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평론과 서평/소설과 희곡 읽기

(44)
테드 창, 과학의 문으로 들어가 철학의 출구로 나오다 모든 SF는 잠정적으로 반체제 소설이다 테드 창의 이름을 처음 들은 것은 2000년대 초 《Happy SF》의 작가 특집을 통해서다. 이 작가는 중단편 8편으로 휴고상과 네뷸러상을 함께 받았다. SF를 즐기지는 않지만, 두 상을 동시에 받은 이른바 ‘더블 크라운’ 작품이 훌륭하다는 건 안다. 『듄』, 『어둠의 왼손』, 『빼앗긴 자들』, 『뉴로맨서』, 『엔더의 게임』, 『신들의 전쟁』 등이 이 목록에 속해 있기 때문이다. 소설은 자유의 양식이다. 특정 내용, 문장 스타일, 쓰는 방법 등이 정해지지 않았다는 말이다. 소설의 시학은 기성의 규칙이나 굳어진 관습 같은 것을 좀처럼 따르지 않고, 작가가 작품 내부에 이룩된 질서만을 존중한다. 이 때문에 소설은 어떤 이야기도 가능하고, 어떤 스타일도 거부하지 않는다..
낯선 사랑, 낯선 결혼, 낯선 이별 - 서유미의 『홀딩, 턴』(위즈덤하우스)를 읽다 “무엇보다도 사랑과 결혼이 겹치는 지점이 불편했다. 영진과 잘 지낼 때도 생활 속에서는 적당한 거리감 확보가 간절했다. 연애할 때는 밀착되는 게 좋았지만 그게 매일 이어지는 건 버거웠다. 지원이 꿈꾸는 건 오래 연애하는 상태에 가까웠다.”어제 오후, 서유미의 『홀딩, 턴』(위즈덤하우스, 2018)을 읽었다. 사랑과 이별의 과정이 아니라 내면을 더듬어 가는 섬세하고 느릿느릿한 이별 이야기다. 지원과 영진이 스윙댄스 동아리에서 만나 결혼하고 사소한 이유로 이혼에 이르는 다섯 해 동안의 삶을 그려 낸다. 둘의 이별은 불행하되 추접하지 않다. 침착하고 산뜻해서 신선하다.두 사람의 사랑은 ‘불행의 중력’을 이기지 못하고 파탄하지만, ‘쿨의 윤리’를 좇아 눈에 띄는, 아무 상처도 없이 갈라선다. 스무 해 전인 19..
어느새, ‘회사 인간’ 한 달에 한 번, 《중앙선데이》에 쓰는 칼럼입니다. 카프카의 『변신』을 통해 회사에 길들여진 몸에 대해서 생각해 보았습니다. 어느새, ‘회사 인간’ 연초에 휴가를 갔다. 새벽 5시, 여명이 있기도 전에 저절로 눈이 뜨인다. 느긋한 게으름을 피우자고 마음먹은 것도 별무소용이다. 신체가 제멋대로 움직인다. 어둠 속에서 멍하니 천장을 바라보다, 작은 등을 켜고 가져간 책을 읽는다. 가족들 숨소리가 고르다.회사를 나왔을 때도 한참 그랬다. 몸을 추스르려 동생이 사는 시골마을로 내려갔다. 굳이 출근할 필요가 없는데도, 아침 8시면 몸이 지하철에 출렁이는 것 같고, 12시에는 어김없이 배가 고프고, 오후 4시에는 무조건 지루하고, 7시가 되면 술 벌레가 창자를 건드렸다. 어쩔 수 없음을 알지만, 나는 여유와 한적을..
[21세기 고전] 인생에 좌절은 있어도 패배는 없다 - 공선옥, 『내가 가장 예뻤을 때』 인생에 좌절은 있어도 패배는 없다공선옥, 『내가 가장 예뻤을 때』(문학동네, 2009) 지하철역을 놓쳤다. 한 번도 아니고 두 번이나. 잠시를 못 참고, 또다시 책을 손에 잡은 탓이다. 허둥거리며 약속 장소로 뛰는데, 뒤가 궁금하면서 길 한쪽에 주저앉아 또 읽고 싶다. 처음 접하는 작품도 아닌데, 아무튼 이 지경이다. 이것이 공선옥이다. 『내가 가장 예뻤을 때』다. 조금도 편한 이야기가 아닌데도, 마음의 장벽을 넘어온 문장들이 잔상을 남기면서 시선을 다음으로, 다음으로 잡아끈다.“이글이글 타오르는 화톳불 위에서 고기가 익어 갔다. 제재소 마당에 유일하게 서 있는 목련나무 고목의 꽃망울이 팽팽하게 부풀어 오르는 봄날 저녁, 그늘이 포근히 내리고 있었다. 그 마당으로 환이 나왔다. 환이 나오자 어두운 마당이..
[21세기 고전] 복종을 금지하고 제멋대로 말하자 - 박형서의 『자정의 픽션』 《경향신문》에 연재하는 21세기 고전. 이번에는 박형서의 ‘침 같은 작품’ 『자정의 픽션』을 다루었습니다. 이 작품, 참 입이 걸죠.^^ 자유롭게 해방된 말들이 넘쳐납니다. 야유와 풍자를 통해 울음을 만드는 기이한 미학이 여기에 있습니다. 복종을 금지하고 제멋대로 말하자박형서, 『자정의 픽션』(문학과지성사, 2006) 박형서는 아주 “막나가는” 작가다. 평론가 김형중의 말이다. 이 평가는 중요하다. 조심하고 절제하는 금욕을 통한 축적은 이 시대의 윤리가 아니다. 미리 쓰고 나중에 갚는 신용 있는 허풍선이야말로 찬양받는 시민의 모델이다. 발끝으로 더듬대고 눈치를 돌리면서 한껏 조심해 봐야 이곳에서 미래라 해 봐야 청년 실업과 중년 해고와 노인 파산으로 이루어졌을 뿐이다. 그러니 카르페 디엠(Carpe Di..
내가 웃는 게 웃는 게 아니야 ―『최순덕 성령 충만기』와 새로운 이야기꾼의 탄생 《경향신문》에 연재 중인 ‘21세기 고전’. 이번엔 이기호 소설집 『최순덕 성령 충만기』를 다루었습니다. 이 작가는 화법의 마술사와 같습니다. 다채로운 화법을 통해서 자본주의 아래에서 살아남으려고 발버둥치지만 전락을 피할 수 없는 우리 삶의 모습을 그야말로 ‘재미나게’ 이야기하는 재능이 있습니다. 이문구, 황석영, 성석제의 뒤를 잇는 이야기꾼의 탄생이라고 불러도 좋겠지요. 내가 웃는 게 웃는 게 아니야『최순덕 성령 충만기』와 새로운 이야기꾼의 탄생 한국문학에서 ‘입담’이란 한 소설가가 이룩한 어떤 신화를 상징한다. 황석영, 성석제 등의 이름 앞에 붙은 ‘구라장이’ 또는 ‘이야기꾼’이라는 칭호는 독자 대중의 심장에 열광을 불러일으키는 유혹의 북소리이자, 문장들의 건조한 나열에 불과한 소설에 입말의 생생함을..
[풍월당 문학 강의] 부조리한 이 생을 어떻게 사랑할 것인가 - 헤밍웨이의 노인과 바다 문학은 우리에게 한 번뿐인 인생을 사랑하는 방법을 알려줍니다. 사랑하는 법을 배우지 못하면 아이가 어른이 될 수 없듯이, 문학을 읽지 않으면 삶을 제대로 사랑하지 못하는 게 아닐까요. 한 달에 한 번, 서울 강남 압구정동에 있는 풍월당 아카데미에서 문학의 고전들을 같이 읽고 있습니다. 2015년에 처음으로 시작했으니, 벌써 두 해가 훌쩍 넘었습니다. 올해 초에 『일리아스』, 『오뒷세이아』, 『길가메시 서사시』 등 이야기의 기원에 관한 책들을 같이 읽었고, 이달 4월부터는 새롭게 삶의 부조리 문제를 다루어 보려고 합니다.첫 번째로 고른 작품은 헤밍웨이의 걸작 『노인과 바다』입니다. 이어서 카뮈의 『이방인』, 사르트르의 『구토』, 베케트의 『고도를 기다리며』를 한 달에 한 작품씩 연속으로 읽을까 합니다. 강..
[21세기 고전] 그래도 사랑은 계속될 것이다 ※ 《경향신문》에 연재 중인 ‘21세기 고전’. 이번애는 이현수의 『신기생뎐』을 다루었습니다. 역사의 밀물에 떠밀리고 있는 근현대사의 잊힌 삶들에 주목하는 이 작가의 성취는 아주 높습니다. 언어의 세밀화가로서 그녀가 그려내는 세계는 정말 풍요롭죠. 이 작품을 비롯하여 『토란』(문이당, 2003), 『나흘』(문학동네, 2013) 등은 독서공동체에서 같이 읽고 이야기하기에 아주 좋습니다. 군산 부용각. 빼어난 노래와 신명나는 춤을 빌미로 여자들이 사랑을 사고파는, 그러다 사랑을 하기도 잃기도 하는 기생집이다. 이현수의 『신기생뎐』의 무대다. 주요 주인공은 넷이다. 소리기생 오 마담, 부엌어멈 타박네, 춤기생 미스 민, 오 마담을 스무 해 동안 외사랑하는 박 기사. 연작소설의 화자를 이루는 사람마다 사연이 절..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