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잡문(雜文)/공감과 성찰

한 역사학자의 죽음

서양사학자 이영석 교수가 세상을 떠났다. 대중한테 이름 높은 ‘미디어 인문학자’도, 연구는 뒷전이고 이른바 ‘활동’에 전념하는 참여파도 아니었다. 

전공은 영국 사회 경제사. 평생 남의 나라 역사 한 부분을 좁고 깊게 팠다. 관련 학자들 말고 이름이 알려질 까닭은 별로 없었다.

주변 소셜 미디어 쪽 반응은 달랐다. 다른 분야의 많은 지식인들도 크고 작은 인연을 고백하고, 학문적 일생에 존경을 표했다. 

“요즘 젊은이들이 책은 읽지 않지만, 페이스북에 실린 글은 읽는다는 얘기를 들었다”라면서, 대학을 정년퇴직한 후 페이스북에서 역사 관련 지식과 통찰을 공유한 까닭도 있을 테다. 

자기 공부를 정리한 『삶으로서의 역사』, 코로나19 팬데믹 이후 일상을 성찰한 『잠시 멈춘 세계 앞에서』 등은 그 결과였다. 목소리는 낮았으나 품격이 있고, 엄정한 사실에 바탕을 둔 단단한 글이었다.

그러나 존경의 표시에는 그 이상 큰 애도가 있었다고 생각한다. 장인의 삶에 대한 존중이다. 

우리 사회는 너무 시끄럽고 들떠 있다. 모두가 자유롭게 떠들 수 있다고 해서 말의 무게도 같은 건 아니다. 조용히, 꾸준히, 자기 분야에서 헌신한 전문가 언어를 더 신뢰해야 하는 건 말할 나위도 없다. 

권력은 거부하되 권위는 존중할 때 문화는 비로소 성숙에 이른다. 어용을 자처하면서 화려하게 떠들 줄 안다고, 사실을 억지로 꾸며내 대중 감정에 호소한다고, 실체도 대단한 사람은 아니다. 누구나 역사를 말할 수 있으나, 어떤 언어는 다른 언어보다 더 무게 있게 받아들여야 한다. 

이 교수는 “영국 경제사나 사회사 같은 지엽적 주제도 현대 자본주의의 문제를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될 수 있으리라는 믿음”이 있었다. 연구 작업을 통해 “오늘날 우리 사회를 다시 성찰하는 기회를 마련”하고 싶어 했다. 

가만히 있지도 않았다. 『역사학을 위한 변론』(1999) 이후, 한 해 한 권 정도 자기 분야의 학문 성과를 집약해 세상에 알리는 일을 포기하지 않았다. 『영국 제국의 초상』, 『역사가를 사로잡은 역사가들』, 『전염병, 역사를 흔들다』 등 연구 노동자로서 혼신의 힘을 다해 많은 책을 저술하고 번역했다. 

병으로 더 이상 글을 쓰기 힘든 지경에 이르렀으나, 작업을 포기하지 않았다. 병상에서 일기를 적으면서 마지막까지 유작 『사회사로의 초대』를 완성했다. 학자의 일을 통해 세상을 더 좋게 만들려 했던 장인다운 죽음이었다.

문인이나 학자의 추모는 언제나 책을 다시 읽는 데서 출발한다. 글로써 죽음과 싸우는 자들에 대한 궁극의 예의다. 

놀랍게도, 많은 이들이 그의 책 한 권쯤을 서가에 가지고 있었고, 자기 삶과 공부에서 그의 목소리를 간직하고 있었다. 

목소리가 낮다고 퍼지지 않는 건 아니다. 정신에 깊은 영향을 끼치는 목소리는 단단한 베이스로 울려 천천히 멀리까지 퍼진다. 우리 사회에는 이러한 장인들이 곳곳에 있고, 이들이 우리 삶의 기둥을 만든다. 고인의 명복을 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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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경제> 칼럼입니다.

"글쓰기는 유희라기보다는 의무이고, 글을 쓸 때는 항상 엄숙하며 마음도 무겁다. …… 아마 그 태도를 견지할 수 있었던 동력은 스스로를 연구노동자로 자처하고 비록 힘든 육체노동을 하지는 않지만 좁게는 그들처럼 항상 근면해야 한다는 의무감과, 그리고 넓게는 이 보잘것없는 연구노동의 결과가 그래도 이 사회의 인문 진화에 조금쯤 기여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감에서 나왔을 것이다." (『잠시 멈춘 세계 앞에서』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