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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론과 서평/소설 / 희곡 읽기

나쓰메 소세키의 『태풍』(박현석 옮김, 현인, 2012)를 읽다.


『태풍』 표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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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 동안 틈을 내어 나쓰메 소세키의 『태풍(野分)』(박현석 옮김, 현인, 2012)를 읽었다. 여름 무렵부터 국내에 출간된 소세키 작품을 하나씩 챙겨 읽기 시작했는데, 『도련님』(양윤옥 옮김, 좋은생각, 2007)과 『나는 고양이로소이다』(진영화 옮김, 책만드는집, 2011)에 이어서 세 번째이다. 소세키 소설들은 어느 작품이든 깊은 사유의 힘과 반짝이는 위트를 동시에 갖추고 있다. 

『태풍』은 나쓰메 소세키가 아사히신문사에 입사하여 전업 작가로서 살아가기 직전인 1907년에 쓴 작품으로, 이전 작품인 『도련님』이나 『나는 고양이로소이다』에 비하면 다소 직설적이고 관념적으로 작가의 문학에 대한 속마음을 고스란히 드러내고 있다. 이 때문에 이 작품은 생동감은 다소 떨어지는 편에 속한다. 그러나 이 작품이 단지 세태 소설이나 관념 소설에 떨어지지 않은 것은 “길에 따르는 사람은 신도 피해야 한다.”라는 도야 선생의 성격이 작품 전체를 지배하면서 부자들의 허위의식에 대한 그의 뜨거운 공격과 그러면서도 먹을거리 하나 해결 못 해서 아내에게 끊임없이 구박받는 그의 차가운 현실이 대비되면서 처음부터 끝까지 긴장을 잃지 않았기 때문일 것이다.(물론 결말은 정말 엉뚱해서 다소 허탈하기까지 하지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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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풍』은 도(道)의 길을 따르려다 세상에 부적응하고 실패한 교사로서 세상을 바로잡기 위해 가난한 문학자로 살아 가는 도야 선생의 분투기이다. 소세키는 열혈 문학자인 도야의 입을 빌려 돈의 힘에 점차 굴복해 가는 세태를 강하게 풍자하고 정신 문화(취미 또는 학문)를 존중하는 세계의 도래를 열변하고 있다. 

소세키는 도야 선생 앞에 두 인물, 즉 어릴 적 시골 중학교에서 도야를 쫓아내는 데 앞장섰던 도야의 제자로서 현재는 문학부를 졸업하고 작가를 꿈꾸면서 비참하게 살아가는 다카야나기와 그의 친구이자 문학부 동기로서 부유한 집안의 자제이자 문예를 적당한 취미로 삼고 있는 인정 많은 부르주아 나가노를 불러 들이고, 두 사람의 삶을 극적으로 대비함으로써 돈과 문학의 현재를 치열하게 부각한다. 

끝부분에 나오는, 돈과 학문에 대한 도야의 연설은 그 자체로 뛰어난 명문으로 현재에 이르러서도 전혀 그 의미가 퇴색하지 않은 채, 오히려 신선한 통찰을 불어넣고 있다. 나쓰메 소세키의 문학관이 선명하게 드러난 글로, 관심 있는 사람이라면 꼭 읽어 볼 만한 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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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카야나기와 나가노 두 사람 모두 일종의 지적 허영에 물들어 있는 문학적 속물들이다. 다카야나기는 자기 수양이라는 문학의 참된 본질을 깨닫지 못한 채 오직 문학으로 성공해 입신양명해 나가노와 대등한 자리에 서겠다는 헛된 꿈을 품고 있으며, 나가노는 문학에 몸을 푹 적실 필요를 느끼지 못하고 적당한 만큼의 문학적 교양과 취미만을 원할 뿐이다. 이들은 모두 문학에 묶여 있으나 사실 문학과는 거리가 있는 삶을 살아 간다. 

그러나 두 사람은 삶의 상황이 아주 다르다. 다카야나기는 시골에서 상경해 가난에 어려움을 겪으면서 폐병에 걸린 채 고통받고 있으며, 나가노는 으리으리한 저택에 살면서 아름다운 규수와 화려한 결혼식까지 올린다. 다카야나기는 이 결혼식에서 자존심에 큰 상처를 받고, 쓰라린 마음에 폐병도 치료하지 않은 채 죽어 버릴 결심마저 한다. 이런 다카야나기한테 나가노가 찾아와 요양에 쓰라면서 거금 100엔을 쥐어 주고 가면서 작품은 엉뚱하게 대반전을 맞이한다.(스포일러 요소가 있으므로 결말은 밝히지 않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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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풍』은 현인 출판사에서 기획한 국내 미출간 소설이라는 시리즈의 다섯 번째 책으로 출간되었다. 서문을 보니 번역자 박현석이 출판사를 직접 차려서 국내에 출간되지 않았던 작품들을 번역 출판하는 듯한데, 대단한 용기가 아닐 수 없다. 시리즈 리스트를 보니 『태풍』 말고도 다자이 오사무의 『판도라의 상자』, 크리스토퍼 몰리의 『유령 서점』, 나쓰메 소세키의 『갱부』, 구사카 요코의 『몇 번인가의 최후』 등 몇몇 흥미로운 작품들이 눈에 띄었다. 부디 마음이 꺾이지 않고 계속해서 시리즈가 풍성해지기를 기원한다.



==== 책 속에서

― 돈의 힘으로 살아가면서 돈을 배척하는 것은, 낳아 준 부모에게 몹쓸 짓을 하는 것과 같은 일이다. 

 동화는 틀림없이 사회 요소 중 하나다. 프랑스의 타르드라는 학자는 ‘사회는 모방이다.’라고까지 했을 정도다. 동화는 중요한 것일지도 모른다. 그 중요함은 도야도 잘 알았다. 잘 아는 정도가 아니라 고등교육을 받아 광의의 사회관을 가진 그는 일반인 이상으로 동화의 공덕을 인정했다. 단지 높은 것에 동화되느냐 낮은 것에 동화되느냐 하는 것이 문제였다. 이 문제를 해석하지 않고 무조건 동화되는 것은 세상을 위한 일이 아니다.

 학문은 줄타기나 접시돌리기와는 다르다. 기술을 습득하는 것은 부수적인 일이다. 인간을 만드는 것이 목적이다. 대소를 구별할 줄 아는, 경중의 차이를 아는, 호오를 판단할 줄 아는, 선악의 분계(分界)를 이해하는, 현우(賢愚), 진위, 정사(正邪)의 비판에 오류를 범하지 않는 대장부를 기르는 것이 목적이다.

 올바른 인간은 신이 만든 모든 것 중에서도 가장 존귀한 것이라는 말은 서양 시인의 말이다. 도(道)를 지키는 자는 신보다 존귀하다는 말은, 도야가 쫓겨날 때마다 마음속으로 되뇌인 문구였다.

 세상은 고상하지 않다. 감식이 있는 것도 아니다. 동정이란 강한 사람, 부유한 사람만을 따르는 그림자에 지나지 않는다. 

 다른 사람에게 자신의 불만을 토로하려 할 때, 자신의 불만을 전부 털어놓기 전에 상대방으로부터 어중간한 위로를 받는 것은 기분 좋은 일이 아니다. 자신의 불만을 정말로 알아준 건지, 알아주지 못한 건지, 정말로 안됐다고 생각하는 건지, 말로만 안됐다고 하는 건지 알 수가 없다.

 너희는 교사를 위해서 살아야 할 사람이 아니란다. 도를 위해서 살아야 할 사람들이지. 도는 존엄한 것이란다. 이 이치를 깨닫기 전에는 아직 한 사람의 인간이라고 할 수 없어. 너희들도 힘써 노력해서 이 이치를 깨닫도록 해야 한다.

 아무래도 좋은 일을 아무래도 좋지 않도록 결단하라고 재촉하는 것은 현자가 어리석은 자에게 지불하는 세금이다.

 부탁은 동정의 좋은 적수다. 

 우리가 평생을 통해서 받는 번민 중에서 가장 통절하고 가장 심각하고 가장 격렬한 번민은 사랑밖에 없다. (중략) 사랑은 번민임에 틀림없지만, 이 번민을 통과하지 않으면 평생 자신의 존재를 깨달을 수가 없다. 

 여자는 장식에 살고 장식에 죽는다. 대다수의 여자는 자신의 운명을 지배하는 연애조차도 장식으로 여기기를 주저하지 않는다. 연애가 장식이라면 연애의 중심인 애인은 물론 장식품이다. 아니, 자기 자신조차도 장식품이라고 생각할 뿐만 아니라 자기 자신을 장식품이라고 보지 않는 사람을 평하여 바보라고 말한다. 

 각양각색의 세상에서 각양각색의 사람이 움직이는 것도 역시 자연의 이치이다. 단지 크게 움직이는 자가 이기고, 깊게 움직이는 자가 이겨야 한다.

 천하가 한 사람의 공정한 인격을 잃으면 천하는 한층 더 광명을 잃는다.

 나는 길을 놓겠다. 길을 가로막는 자는 신이라도 용서하지 않겠다.

 능력은 권력이 아니다. (114쪽)

 시간이 있는 사람은 아주 많은 것 같지만 뭔가를 하는 사람은 별로 없다. (121쪽)

 문학은 인생 그 자체이다. 고통이 됐든, 곤궁이 됐든, 궁수(窮愁)가 됐든 무릇 인생의 행로에서 부딪치게 되는 것이 곧 문학이며, 그것을 맛본 자가 문학자이다. 문학자란, 원고지를 앞에 놓고 숙어 사전을 참고로 해 가며 머리를 짜내는 한가한 사람이 아니다. 원숙하고 심후한 취미를 체득하여, 인간 만사를 기죽지 않고 적절히 처리하거나 터득하는 보통 이상의 사람을 가리키는 것이다. 그렇게 처리한 방법이나 터득한 것을 종이에 옮긴 것이 문학서가 되는 것이다. 따라서 책을 읽지 않아도 실제로 그런 일에 임한다면 훌륭한 문학자이다. (124~125쪽)

 예로부터 무엇인가를 하려고 하면 대부분은 외톨이가 되는 법이다. (128쪽)

 반지는 마물(魔物)이다. 셰익스피어 옹은 반지를 소재로 수많은 파란을 묘사했다. 젊은 남자와 젊은 여자를 눈에 보이지 않는 공간에서 묶고 있는 것이 사랑이다. 사랑을 그대로 손에 쥐게 하는 것이 반지다. (142쪽)

 요염한 사람이 눈썹을 찌푸리는 것은 애교에 식초를 뿌리는 것과 같은 것이다. 달콤한 사랑에 지나치게 취한 남자는 종종 이런 신맛에 혀를 찬다. (146쪽)

 자연은 진공을 혐오하고 사랑은 고립을 싫어한다. (147쪽)

 인간은 길의 동물이니 길에 따르는 것이 가장 존귀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길에 따르는 사람은 신도 피해야만 한다. 바위 따위는 아무것도 아니다. (172쪽)

 인간의 교제에는 언제나 '아차'가 생략된다. 생략된 '아차'가 거듭되면 싸움 없이도 절교하게 된다. 친한 부부, 친한 친구가 마음속의 '아차, 아차' 때문에 점차로 서로에게 정나미가 떨어지게 되는 법이다. (180쪽)

 요즘의 책은 빚과 다를 바 없다. 신용이 없는 사람은 연대 책임이 아니면 출판할 수가 없다. (193쪽)

 씨름은 호흡이다. 호흡을 생각지 않고 덤비면 오히려 자신이 내던져질 뿐이다. (215쪽)

 학문, 즉 사물의 이치를 아는 것과 생활의 자유, 즉 돈이 있다는 것은 서로 독립되어 관계가 없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반대가 되는 것이다. 학자이기 때문에 돈이 없는 것이다. 돈을 벌기 때문에 학자가 될 수 없는 것이다. 학자는 돈이 없기 때문에 사물의 이치를 아는 것이며, 상인은 이치를 모르기 때문에 그 대신 돈을 버는 것이다. (228쪽)

 상인이 돈을 벌기 위해서 돈을 쓰는 것은 전문적인 일이니 누구도 참견할 수 없다. 그러나 상업상이 아니라 인간사에 그 힘을 이용하려 할 때에는 이치를 깨달은 사람에게 물어야만 한다. 그러지 않으면 사회의 악을 스스로 양조해 놓고도 태연해 하는 경우가 생긴다. (중략) 그들이 학자, 문학자의 말에 귀를 기울여야 할 때가 올 것이다. 귀를 기울이지 않으면 사회상의 지위를 유지할 수 없는 시기가 올 것이다. (235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