 염소는 사라져 버린다. 화자는 다시 그를 추적한 끝에 복수하려 하지만, 이미 사내는 택시에 치여 죽어 버렸다. 유령과 마주선 그 허망함 앞에서, 일생을 걸려 했던 복수의 원천적 금지 앞에 화자는 망연자실하다가 그 목숨 자리를 거두어 준다. 가해자와 피해자가 '억지로' 하나가 되는 순간이다.


5

화자의 곁에 어머니와 아버지와 동생을 대신해 달라붙은 것은 편집증이 있는, 관심 있는 모든 것을 사진 찍듯이 머릿속에 집어넣는 여덟 살 난 아들 진구다. 노란색에 집착하는, 야구장에 가고 싶은, 기억력이 남다른, 그래서 평범하지는 않지만 어린아이다운 천진함을 잃지 않은. 욕망의 대상, 복수의 상대를 잃어버린 화자는 이런 아들로부터 구원받는다.

둘이 약속했던 야구장에 난생 처음으로 가서 난생 처음으로 끝까지 경기를 지켜본 후, 야구장에 텐트를 치고 하룻밤을 보내면서 화자는 비로소 “야구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대답할 수 있게 된다. 야구란 무엇일까? 그것은 그사이에 어떤 좌절, 실패, 비극이 있을지라도, 결국 홈으로, 그러니까 살아서 집으로 돌아오는 경기이다. 소설의 마지막 장면은 상당히 감동적이다.

“사내도 입을 다문다. 입을 다물고 마음속으로 야구의 진실을 중얼거린다. 그래. 집에 가자. 무사히. 살아서 집에 돌아가자.”

인생이란, 그 과정은 어찌 되었든 간에, 그에게는 서른네 해 전 잃어버렸던 집으로, 그 집으로 살아서 돌아가는 경기였던 것이다. 광주라는 역사적 공간과 그 안에서 벌어진 학살이라는 어마어마한 배경을 깔고, 이런 개인적이고 소박한 결론에 이르른 것은 과연 작가의 인식이 조금 나이브한 것일까, 아니면 삶이란 어쩔 수 없이 그런 모양으로밖에 생겨 먹지 않은 것일까.


6

그러나 누가 뭐라든지 간에, 이 소설에는 새로운 김경욱이 있다. 댄디하고 모던하고 심각함을 거부하고 시대의 첨단을 좇아가던 트렌드세터 김경욱이 아니라 삶의 진실이 빚어 내는 깊이를 탐구하는 광부 김경욱이 뚜렷하게 드러난다. 나는 이게 좋았다. 정말 좋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