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잡문(雜文)/걷는 생각

강의와 강연


봄에는 얼어붙은 입들도 풀리는 것일까. 사나흘에 한 번쯤 도서관 등에서 강연 요청을 받는다. '말하기'와 '듣기' 시즌이 바야흐로 시작된 것이다. 고정으로 하는 일이 있기에 강연을 많이 할 수는 없지만, 강연을 하러 다니다 보면 당황스러운 일이 하나 있다. 이 강연에서 만났던 청중을 저 강연에서 보는 일이다. 

강연은 일종의 리듬을 타는데, 비슷한 주제를 이야기하다 보면 분명히 겹치는 부분이 생긴다. 관련한 일화 정도라면 괜찮겠지만, 때때로 분위기 환기에 필요한 농담마저도 같을 수 있다. 한데 강연을 한 차례 들었던 사람이 눈에 띄면, 어떻게 이야기를 풀어야 할까 싶어 시작부터 말이 꼬이는 것이다.


강연장 풍경


강의와 강연은 다르다. 일반적으로 강의가 똑같은 사람을 대상으로 특정 분야의 지식이나 학문의 방법을 일정 기간 체계를 잡아 전하는 것이라면, 강연은 대부분 일회성으로 어떤 주제에 대한 지식 또는 경험과 함께 적절한 통찰을 나누는 자리다. 그러나 통찰의 대부분은 두 번 나눌 만한 것이 못 된다. 강연 현장의 분위기 덕분에 갑자기 멋진 말들이 봇물을 이루는 촉발의 경험이 없지 않지만, 통찰은 대부분 한 사람의 경험과 지적 탐구의 교차로에서 생겨나는 번득임 같은 것이다. 같은 주제를 다룬다면 거의 비슷한 이야기를 할 가망성이 높으므로, 굳이 여러 차례 들을 까닭이 없다. 

예전에 한 철학자의 북 콘서트 행사가 열릴 때마다 쫓아다니는 열혈 독자를 만난 적이 있다. 심지어 같은 책에 비슷한 강연이었는데도 그랬다. 행사를 준비하는 사람으로서는 고맙지만, 속으로 안타까운 기분이 들기도 했다. 어떤 사람의 강연을 듣고 좋은 느낌이 왔다면, 강연을 쫓아다니면서 반복해 듣는 대신 차라리 그 느낌을 자기 삶으로 데려가 숙고하는 쪽이 낫다. 진정한 이해는 비슷한 강의를 여러 번 들어서 얻을 수 있기보다 타인의 통찰을 자기 인생의 문맥 안에서 확인하고, 이를 계기로 삶을 혁신하는 일에서 생겨난다. 

이에 비해 강의는 같은 스승을 좇아 비슷한 내용이라도 여러 번 듣는 게 좋다. 생각하는 법이나 지식의 체계 자체를 수업해야 하니까 말이다. 솔직히, 학창 시절에는 잘 몰랐다. 스승께서 당신이 쓴 저서를 들고 한 줄 한 줄 읽으면서 세세히 해설을 덧붙이는 것이 가장 높은 수준의 강의라는 사실을. 책에 담긴 지식은 읽어 보라 하면 끝이지만, 한 학자가 도달한 생각하는 법이나 자료를 분석하는 법 자체는 문헌의 세부를 제자들과 함께 반복해 읽으면서 해설을 통해 전할 수밖에 없다. 아마 수학자나 물리학자였더라면 과학의 기초 공식이나 실험 알고리즘을 한 단계씩 풀이하면서 과학의 사고법을 전했을 것이다. 

홀로 생각할 수 없을 때 이렇게 생각의 등뼈를 이룩해 준 이만이 스승이 될 수 있다. 강의에는 스승이 있지만, 강연에는 스승이 없다. 수업의 형태가 아니라면, 스타 강사의 강연을 반복해 들을 까닭은 별로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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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주 쓰는 《매일경제》 칼럼 ‘책과 미래’, 이번 주에는 강연과 강의에 대해 생각해 보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