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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론과 서평/소설 / 희곡 읽기

백가흠 장편소설 『향』(문학과지성사, 2013)을 읽다


『향』(문학과지성사, 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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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주 지하철을 오가면서 백가흠 장편소설 『향』(문학과지성사, 2013)을 읽었다. 그동안 죽음 너머를 사유하는 것이 주로 신화나 종교의 일이었다면, 이 작품과 함께 비로소 21세기 한국문학도 그 영역을 넘보게 되었다. 이런 의미에서 권혁웅이 작품 해설에서 이 작품을 박상륭의 『죽음의 한 연구』에 빗대어 “죽음의 또 다른 한 연구”(253쪽)이라고 부른 것은 아주 적절하다. 죽음은 이 소설의 처음과 끝을 순환하면서 모든 언어들을 감싸고 있으며, 인물들을 행위로 이끌고 있다. 힘들게 쓴 소설이고 그런 만큼 쉽게 읽히지 않지만, 이 소설로부터 우리 문학은 심오한 형이상학 하나를 21세기에도 형상화할 수 있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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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향』에서 죽음은 그냥 죽음이 아니다. 대개 그 죽음은, 백가흠 소설의 오랜 탐구 대상이기도 한, (범죄적) 폭력의 결과로 주어진다. 이 점은 아주 중요한데, 죽음이 단지 종교적, 신화적 죽음이 아니라 구체적, 사회적 죽음이기 때문이다. 죽음 이후의 세계는, 소설이 보여 주듯, 사자(死者)들의 삶을 둘러싼 각종 사건들의 망각이자 소멸이요, 오직 그를 통해서만 가능한 새로운 삶의 시작이다. 그렇지만 『향』의 인물들이 겪고 또 살고 있는 죽음은 다만 순수한 죽음이 아니라 이미 오염된 죽음, 폭력의 흔적을 쉽게 정화할 수 없는, 지옥과도 같았던 생의 기억을 절대로 청산할 수 없는 죽음이다. 그러므로 『향』의 인물들은 죽음의 형이상학(유토피아) 안에서도 계속해서 과거를 살면서 사회학적으로 사고하고 행동한다. 그 결과는 마을의 파괴와 재건이다. 『향』은 폭력의 신화적 추상화이면서 동시에 신화의 사회적 구체화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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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은 폭력 없는 세계, 평화의 원초성을 향해 서 있다. 폭력의 인터내셔널, 인물들의 죽음은 서울에서, 파리에서, 런던에서, 암스테르담에서, 인도에서, 그러니까 전 세계에서 일어난다. 인간이 살아가는 모든 곳에 지옥이 펼쳐지고, 인물들은 그 지옥을 살면서 영혼과 육체에 끔찍한 상처를 입는다. 그들에게는 죽음조차 지울 수 없는 흉터가 낙인 찍혀 있다. 그들은 상처를 씻고 흉터를 지우기 위해, 인도 북부 어딘가에 있는 신성한 숲으로 모여든다. 이러한 폭력의 세계적 편재성은 평화를 위한 국제적 연대의 가능성을 끊임없이 환기한다. 숲속의 마을은 다국적 인간들로 이루어져 있지만, 그들은 이전의 가족, 사회, 언어로부터 자유로이 서로 소통한다. 결국 파괴되어 버렸지만 이것이 아마 작가의 궁극적 꿈일 것이다. 폭력의 인터내셔널이 아닌 평화의 인터내셔널. 작가는 숲의 신성한 공간을 열고 닫음으로써 이러한 연대의 사고에 서툰 한국어를 과감히 그 안으로 이행시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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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옵티콘의 눈으로 설계된 실핏줄거리는 인간이 상상할 수 있는 끔찍한 일들이 모조리 일어나는, “법과 질서라고는 애초에 없는”(56쪽) “다국, 무국, 무법, 무정치의 세상”(60쪽)이다. 그 안에서 살아가는 이들은, 아마 지그문트 바우만이 “밑바닥 계급(underclass)”이라고 부른 이들, “사회 ‘안’에 있지만 분명히 사회의 ‘일부분’은 아니며, 사회의 존속과 안녕에 필요한 어떠한 기여도 하지 않는” 이들, “‘내부 이민자’ 또는 ‘불법 이주자’, ‘우리 안의 외부인’의 지위로서, 파악되고 승인된 사회 구성원에게 허여된 권리를 보유하지 못한, 한마디로 말해 사회 유기체의 ‘천부적’이고 불가결한 구성 부분에 속하지 않는 이물질”(지그문트 바우만, 『부수적 피해』(정일준 옮김, 민음사, 2013, 10~11쪽)이다. 존재와 부재가 겹쳐진 유령들. 『향』에서 죽음을 겪고 숲으로 모여드는 인물들은 사회 안에서 사회를 파열하는 이 내부의 외부에 속해 있으며, 지박령처럼 죽어서도 그 공간 주변을 떠돈다. 권력은 끊임없이 이들을 배제해 없애려 하지만, 그러기 위해서 그들을 표시해 드러낼 수밖에 없는 역설에 빠진다. 이들을 사유하는 것이 아마 백가흠의, 더 나아가 한국어의 오랜 숙제였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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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폭력을 사유한다는 것, 폭력의 사회학 또는 정치학은 어쩌면 형이상학적, 신화적 사유 속에서는 가능하지 않을 수도 있다. 폭력은 언제나 지방적(local)이기 때문이다. 소설을 읽으면서 내내 불안했던 것은 아마 이 때문이었을 것이다. 폭력의 신화적 추상화라고나 할까? 그럴 위험이 『향』을 감싸고 있다. 숲 속의 마을, 죽은 자들이 이룩한 자발적 게토는 실핏줄거리, 권력이 한 곳으로 몰아넣은 비자발적 게토의 뒤집힌 복제, 거울을 통해 들여다보는 이미지-허상은 아닐까? 창조의 신이자 파괴의 신인 시바가 한 해에 한 번 내려와 목욕한다는 호수를 낀 북쪽의 도시에 있다는 그 숲을 탐구하는 것이 실핏줄거리의 삶에 대한 탐구를 대체할 수 있을까? 나는 읽는 내내, 이런 물음에 사로잡혀 있었다. 그러나 이 작품 『향』은 적어도 이질성의 사물 그 자체로는 우리 곁에 남아 있다. 밑바닥 계급들의 유령들이 떠도는, 그 비현시적 공간이 제거될 수 없는 채 영원히 유예된 상태로 귀환의 불안을 자극하는 “역사의 천사”(벤야민)로서 우리에게 기억될 것이다. 


천사는, 머물러 있고 싶어 하고, 죽은 자들을 불러 일깨우고, 또 산산히 부서진 것들을 모아서 다시 결합시키고 싶어 한다.(발터 벤야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