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잡문(雜文)/읽기에 대하여

스무 살에 소설을 읽고, 쉰 살에 소설을 다시 읽어라

학교에 다닐 때 대학 도서관에 틀어박혀서 세계문학전집 한 질을 독파한 적이 있다. 작품마다 담고 있는 세계의 깊이와 넓이가 만만치 않았으나, 이때 힘들여 읽은 경험이 평생의 자산이 되었다. 

좋은 소설은 인생을 미리, 심지어 여러 번 살도록 해준다. 타인의 슬픔과 기쁨, 상실과 회복, 고난과 승리를 내 일로 수없이 체험하는 것은 다가올 어떤 인생도 두렵지 않게 만들어 준다. 스무 살에는 반드시 소설을 읽어야 한다.

하지만 소설은 ‘중년의 예술’이다. 요즘 들어 이 말을 실감한다. 몇 해 전부터 한 달에 한두 권 정도 예전에 읽었던 고전 소설을 다시 읽는 중이다. 

때때로 옛날에 내가 읽은 건 뭐인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줄거리나 내용을 잘못 기억해서가 아니다. 문학작품엔 스포일러가 없다. 좋은 작품은 결말을 알아도 늘 재미있고 유익하다. 

충격을 받은 건 작품을 처음 읽었을 때 잘 모르고 읽었다는 느낌 때문이었다. 예전에 특별히 잘못 읽었다는 뜻은 아니다. 그 나이에 맞게 다가오는 만큼 읽은 것뿐이다. 

하지만 그사이 사건 전체를 관조할 만한 경험이 쌓이고, 지루하고 복잡한 사변을 견딜 만큼 넉넉한 마음도 얻어서인지, 작품의 흐름과 인물들 행동이 세부까지 너무나 생생하게 다가왔다. 이래서 고전이구나, 하는 생각이 새삼 들었다.

『리리딩』(이영미 옮김, 오브제, 2013)에서 퍼트리샤 스펙스 버지니아 대학 교수도 은퇴 후 한 해 동안 예전에 읽은 소설을 다시 읽었다.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 『오만과 편견』, 『호밀밭의 파수꾼』, 『황금 노트북』, 『포트노이의 불평』 등이다. 

스펙스 교수 역시 나와 마찬가지로 작품을 읽으면서 새로운 경험을 한다. 디테일을 다시 인식하고, 과거의 자신을 떠올리는 편안함을 누리기도 하고, 가치의 문제를 다시 주목하기도 한다. 

모험을 통해 끝없이 자기 정체성을 되묻는 앨리스와 함께 데카르트의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를 떠올리고, 엘리자베스의 결혼 이야기에서 타인에 대한 동정심과 이해가 문명의 토대임을 확인한다. 한 해 동안의 다시 읽기를 마친 후 그는 이야기한다.

“다시 읽기는 작품뿐 아니라 자신의 인생과 과거의 자아에 대한 기억을 되살릴 방책이자, 반쯤 잊은 진실을 되살리는 것이며 새로운 통찰의 실마리이다.” 

청년 때 독서는 한 사람의 정체성 형성에 도움을 주고, 다시 읽기는 시간 흐름에 따라 우리가 어떻게 변했는지 알려준다는 말이다. 한마디로, 다시 읽기는 우리 자신을 새롭게 만나는 체험이다.

한 작가의 말처럼, “작품은 언제나 낯선 타인이다.” 다시 읽기는 이 말을 실감하게 만든다. 당대에는 열광하면서 읽었으나, 지금은 아무 느낌도 없는 빤한 작품도 흔하다. 베스트셀러가 한 세대 후에도 명작이긴 꽤 어렵다. 

SF소설은 반대다. 처음엔 황당한 공상, 재밌는 오락쯤으로 여겼으나, 다시 읽으니 문명의 미래에 대한 풍부한 상상과 진지한 성찰을 담은 명작이 꽤 많았다. 작품은 같은데, 내가 달라진 것이다. 

쉰 살에는 소설을 다시 읽어야 한다. 자신을 확인하고 노년을 살아갈 지혜를 새롭게 충전하기 위해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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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경제> 칼럼입니다.

살짝 수정했습니다.